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무장을 다 만들어야 한다면 그 정도는 걸리겠지만 이 에스티아 님의 손에 들어오면 고작 그거 하나 정도야 뭐."
스스로가 생각해도 참 자랑스러운지 그녀는 뿌듯한 듯, 엣헴. 하는 느낌으로 포즈를 취하면서 이야기했다. 하지만 스스로 취한 그 행동이 조금 무안하긴 했는지 그녀는 쿡쿡 웃으면서 바로 포즈를 풀었고 자신의 왼손을 올린 후, 엄지와 검지, 그리고 중지를 살며시 붙인 후 엄지를 빠르게 움직이며 탁 소리를 냈다. 이내 저 편에 놓여있던 기기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세븐스 컨트롤러였다. 바로 아래에 있는 커다란 종이 아래에 레이저를 이용해 도면을 그리는 그 기기를 바라보던 에스티아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무엇보다 이 능력. 컨트롤러를 이용하면 굳이 내가 앞에 서지 않아도 내 머리만으로 기기를 조종할 수 있기 때문에 여러 움직임을 동시에 취할 수 있거든. 물론 정밀하게 하려면 조금 집중을 해야하지만 대충 머릿속에 있는 구도를 설계도로 그리는 것 정도야 뭐. 훨씬 좋고 가벼운 것으로 만들어줄게. 기대해도 좋아. 아니. 기대해줘."
자신에게 기대를 하는 것을 은근히 기대하며 그렇게 이야기하던 에스티아는 작게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그리고 잠시 다른 곳을 바라보다가 근처에 있던 미니 냉장고로 향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닥터 페퍼를 꺼내서 내밀었다.
"마실래?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맨 손으로 보내긴 좀 그래서 뭐라도 줄까 했는데 당장을 내줄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어서. 아무튼 잘 싸울 수 있겠어? 앞으로의 전투. 어쩌면 경우에 따라서는 보검을 쓰는 가디언즈의 세븐스와도 충돌을 또 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상대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인간의 형태로 돌아와 자신의 뺨을 만지려고 하자 로벨리아는 오른손을 들어올려 뭔가를 제지하는 행동을 취했다. 허나 상대에게 보내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어딘가에 숨어있을 아스텔에게 행한 것이 아니었을까. 적어도 상대가 자신을 만지려고 해도 그녀는 딱히 거부반응을 보이거나 하진 않았을 것이다. 물론 무례한 곳에 닿으려고 하지 않는한.
"유감스럽게도 난 상대를 단순히 첫인상만으로 믿진 않아. 단순히 이럴 것 같다. 저럴 것 같다는 결국 빗나갈 때가 많아서 말이야. 용기있는 척 나서나 결국 전장에 가면 도망치는 이들이 있고, 의외로 겁이 많아보이지만 누구보다 잘 임무를 수행하는 이들도 있지. 네가 스스로 말하는 군주인지, 아니면 그저 입만 산 도마뱀인지는 앞으로 지켜봐야 알 수 있겠지."
말 그대로 지금의 그 모습으로 판단을 하지 않겠다는 발언이었다. 즉 로벨리아는 아직 상대를 온전히 믿는 것은 아니었다. 허나 경계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레지스탕스를 이끌면서 입만 번지르르 한 이들은 수도 없이 봤고 결국 도망치거나 목숨을 잃는 이들도 여럿 봤기에 더더욱.
"허나 갖고 싶은 것은 가져야지. 그게 넘봐서는 안될 것이 아니라 부당하게 뺏기고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했던 것이라고 하면 더더욱. 모두에게 기본적으로 주어져야 했던 당연한 것이라고 한다면 다시 되찾아야 하는 법이야."
세븐스의 자유와 권리. 원래는 모두에게 주어져야 했던 것이었으나 '누군가'의 어리석은 말 한마디를 시작으로 뺏겨야만 했던 것. 로벨리아는 절로 쓴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나도 약속하지. 붉은 저항의 에델바이스는 반드시 그 모든 것을 모두에게, 그리고 너에게도 돌려주겠다고. 도망치거나 쫓기거나 숨어서 살아야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다른 이들과 어울려서 함께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허나..."
한가지 마음에 걸린다는 듯, 그녀는 가만히 자신의 턱을 만졌다. 그리고 피식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우리도 일단은 거점을 숨기고 있는 레지스탕스야. 바로 우리의 거점으로 들여보낼 순 없고 며칠 정도 그쪽의 안전 여부를 조사해보도록 하겠어. 그쪽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야. 네 의도와는 상관없이 너를 이용하려고 하는 쥐새끼들이 있을 수 있으니 말이야. 쥐가 한 마리 들어와버리면 순식간에 엉망이 되기 마련이거든."
대신 그 기간동안 있을 수 있는 장소와 식품과 물 정도는 제공하도록 하지. 그렇게 다른 이들에게도 했을 조건을 내걸면서 로벨리아는 어쩔 것이냐는 듯이 상대를 바라봤다.
