네 답을 정정해주는 듯한 말에 고갤 끄덕인 너는,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블로 가져와진 핫초코를 보고 점원에게 감사합니다. 라고 짤막하게 인사를 건넨다. 핫초코가 뜨거우니 조심하라는 레레시아의 말에는, 네. 하고 대답하며 마시멜로가 초코에 천천히 가라앉는 모습을 본다. 가라앉는게 맞나? 싶을 정도로 천천히 가라앉는 마시멜로를 쳐다보고 있자니 가디언즈였다는 걸 밝힌 소감을 들은 레레시아의 말이 들려와 시선을 옮겼다.
"언제나...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부르는 법이니까요. 언제가 됐든 우린 마주치게 되겠죠. 절망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사람들을요."
이번 일로 새롭게 생각을 바꾼 사람들을 마주친다면 또 느낌이 색다르긴 하겠네요. 이번 일로 그런 사람이 더 늘었다면 좋은 일이지만, 그렇지 않아도 어쩔 수는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것 역시 스스로가 취해야 하는 모습이었으니까. 억지로 손에 끈을 쥐어준다고 해서 끝까지 붙잡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니까 쥐어주는 것까지만, 그 뒤에는 스스로 판단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멈췄다. 벌써 반 정도 잠겼다.
"그런 부분들까지 전부 신경 쓸 겨를도 없고, 사실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해명해야 할 것도, 그들이 제게 불만을 가지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으니까요. 아마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꽤 되겠죠, 그건 딱히 저라서가 아닐 겁니다. 지금의 제가 누구인지는 그들에게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테니까요."
죽이려 들지만 않는다면야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만큼의 증오를 감당할 수 있을지는... 네, 잘 모르겠네요."
가디언즈의 만행에 대해 사과하라고 이야기한다면야 되는 대로, 몇 번이고, 그 이상이라도 하겠지만 말입니다. 라고 말을 끝맺는다. 네가 에델바이스에 도착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을 떠올리면 더욱 그러했다. 그 당시의 네 모습은 전혀 상관이 없었지, 그들에게도, 또 저들에게도.
"그럼 웃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 말씀이군요, 글쎄요... 사실 그렇게까지 거슬릴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렇게 헤프게 웃는 편인가 생각하면 아무래도 조심해야 할 것 같긴 합니다."
물론...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그런 고민이 들 때 불편한 미소가 떠오르는 건 사실입니다. 그걸로 상황이 해결된다면야 몇 번이고 웃겠습니다마는 아마 그건 아닌 것 같네요. 웃으면 안 되는 상황이라... 확실히 그런 상황에 웃는 건 문제겠죠, 제 딴에는 그렇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아닌 모양입니다."
상황을 부드럽게 넘기는 게 능숙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누군가의 눈치를 본다는 건 어지간히도 둔하지 않은 다음에야 다 느낄 만한 부분이니 그걸 신경쓰는 상대방에겐 적잖히 불편하겠지, 그렇다고 해서 매양 머리를 차갑게 식힌 듯 무뚝뚝하게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뭣보다도...
"웃는 것과, 우는 것의 차이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레시?"
어느새 다 녹아버린 마시멜로가 담긴 핫초코를 내려다보던 네 입에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말은 그랬다.
적당히 산미 있고 부드럽다. 황설탕 스틱 하나를 넣으면 완벽할 것이다. 이스마엘은 잔을 내려두고 슈가 스틱의 종이 포장을 찢다가, 고개를 들었다. 노이즈가 규칙적으로 지직 거렸다. 이스마엘이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노이즈를 가리켰지만, 손가락은 노이즈에 삼켜져 한마디가 뚝 사라지고 말았다.
"아, 이거 말입니까?"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이스마엘은 노이즈 너머에서 환히 웃었다. "저는 인간보다는 조금 더 높은 경지를 꿈꾸는 부류기 때문입니다. 개조를 통해 새로운 인류로 거듭난다, 트랜스휴먼이라고 하죠!" 이스마엘도 기술이 발전하며 본인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속칭 트랜스휴먼이라 지칭하는 부류였나 보다. 이내 "비밀이 사람을 더 아름답게 만든다고 하지요." 같은 농담도 덧붙이는 걸 보니 그저 숨기고 싶어서 숨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황설탕이 에스프레소에 쏟아진다. 적당하게 가라앉은 설탕을 뒤로 에스프레소를 단숨에 들이키자 녹지 않은 설탕 결정이 잔 안에 모래처럼 남아있었다. 뜨거운 에스프레소, 황설탕 한 스푼, 단숨에 들이키고 남는 단맛과 향. 정석적으로 에스프레소를 즐긴 이스마엘은 탄산수로 입가심을 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음.. 친숙한 게 아닌가? 적어도 이스마엘은 그랬기 때문인지 당신의 되물음에 어떻게 답할지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 친숙한 게 맞나 보다! 활짝 펴진 미소를 보며 이스마엘의 노이즈도 다시 표정을 띠었다. ☺. 이스마엘이 반말이라는 말에 노이즈 너머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건 반영되지 못한 듯싶다. 그러니까……. 아! 그러긴 하겠다. 사람은 공적인 모습보다 사적인 모습에 더 호감을 느끼니까 반말이 더 효과적이겠지! 이스마엘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니.. 알겠..어?"
