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면이다 싶은 사이지만, 잭이 아이들을 받아준 것이 시야 한 구석에 보인다. 합이 잘 맞았어서 다행이였다. 그리 생각하며 들려오는 레이버의 말을 가만 듣는다. 솔직히 듣는다고 해서 뭐 좋은 정보라던가, 마냥 긍정적인 것만 도출되진 않을 테지만, 그냥 지껄이는 말을 듣고 싶었었다.
그녀의 말은 백 번 옳다. 당연하게도 체제에 순응하면 아무리 하층민이여도 콩 조각은 던져진다. 그 콩 조각이 아무리 미미해도, 불응하는 자들이 개처럼 몰매 맞는 것보다야 낫다. 행복과 만족은 이런 면에서는 상대적인 것이다만, 에델바이스나 다른 레지스탕스는 상대적인 만족감에서 그치치 못하고 온전히 행복하고 싶은 것이겠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댔다. 이런 상황에 맞는 말은 아니다만 결국 속 뜻이 중요한것 아닌가? 좋은 말 한 마디는 사람을 움직인다. 나쁜 말도 사람을 움직인다. 결국 말에 실린 힘은 존재한다. 아무리 말빨이 좋아도 진실되지 않는 한, 전해지는 감정이나 동요는 극히 제한되지 않을까. 그는 그런 이유로 아무런 말 없이 임무를 행할 뿐이다. 자신보다 더욱 적극적이고, 아름답고, 진실된 대원들이 많으니, 회유나 동요는 그들이 해줄 테다.
그는 극한의 나르시스트 비스무리 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자신의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그러면 온 정과 열정을 다할 것이 자신뿐이다. 그는 과거의 트라우마도 남지 않은 체이고, 앞으로 부딪쳐 갈 문제점도 어떻게든 해결해 나갈 것이다. 다만 과거의 번뇌는 여전히 그를 묶어두고 있다. 모두가 흔히 느끼는 죄책감을 그도 당연하다시피 느낀다. 그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인간이고, 사람이니까.
자신이 하는 행동은 다른 이들과는 달리 대의를 위한 것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도 아니다. 나아가 복수같은 거창한 것조차 아니다. 그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기심으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죽여왔던 남들에게 속죄하며 이런 반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밤에 발 뻗고 잘수 있도록. 추잡하다면 추잡하겠지만, 그는 개인주의자이니 욕을 들어도 괜찮을 것이다. 자신이 에델바이스에 소속되어 있는게 다른 피해자들을 욕보이는 일이더라도, 나아가 다른 부대원들의 미움을 사도 그러려니 할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그의 속내에서 나와 물체 상태의 그를 보자면, 여전히 레이버를 응시한 체로 힘을 싣고 있다. 두 단검은 날이 서 있는 체로, 그녀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다.
레이버가 그녀의 사슬과 다른 공격들 대처하기 바쁜 사이, 몇몇은 아이들을 풀어내었고 그녀와 팀원들의 말이 닿은 것인지 세븐스들은 남은 아이들을 구해내었다. 이제 내보내기만 하면! 그녀는 세븐스와 아이들이 사라지기 전에 소리쳤다.
"가려면 도시 바깥으로 나가! 괜찮아! 거긴 우리 동료가 있으니까!"
어느 쪽이든 로벨리아들이 있는 곳으로 가기만 하면 구출은 성공할 것이다. 이내 사라지는 그들을 보며 무사히 나갔기를 빈다. 그리고 이제 더는 거리낄 것 없이 레이버를 상대할 수 있게 되었다. 거리를 둔 레이버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그녀 역시 일갈했다.
"순리를 배신해봐야 비참하고 굴욕적인 삶 뿐이다? 지금 체제를 따르는 것 만이 세븐스의 살 길이다? 아니! 내가 내 의지로 내 신념을 지키며 사는 것이 제대로 된 삶이지! 누군가 만들어 내었고 다수가 소수를 핍박하는 순리가 과연 이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치우친 천칭을 강요하는 것이 과연 정의일까! 다시 한번 말해주지. 너희의 정의는 너희의 것일 뿐, 모두의 것이 아냐! 희생을 전제이며 필수인 정의는 정의가 아닌 에고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말해주지. 우리 역시 정의는 아니라고!"
캉! 날카로운 금속이 바닥을 찍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깃대를 세웠다. 도시로 들어오며 줄곧 들었던 하얀 결사의 깃발. 가운데 붉은 에델바이스가 선명하게 핀 그 깃발을 모든 카메라에 담기도록 펼치며 외쳤다.
"우리는 정의가 아니며 또한 영웅도 아니다! 단지! 사람으로 태어나 마땅히 주어지는 것을 되찾으려 하는 이들일 뿐이다! 누군가에게서 빼앗는 것이 아닌, 나의 것을 지키되 너의 것 또한 지키려 하는 이들이다! 세븐스라서, 비능력자라서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기꺼이 이 한 몸 내던지려 하는 사람일 뿐이란 말이다!"