세븐스를 이용해 설계를 하는 모습을 잠깐 바라봤다. 확실히 편리한 능력이군. 어쩌면, 나는 내 세븐스에 대해 다른 이들에 비해 열등감을 가진걸수도 있겠다. 나쁜 능력은 아니다. 자부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의 부담은 여전히 내 발목을 잡는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할 때 마다, 내 몸이 죽어간다는 것도 느낄 수 있다.
"손 하나 움직이지 않고 머리 속에 있는걸 정확하게 현실로 끄집어 낼 수 있다, 라... 결과물이 기대되는데."
에스티아가 건네 준 음료수를 감사, 하고 인사하며 받아들었다. 마침 목을 좀 축이고 싶었던 와중인데, 잘 됐군. 이어지는 말은 내 각오에 대한 것이었다. 앞으로 잘 싸울 수 있겠느냐는 말...
"잘 싸울 수 없을지도 몰라. 다음 임무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고. 그래도 싸워야 해. 싸워서 이기면 살고, 지면 죽고. 그게 다야."
자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그냥 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기다리는 건 죽음 뿐이다. 도망칠 여유따윈 없다. 임무라는게, 다 그렇지.
"싸우긴 하겠지만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현실적인 대답이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답은 아니야."
물론 그가 자신의 마음에 맞는 답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마치 죽어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냐..라고 하는 것 같았기에. 자신의 생명의 무게를 그다지 높게 보지 않는 것 같았기에. 오지랖은 좋지 않았기에 그녀는 입술을 살짝 우물거리면서 뭔가 말을 할까 하다가 굳이 더 말을 하진 않았다.
이어 그녀는 다른 닥터 페퍼를 꺼낸 후에 캔을 따고 그 음료수를 천천히 마셨다. 톡 쏘는 탄산 맛이 상쾌한지 그녀는 기분 좋게 웃었다. 달콤한 것도 적당하고. 물론 너무 많이 먹으면 안되긴 하지만. 나중에 신체 검사기나 돌려볼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녀는 근처에 있는 자신의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라면 싸워서 이기면 살고, 지면 진흙탕을 굴러서라도 도망쳐서 살아남을거야.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난 졌다고 죽고 싶진 않으니까. 비겁이고 뭐고 죽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잖아. 그리고 언니도 그걸 바랄거고."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으나 그녀는 레이먼드에게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죽지 말고 진흙탕을 굴러서라도 살아남으라고. 그건 마냥 비겁한 것은 아니라고. 물론 레이먼드가 어떻게 들을진 자신도 알 길이 없었지만.
"딱히 우리 레지스탕스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임무를 달성해라..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는걸."
자신도 벽에 기댄 채 잠깐 캔을 손에 들고 있다가, 그것을 따고서 한 모금 마셨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라는 말은 물론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레지스탕스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뭉친 조직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래. 오히려 임무의 실패가 죽음으로 직결된다는 것은...
"너무 오랜 시간을, 그리고 너무 많은 임무를 '다른 곳'에서 수행해서 이런 생각이 머리에 박힌걸지도 모르지."
톡 쏘는 탄산도, 이가 썩어버릴 듯 단 맛의 사치도 한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지. 제대로 날 인간으로써 대우해 준 것은, 나의 목숨을 필요로 한 이들 뿐이었다.
"물론 가능하면 살아돌아올거야. 그게 내 멋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는 게 뭐람. 하고 덧붙인 뒤에, 단숨에 음료를 쭉 들이켜 빈 캔을 거진 골프공 정도 크기의 알루미늄 덩어리로 압축시켜버렸다. 캔을 쓰레기통에 휙 던져서 버리고서는 다시 문을 열었다.
"언제까지 과거에만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살아서 내일을 살 생각 정도는 하고 있어. 어쨌든, 부탁한 물건은 잘 부탁할게. 음료수도 잘 마셨고."
등을 돌린 채 손만 들어 인사한 뒤에, 문 밖으로 향했다. 그녀의 생각은 충분히 알았다. 그렇기에, 다른 부탁 하나는 어차피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주머니에 꽂아넣은 한쪽 손에 쥐어진 쪽지를 꽉 쥐어 구겨버렸다. 쪽지엔 '자폭용 폭발물'이라 적혀 있었다.
그녀는 앞을 향해 직진하고, 당신은 그런 그녀를 따른다. 그런데 웬걸. 그녀를 따라 걸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거점에서는 멀어지고 있는 방향이다. 어느덧 마을에서 들려오던 소음들도 바람 소리에 거진 묻히기 시작했을 쯤인지 모른다. 그녀는 그런 외진 곳 안에서 어느정도 도달했을 즈음,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당신을 바라본다. 이번엔 손을 내밀며 말하는 것이다.
"엔의 손을 잡아라."
산책을 하는데 굳이 손을 잡을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의 그녀는 당신이 그렇게 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것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곳까지 온 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검고 붉은 눈과는 다르게 새하얗게만 보이는 손이다. 그러나 그 안에 무엇이 고동치고 있는지는 당신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