느린 진도, 편안한 수업환경.. 대학원생 이스마엘은 논문과 ppt를 수월하게 준비할.. 수 없었다. 여승우 교수의 급발진은 인권이 세 배나 없는 대학원생, 이스마엘 H. 케르스트이에게 숟가락을 쥐여주고 저기 산을 파내라 명령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저 산 보여? 지금부터 너는 저걸 파서.. 옮기는 거야. 이건 help가 아니라 do it이란다. 이스마엘의 눈이 동그랗게 뜨이자 그제야 표정이 페이시에 반영이 됐다.
"……그렇, 습.. 그런 거야..?"
교수님, 진도가 너무 빠릅니다……. 나 학점은 받을 수 있겠지? 고민도 잠시, 당신의 입에서 흐른 말과 예시로 들어준 행동이 친숙하다. 슬럼에서 자신을 발견한 사람들의 모습과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은 깨달음을 얻었다. 아, 그 사람들.. 나를 반갑게 대하며 인사까지 해준 거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그 사람들 주머니에서 돈이나 쌔비고.. 다정하게 굴어줬는데!
카푸치노의 휘핑이 사그라들듯이 핫초코의 마시멜로도 녹아들어간다. 그 위로 오가는 대화는 가벼운 목소리에 비해 무거운 내용이다. 갓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서 할 얘기는 아니었나 싶어 화두를 돌릴까 했지만. 이미 말을 꺼낸 지금이 아니면 나중은 없을 것 같아 대화를 계속하기로 한다. 단지 대화의 끝에 그녀가 그에게, 혹은 그가 그녀에게 넌덜머리 나지 않길 바랄 뿐.
"허. 고민 좀 하려나 싶었는데 꽤 명쾌한 생각을 갖고 있었네? 맞지. 누군가가 너에게 감정을 표해도 그건 너에게 내는게 아니니 솔직히 신경 쓸 이유가 없지. 내 분노도 그런 맥락이었고."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 한 마디로 정리되는 쥬데카의 대답은 레레시아가 정말 의외라는 표정을 짓게 만들었다. 우울한 면상으로 고민하지 않을까 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정신이 단단한 듯 했다. 아니면 그렇게 영향 받을 멘탈이 이미 없던가. 어느 쪽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휘핑 죽은 카푸치노를 마신다. 입술에 가볍게 묻어나는 휘핑의 잔재를 혀로 훑고 잔을 쥔 채로 내려놓으며 말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증오를 감당한다는 생각 자체를 말아야 하지 않나 싶은데. 이제 아닌데 어쩌라고, 배째라는 식으로 일관해. 하라는 대로 해줄 바에는."
미안합니다. 사과하라면 하겠습니다. 였던가. 한때 눈 먼 분노를 그에게 드러냈던 사람으로써 그 말 만큼은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더욱 분노해서가 아니다. 그녀의 분노를 표출할 곳이 옳지 않았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우연히 그 방향을 바로잡아 어긋나지 않았지만, 다른 누군가는 모른다. 그러니 어설픈 무언가는 해줄 생각 말라는 말을 하는 목소리가 잠시지만 차가웠을지도 모르겠다.
식은 목소리를 데우듯 카푸치노를 마시던 레레시아에게 느닷없는 질문이 들린 건, 그의 웃는 얼굴이 마음에 안 든다는 개인적 견해를 내놓은 후였다. 정확히는 쥬데카 나름대로의 말을 한 후여서, 그녀는 하려던 말을 잠시 삼키고 쥬데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런 걸 묻는 의도가 무엇인지 살피듯. 조금 후에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며 그에 대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잘 모르겠다. 웃어도 울어도 눈물이 나고. 감정의 시작점이 다른가 하면 그건 또 아닌 거 같고. 생각해보니 딱히 차이가 없는 거 같은데."
그러니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라고. 말 대신 고갯짓을 까딱 해보인다. 하얀 머리칼이 살랑 흔들리는 그녀의 얼굴은 무심함 그 자체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