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확실히 학생의 본분은 공부이지만 말이지, 학교는 공부를 가르치는 곳이기도 하지만 학생들에게 사회적인 능력을 기르게 하는 곳이기도 하거든. 그러니까 리즈가 여기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이 학교의 본분을 반만 수행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거야. "
그녀가 옆나라 이야기를 하자 강민도 길게 말을 늘어놓으며 얘기했다. 사실 옆나라라고 한다면 그와 무관하지는 않은데 이름부터 한국식 이름이지 않은가. 물론 상당히 어릴적부터 유파에서 길러져왔고 일본에서 살아왔기에 그는 외모와 이름만 한국인일뿐 완전 일본인이나 다름 없었지만.
" 의외로 리즈 같은 사람들은 별로 없는걸. 아니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 이 세계의 절대 다수는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일반인이니까 말이야. "
그리고 그 절대 다수에 나는 포함이 안되고 말이지. 이어지려는 말을 속으로 삼켜낸 그는 잠깐 쓴웃음을 지었지만 빠르게 옅은 미소로 바뀌었다. 물론 미사키도 그렇고 리즈도 그렇고 엘부르즈에는 특별한 학생들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녀의 조심하란 말이 틀리진 않지만 ... 그 극소수의 사람들 중에서 그에게 적대감을 가질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조금 마음을 놓고 사는 것도 있었다.
" 맘만 먹으면 바깥에 나가지 않아도 괜찮은 세상이긴 하지만 말이야 ... 가끔은 상쾌한 공기를 맡으면서 생각없이 걸어다니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거든. "
강민의 말에도 리젤로테는 나갈 생각이 없어보였기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 이상 말해봤자 서로의 의견은 평행선만 달릴 것이 뻔했기에 설득은 그만두려고 했지만, 이어진 그녀의 말에 그는 잠깐 멈칫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가깝게 다가가서 다시 앉고선 작게 속삭였다.
" 리즈는 어때? 리즈만 좋다면 나는 괜찮은데, 데이트. "
장난스런 표정이 가득했지만 어쩐지 싱글벙글한 웃음이 조금은 기대를 품고 있는듯 했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어디까지나 리즈를 밖으로 데려갈 수 있지 않을까에 대한 것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바로 그런 생각들이 안일하다고 나는 말하고 있는 거야. 비일상에 사는 자가 일상이 있는 쪽을 바라봐도 의미 없어. '그림의 떡'이라는 말을 알고 있으려나? 자네가 말하는 평범한 삶이, 우리에게는 마치 그것과 같지. 실체인 것 같아 뻗어보면 가짜이고, 선뜻 배푼 믿음에 멋대로 배신 당하고는 해. 비일상에 산다는 건 그런 거야 강민군. 가령 지금의 내가 학생을 연기하고 있어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말이지. 그러니 학생의 본분 따위같은 것도 사실은 전부 의미 없다는 이야기... ...잠, 거리 가깝잖아...! 그렇게 불쑥 다가오지 말아주겠어?"
책장을 넘기며 기세양양하게 말하는 마녀도 멋대로 자리를 바꿔 가깝게 앉아오면 별 수 없다. 페이지에 고정시켰던 눈이 강민에게로 향하고, 뒤로 내뺀 얼굴에는 당황하는 빛이 감돈다. 또, 한껏 찌푸린 눈썹에 모진 목소리... 그리고 갑작스러운 어프로치에 놀란 걸까? 조금이었지만 붉게 상기된 얼굴. 무섭다 무서워.
"흥... 사람이 말하는 중인데 바보같은 얼굴이나 하고 있기는...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떨어져. 자네 때문에 책이 안 읽힌단 말이야... 정말."
그러더니 손에 들려있던 두꺼운 책으로 강민의 얼굴을 자신의 거리에서 밀어내려고 한다. 꾹꾹 눌러서 밀어낸다. 평소의 실없는 장난같은 거라고 생각했건만,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웃는 얼굴을 모질게 내칠 수는 없었던 건지. 체념한 듯 말하는 마녀는 '하아' 한숨 쉬고는 말한다.
"...좋아. 어울려줄게, 데이트. 한 낮에 바깥에 나가는 것 따위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 걸."
마침내 승낙이 떨어졌다! 한껏 부풀어 있던 강민의 기대가 닿았던 것일까? 하지만 안심은 아직 이르다고 말하는 것처럼, 천천히 펴올린 손가락 한쪽을 곧 강민의 입가에 닿게 하고서는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었다.
" 그럼 리즈랑 나는 똑같이 비일상의 선상에 서있으니 서로가 그림의 떡이 아니라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다는거네? "
그녀의 말대로 그와 대척점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일반인들에게 보여지는 것은 하등 상관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와 비슷한 사람들을 경계해야하는 것이지. 하지만 강민은 어느쪽도 경계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사실 그가 지금 어떠한 생각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그를 어릴적부터 세뇌하다싶이 교육해온 유파 마저도.
" 그야 리즈가 잔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이제 그런 얘기는 너무 많이 들어서 지긋지긋해. "
리젤로테가 책으로 자신의 얼굴을 밀어내자 강민은 순순히 조금 멀어져주었다. 하지만 리즈의 당황스러운 얼굴을 봤으니 이번에도 꽤나 만족스러웠다고 생각하면서 아까처럼 다시 등받이에 팔을 올리고선 쭈욱 기대 앉으며 말했다.
"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데 앞뒤로 사족이 너무 붙는거 아니야? "
드디어 리즈에게서 약속을 받아내자 그는 싱글벙글하며 말했다. 정말 리즈를 이 어두컴컴한 동아리 부실에서 빼내는 것이 목적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지는 그만이 아는 것이겠지만 일단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이어진 리젤로테의 말에 그는 말해보라는듯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