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듣고 좋아할만한 말은 아니었다. 아니, 보편적으로는 기분이 다운되는건 맞겠지. 그러나 누구도 자책하지 말아줬으면 하는 건 진심이다. 나와 같은 짐을 누군가에게 지우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척 보기에도 엔은 그렇게까지 편한 기분은 아닌 것 같아 보인다. 당연한 일이겠지. 하지만 저렇게 겉으로 보이도록 반응을 하는 것도 처음 보는 것 같다.
"어어, 그래. 먼저 가."
인형같기만 하던 그녀가 천천히 더 많은 감정을 내비치는... 아니, 어쩌면 감정을 '배우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력감과 슬픔 같은걸 가르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는데. 적어도 나로 인해서 그런 감정을 얻게 되는 것은 싫다. 이기적인 이야기다.
고공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는 것이 하루이틀 일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따라, 이 거센 바람이 서글프게 느껴졌다. 생소한 기분이군. 어쩌면 감정을 배워가는 게 그녀 뿐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헌데, 그런 사색에 젖어있는 동안 나는 아주 중요한 것을 잊고 말았다.
"...근데, 나 여기서 어떻게 내려가지?"
이후, 나는 마을에서 꽤 떨어진 숲 한가운데에서 어딘가 한두군데 부러진 채 야생동물들 및 곤충들과 맞서 싸우며 살아남다가, 야수 몇 마리의 가죽을 뒤집어 쓴 채 기적적으로 주민들에게 발견되었다.
정론이다. 결과적으로 네 몸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으니 그런 말을 들어도 뭐라 반박할 만한 게 없었다. 그보다는 라라시아의 말투가 처음 이야기를 나눴을 때와는 다른, 정반대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그런 부분을 이야기하기도 전에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것에 입을 다문다.
"가능하다면 빨리 나았으면 하지만... 무리만 하지 않는다면 잘 나을거라는 이야기도 들어서요, 저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봐주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일단은 처치가 끝난 상태였고, 라라시아가 세븐스를 쓰며 피곤해지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싶어 그렇게 덧붙인 너는 라라시아의 품에 안긴 모양새가 되어 아하하... 하고 조금 당황스러운 웃음소리를 냈다. 확실히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 같긴...한데 막상 떠올려보면 레레시아가 이런 말투였을 때에는 이렇게 다가오지는 않았었다고 생각해 본다. 그럼 이쪽이 진짜라는 이야기려나.
"다 보고 계셨군요... 조금 부끄럽네요, 음...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요, 어쩔 수 없다고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데려오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지 않을 이유는 되지 않았다. 마지막에 이르러 들었던 목소리와 표정이 뇌리에 남았기 때문이었을까.
"더 이상 싸우지 않았던 건 옳은 일이었겠죠..."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에델바이스와 아마도 간부 수준이었을 두 사람, 승산이 정말 없었으리라 생각하면서 너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세븐스와 비 세븐스가 공존하는 이곳에서 세븐스임을 꼭 숨겨야할까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녀의 생각을 존중하기로한다. 그녀가 밖에서 무슨 일을 겪은 지도 모를 뿐더러 능력을 사용하라는 또 하나의 강요가 될 수 있으니까.
"나도. 그런데 꼬맹이들은 좋아하더라고?"
옛날 길거리에서 공연으로 아이들과 놀아주었을 때, 모자 마술을 보여주면 아이들은 항상 이상한 것을 이상한 표정과 함께 이상한 목소리로 외치곤 했다. 그것을 일일히 대답해주면 공연의 페이스가 깨져 못들은 척 넘어가지만 왜 아이들은 이런 것을 좋아할까 늘 궁금했다.
"그정도면 사탕 가게를 차려도 되겠어"
바구니 한가득 물건을 담는 마리를 보고 감탄한다. 대체 얼마나 많은 아이들에게 주려고 이렇게 많은 사탕을 사는 걸까?
"글쎄? 딱히 정해둔 건 없는 데? 카페가서 음료나 마셔야지"
이렇게 밖으로 나온 날에는 항상 카페에 가서 음료를 마시며 책 한권을 읽곤한다. 딱히 책을 좋아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좋은 글귀를 보면 공연을 하거나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데 도움을 준다. 물론 어디까지나 옛 일이고 지금은 그저 습관처럼 한두권씩 뽑아 보는 게 끝이지만.
