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에 이마를 박은 그녀에게 들려온 건 참 현실적인 그런 얘기들이다. 표현이 어색하고 어려운 건 알겠지만 이런 때까지 현실의 얘기를 해야 하냐구. 물론 그런 점도 어쩔 수 없이 좋아해버리는 그녀도 그녀였지만. 아무튼 그녀만큼 동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아스텔 덕분에 그녀도 금방 진정할 수 있었다. 그래도 부끄러우니까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그가 들어달라 말 해야 슬그머니 얼굴을 드러내었을 것이다.
"...바보. 역시 바보야. 너."
그의 말을 이해는 하지만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들어서, 그녀는 다시금 그를 향해 바보라며 투덜댔다. 밉거나 싫은 내색보다는 부끄러움의 연장선 같은 느낌으로. 구부정하게 숙였던 몸을 바로앉아서 테이블에 살짝 기대곤 잔에 남은 얼음물을 마신다. 차가운 물을 삼키는 것으로 조금은 얼굴의 열이 식기를 바라며, 양 손으로 잔을 잡고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당장에 보이지 않는 미래를 약속하자는게 아니야. 나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밤조차 불확실한 건 잘 알고 있다구. 그런 무리한 걸 바라는게 아니니까. 네 말대로 지금은 그렇게 하고. 나중의 여행도 같이 가. 어차피 너도 여행 갈 거 였잖아. 그거 시작부터 같이 하기로 하는 거지 뭐."
그러는 걸로 좋아. 지금은. 종알종알 말을 늘어놓고 잔을 탁 내려놓는다. 그리고 숨을 천천히 들이쉬더니 으하-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모든 걸 내려놓은 듯이 날숨을 뱉었다. 이거 현실이지. 현실 맞지? 그녀의 손이 스윽 움직이더니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 음. 확실히 아프다. 꿈이 아니네. 다시 천천히 손을 내린 레레시아는 조금은 처음과 같은 태도로 테이블에 기대어 아스텔을 빤히 응시했다.
"미래는 아직 몰라도 지금은 확실히 옆에 있어줘야 해. 임무 아닐 때는 말야. 나도 임무 중에는 임무에 집중할 거야. 아닐 때는, 가능한 신경 써 줘. 그냥 뭐 하냐고 인사만 해줘도 좋으니까."
아직 서로에 대해 잘 알지도 못 하고, 시기가 시기인만큼 많은 걸 바라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단지 남들보다는, 평소보다는 관심 조금만 더 써달라고 말하고 점원을 부른다. 상황도 기분도 진정되고나니 다시금 술이 당겨와서였다. 아일리시 커피에 휘핑을 뺀 것을 한 잔 주문하고, 아스텔도 뭔가 더 마실건지 묻듯이 바라보았겠지.
"...어디까지나 허락이 떨어지면의 이야기지만. 물론 내가 아는 대장은 편한대로 하라고 하겠지만."
지금이야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힘이 필요한 시기이나 모든 것이 다 끝난 후에는 적어도 지금보다는 자유로운 나날이 보장될 것이라고 아스텔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로벨리아가 지금의 세상을 얼마나 바꾸고 싶어하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자신만이 아니라 에스티아 역시도. 그 사람은 절대로 입으로만 이 세상을 바꾸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싶었기에 하는 말인 것을 알기에 모든 것이 끝나면 그땐 레레시아와 여행을 같이 가는 것도 가능하리라 그는 믿었다. 그렇기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렇게 술 먹으러 왔잖아? ...있어줄거야. ...그러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임무가 없을 때는 일단 널 우선시할테니까."
물론 그렇다고 24시간 붙어다닐 순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은 자신대로, 그녀는 그녀대로 각자의 생활이 있고 인간관계가 있고 스케쥴이 있었으니까. 지금은 일단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는 기분이 좋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이내 그는 그녀가 주문을 하자 자신도 같은 것을 먹겠다면서 주문했다. 그녀가 먹는 것은 어떤 맛일지 궁금한 탓이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기호를 알고 싶다는 것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음. ...사귀는 거지? ...뭘 가장 하고 싶어? 아. 돌아가는 길은 올 때 대충 외웠으니까.. 그러니까..."
이어 그는 잠시 말을 망설이다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시선을 오른쪽으로 살짝 돌렸다. 이어 그는 제 뺨을 오른손으로 살살 긁적이다가 아래로 내리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분명하게 했다.
"음주 비행...같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날아서 돌아가자. ...데려다줄테니까. 그러니까... 그러면 돌아갈 때 아무에게도 안 보이는 상태에서 붙어서 갈 수 있으니까. ...그 안겨서 가도 상관없고. 안 떨어뜨리니까."
이전에도 한 번 한 적이 있었지만 역시 그런 말들이 오가서 그런 것일까. 조금은 부끄러워하는 감정이 그의 목소리에 녹아내렸다. 이내 그는 침을 꿀꺽 한 번 삼킨 후, 그녀에게 다시 이야기했다.
"...딱히 이거 비밀로 안해도 나는 상관없어. 오히려 비밀로 해야 할 이유를 난 모르겠으니까. ...물론 네가 비밀로 하고 싶다면 상관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