영웅이 되고자 함이 아니고, 가디언즈를 대신할 권력자가 되고픔도 아니다. 그저 사람답게.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렇지 못 한 지금의 체계를 부수려 하는 어느 사람일 뿐이다.
거의 온 몸으로 내지르다시피 소리를 친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붉은 에델바이스가 펄럭이는 깃대를 들어 레이버를 겨누었다.
눈 앞에서 팟 하고 사라지는 세븐스들과 아이들을 보며 너는 체인을 붙잡은 손에 힘을 꽉 쥐었다. 물론 공중제비를 하며 멀어진 탓에 금방 체인이 풀려버렸기에 너는 체인을 잡아당겨 회수했다. 이제 다시 레이버 혼자와, 에델바이스의 제 0 특수부대 전원의 대치 상황. 서서히 치밀어오르는 듯한 분노를 터뜨리는 듯한 레이버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너는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째서 배신하는가?
비참한 삶으로 어째서 뛰어드는가? 순응한다면, 더 이상 비참해지진 않을 텐데.
"세계의 순리를 정한 건 누구죠? 누가 당신에게 그게 순리라고 말해준 겁니까? 대체 누가? 어째서 그 사람의 말에만 귀를 기울이는 겁니까?"
배신, 배신이라.
"당신도 알잖습니까? 비참함에도 정도가 있습니까? 대체 어디에 그런 게 있다는 거죠? 대체 누가... 이런 비참한 삶을 살게 해달라고 애원했습니까?"
그저 자유로이 살아가게 해달라고 했을 뿐인데. 그렇게 말했을 뿐이니 그런 거라면, 그들이 말하는 삶이 비참한 삶이 아니라는 것조차도 생각하지 못하는 겁니까?
"멋대로 정한 순리와 질서에 순응하는 게 정의라면, 그렇게 만들어진 정의에 따르는 게 올바른 삶이라면."
"세븐스로 태어나 숨죽여 지내거나, 세븐스가 아닌 이들에게, 가디언즈에게 언제든 끊어질 수도 있는 목숨을 간신히 붙잡고 불안 속에 사는 게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삶이라면."
"아니... 세븐스로 태어나 가디언즈가 되어, 나는 저 자리에 있지 않아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그 자리를 어떻게든 지키려고 하는 게 영웅의 자질이라면."
너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참상을, 네가 안에서부터 무너뜨렸던 것들을 떠올린다.
"나는 그 정의의 배반자입니다, 영웅이라는 이름에 전혀 걸맞지 않은 존재이기도 하죠."
너는 이번 전투에 나서기 전, 네 목에 걸었던 네 과거를 떠올린다. 네 움직임에 따라 짤랑이는 소리를 내는 그것은. 지금 네 손에 쥐어져 빛을 반사해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 나의 과거, 나의 기억.
"나는, 가디언즈 중 하나였던 자, 나와 같은 세븐스를 억누르기 위해 헌신했던 자입니다." "배반자가 최후에 도달할 곳은 지옥이라지만, 아무래도 좋습니다."
너는, 아니, 나는 몇 번이라도.
"나의 안식은 비로소 그 곳에서 이뤄질 테니까요."
나는 심호흡을 했다.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어. 나는 내 모습이 확실히 중계되기를 바랐다. 내가 가디언즈였다는 걸 모두가 알아차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더 이상 가디언즈가 아닌 널-
"붉은 꽃, 자유를 갈망하는. 한 떨기의 에델바이스의 이름으로!"
그렇게 소리치는 표정은 어땠을까, 보기에 우스꽝스럽지는 않았으려나. 이렇게 감정이 격해진 표정을 모두가 봐도 괜찮을 걸까? 아무래도 좋았다.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내 얼굴을 덮은 헬멧이 더 이상 시선을 의식하지 않게 해 줬으니까.
협박 아닌 협박이 들리면 그대로 응수한다. 뒷말은 끊었지만 뉘앙스만 들으면 조무래기 악역 비슷한 말 아니였을까. 아공간을 열어 그 안으로 물을 흘려보내는걸 보자하면 참 편리한 능력이라고 짧게 생각이 든다.
“해주게?”
보조나 해달라던 말과는 달리, 어째 당신 혼자서 수리를 끝마쳐 가는 것을 구경한다. 생활력이 꽤 된다고 속으로 감상을 읆다가도 자신의 일을 대신 꼼꼼히 해 주는 걸 보면 당신은 착한 사람이라고 짐작이 간다. 귀찮은 일 대신 해 주니까 입을 털거나 딱히 무언가를 하고 있지는 않은 채로, 건네 받았던 수리 도구만 가만히 들고 있다.
“애꿎은 사람 일 시키니까 좀 불편한데.”