아이들은 좋아한다는 말에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나잇대에는 뭐든 즐거울 수 있는 때이니까. 쉽게 상처받지만 또 금방 이겨내기도 하고 작은 것에 감동하거나 호기심을 느끼고 금방 웃고 금방 울음을 그친다. 나도 그랬을까 생각하면 너무 먼 이야기인 것 같아지지만 아이들을 보다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으응? 어... 음... 썩는 것도 아닌데 사탕 남으면 천천히 먹으면 되거든...?"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부루퉁한 표정으로 말하다가 이내 표정을 푼다. 바구니에 든 것들을 계산을 하면서 마리는 카페에 간다는 선우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따라갈까 생각했지만, 역시 안전공간 밖에서 무언가를 마시는 것은 조금 불편하다. 생각해보면 제가 불편해하는 것들이 참 많다 싶다. 밖에서 무언가를 먹고 마시는 것도 불편해, 비세븐스들이 함께 있는 마을을 돌아다니는 것도 불편해. 이렇게 불편하게만 살아서는 좋지 않다고는 생각한다. 조금씩 극복해나가는 것도 필요한 걸까.
"그렇구나. 나는 이거 사고 기지로 돌아가야겠어."
그래도 궁금증은 남은 모양이었다.
"자주 가는 카페 있어?"
이 마을에 있는 지리는 이미 다 꿰고 있지만 카페에 들어간다거나 여러 시설들을 이용한다거나 하지는 않았었기 때문에 그 안이 어떻고 어떤 곳이 좋고 하는 것은 잘 몰랐다. 일단 들어놓고 나중에 찬찬히 불편함들을 극복해나간다면 가볼 수 있지 않겠는가.
반박 없이 수긍하는 쥬데카의 태도에 레레시아는 또 혀를 차고 라라시아는 쥬데카의 어깨를 토닥인다. 서로 바뀌었지만 미묘하게 이전과 섞인 것 같기도 한 그런 반응들이지 않았을까. 쥬데카의 뒤에서 가볍게 닿는 수준으로 포옹을 한 라라시아가 그럼, 이라며 말했다.
"회복력만 조금 올려줄게에. 다른 사람들 걱정은 말아- 다들 원하는 만큼은 해줬으니까아. 뭐어, 딱 한 명은 해주기 싫었지만."
재잘대는 말 사이로 자매 간의 따끔한 눈빛 교환이 소리 없이 오간다. 그러면서 라라시아는 쥬데카의 몸에 세븐스를 써서 완치는 아니지만 한결 편안하게 느껴질 정도로 해주었다. 그리고 앞에서 레레시아가 말을 꺼낸다. 레이버를 데려오지 못 한 것에 대해서다.
"너무 자책하지 마. 그 상황에선 누구도 뭘 할 수 없었어. 나도 처우에 대해 묻는게 고작이었고. 솔직히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뭐라고 했던가. 다시 교육시켜서 병력으로 쓴다고 했던가. 자세히 보진 못 했지만 무장이 깨진 후 레이버는 어딘가 해방된 듯 했다. 굳건해 보였으나, 스스로의 신념에 의심이 들어 결국은 그동안 믿었던 것이 깨지고, 눈 돌렸던 것을 마주했을 때의 모습 같았을까. 그런 이가 이전과 같은 신념으로 다시 일어서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가디언즈는 억지력을 써서라도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레레시아의 미간이 구겨진다. 침대를 짚은 손이 시트를 서서히 움켜쥐고 그런 중얼거림이 흘러나온다.
"처음부터, 싸우지 않고 포기시켰더라면..."
처음부터는 무리였어도 적어도 그렇게 쓰러지기 전에 포기를 시켰더라면 결과는 달랐을까.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이다. 지나친 갈림길은 다시 갈 수 없고, 선택의 대가는 언젠가 치르면 그만이다. 레레시아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젓고 말했다.
"거기서 더 싸웠다간 나갔던 인원 전부가 위험했을 지도 몰라. 퇴각은 현명한 판단이었어."
복귀하고 보니 특수부대 뿐만 아니라 로벨리아들도 부상이 적지 않았다. 순간이지만 떠오르는 한 사람의 모습에 레레시아는 왼손목에 걸린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그 때까지 쥬데카의 머리카락을 만진다던가 하며 잠자코 있던 라라시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제법 멀쩡히 복귀해선 서로 쓴 소리나 하고 있네에. 그럴 거면 나가서 기분 전환이나 해-" "넌, 으휴. 분위기 좀 읽어. 눈치가 없냐." "그 분위기 칙칙한게 싫다는데 뭔 상관이야아? 리오도, 안 나가면 계속 이렇게 잡아놓는다?"
어쩐지 쌍둥이 사이의 인질 비슷한게 되어버린 것 같다면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으이그. 어쩌겠냐는 듯이 툭 내뱉은 레레시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서 쥬데카를 보며 물었다.
"계속 시달리다간 없던 병도 나겠다. 나가서 커피나 마실까 하는데. 갈거냐?"
싫음 말고. 그렇게 덧붙였으니 사양해도 괜찮을 듯 하다. 그러면 계속 라라시아에게 시달릴 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