그리 말을 해도 딱히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하는 표정은 아니다. 쓰레기나 버려 달라는 말을 들으면 이미 부러지고 교체된 샤워기의 파편들을 모아 옆구리에 낀 체로 있다. 고개만 끄덕이더니 더 할 말이 있다는 듯, 한 박자 쉬고 뭐라 말을 한다.
“후유증은 없고?”
전투 당시 당신의 총기난사가 기억에 남았다. 큰 총은 반동도 꽤 되는데, 그걸 거리낌 없이 쏴 재꼈으니 근육통은 거의 당연하고, 더 큰 상처도 입었을 수도 있겠다. 대충 그런 생각이었다.
모두가 말하는 것은 그대로 카메라 드론을 이용해서 중계되고 있었다. 즉, 여기서 싸우는 모든 것들 역시 다른 곳으로 중계가 된다는 내용이었다. 말 그대로 저항심을 가지고 있는 세븐스들의 '희망'을 부숴버릴지, 아니면 희망이 더욱 커져서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게 될지. 이 싸움은 그만큼의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적어도 쥬데카는 U.P.G 건물 쪽에서 다른 시선을 많이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허나 그 중에 딱 하나. 다른 시선들과는 다르게 참으로 불길한 시선이 하나 섞여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지금껏 한번도 느껴본적이 없는 감각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글라키에스의 시선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정의는 이 세상에 두 개가 존재할 수 없어. ...이 세상의 순리와 질서가 없으면 이 사회는 제대로 돌아갈 수 없어. ...그리고 힘없는 비능력자들이 피해를 입게 돼. ...그러니까 질서와 순리가 존재하는 거야. ...그것을, 그것을, 그것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파괴하는 것이 용납될 순 없어. 너희들은 정의가 아니야. ...테러리스트 주제에 정의를 입에 담지 마라! 테러리스트!"
"...사람으로서 태어나 마땅히 주어지는 것? ...이 세상에 도움이 되고, 비능력자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어. ...너희가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 ...너희들의 무해함을 이 세상에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야. ...아닌가? 테러리스트? 실제로 가디언즈는 모든 것을 보장받고 있어. ...자신의 무해함을, 이 세상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너희들이 말하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삶'이 보장되지 않는 거야. ...무해함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 세상의 질서를 지키는 것. 정의를 지키는 것 뿐이야."
"...어째서 그 사람의 말에만 귀를 기울이냐고?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동의했기 때문이야. ...그렇기에 이 체제가 완성된거야. 네가 부정하고 부정한다고 한들, 이 세상의 사람들은 그것을 원해. ...그러니까 그게 규율이고 그것이 질서, 그것이 정의인거야. ...오히려 동의하는 쪽이 훨씬 적은 것에 왜 귀를 기울어야 하지? 덜 원하는 쪽이 어째서 정의가 되는거지? ...결국 마음에 안 드니까 바꿔보겠다고 떼를 쓰는 것밖에 안되잖아. ...그게 정의야? 규율과 규칙, 질서가 마음에 안든다고 뒤엎어버리려고 하는 것이? 그것보다 모든 것을 제대로 누려놓고서 이제와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웃기는 거 아니야? ...그래. 넌 배신자야. ...너 같은 존재가 정의를 가장 크게 흔드는 존재야. ...그 로벨리아 아가씨와 마찬가지야. ...이 세계의 질서를 지키지 않고 다들 배신하고 파괴하려고만 해. ...스스로 선택한 정의를 저버리고 모든 질서와 규율, 순리를 파괴하려는 테러리스트 주제에! 너희들의 존재를 편들어주는 이는 이 세상에 없어!! 무엇보다 정의를 수호하고 지켜야만 하는 가디언즈를 배신한 너 따위가 있을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어!! 그러니까 너만큼은, 너만큼은 반드시 죽여주마!! 배신자!!!"
이내 레이버는 오른손을 높게 들었다. 그러자 남색 빛이 모여들었고 길쭉한 검의 형태로 바뀌었다. 본격적으로 보검을 꺼내들고 해방하기 전의 자세였다. 이어 그녀는 아주 힘껏 외쳤다.
이내 남색 빛이 하늘로 높게 솟구쳤다. 이전의 해방과는 명백하게 다른 긴장감이 그곳에 흐르기 시작했다. 그 남색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계속해서 솟구쳤고 이내 그 빛은 서서히 사라졌다. 이내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였고, 비가 소리가 울릴 정도로 강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빛이 사라지자 보이는 모습은 인어와 비슷한 느낌의 남색 지느러미형 장갑이 달려있으며. 상반신은 연하고 가벼운 파란색 장갑으로 덮여있고 입에 마스크를 하고 있고 오른손에 날카로운 남색 삼지창을 들고 있는, 이전에도 본 적이 있는 바로 그 장갑과 무장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