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 안에 있는 에스티아는 잠시 앉아서 혼자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었다. 정확히는 USB의 내용을 확인한 후로는 그런 날이 많았다. 그 장소는 자신에게 있어서도 나름 의미가 있는 장소였다. 물론 좋은 의미가 아니라 최악의 의미로써. 허나 그 사실을 굳이 지금 당장 공표할 생각은 없었기에 그녀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무튼 조만간에 그곳으로 작전을 나가게 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목소리. 레이먼드였다. 무슨 일로? 그렇게 생각을 하며 에스티아는 자리에서 일어선 후, 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열면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
자연히 에스티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찌그러져있는 무언가였다. 줄과 끈을 매어서 만든 그 무언가는 적어도 에스티아의 눈으로는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두 눈을 멀뚱멀뚱 깜빡이던 에스티아는 레이먼드를 바라보면서 다시 입을 열어 이야기했다.
"그 쓰레기는 뭐야? 아. 혹시 뭐 만드는데 쓰라고 재료로 가지고 온 거야? 음. 어느 정도는 재료로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과연 강도라던가 괜찮을까? 찌그러진 것을 보면 그다지 센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에스티아는 괜히 고개를 갸웃했다.
호수를 등지자 흰 비늘이 햇빛에 반사된 물 때문인지 반짝인다. 피식 웃는 모습 뒤로 초면이지 않냐는 지적에 눈을 좁힐 적, 반짝이는 면적이 조금 더 넓어진다. 제는 가볍게 그르륵대며 고개를 털었다. 당신의 모습에 잠시 의심을 했으나 금세 거둔 모양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가짜라면 죽여버리면 되는 일이지 않은가. 그리고 진짜에겐 기다리게 한 값을 톡톡히 치르게 하는 수밖에. 시체를 던져주면 알아서 미안해라도 하겠지. 괜찮은 방법이다.
"붉은 여자를 만나라 했기에 확인하고자 했네만.. 이 방법은 아니었나 보군 그래."
짧았던 언사에 대한 이유를 댄 뒤로 제는 가만히 여성을 훑듯 쳐다봤다. 예민한 코가 한 명의 사람을 더 느꼈으나 지금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소개라." 짧은 되물음을 뒤로 제는 느긋하게 몸을 움직였다.
"여에 대해 소개해 보라 하나 자네가 바라는 방식의 소개는 어려웁네만.. 여가 안식의 황제, 영원한 밤을 호령하는 신수. 그렇게 불리긴 했다마는 그것이 자네가 바라는 답이 아닌 것 같으니 말입세."
앞발을 내디뎌 미끄러지듯 당신의 앞에 섰다. 크기가 조금 작아진 느낌이다.
"하여 지금부터 제帝라고 불러주면 좋겠네만.. 보다시피 인간이 아닌 모습이나 인간의 모습으로도 변할 수 있네. 다만 내 지금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지라 양해해 주면 참 좋겠어."
이걸 보여주면 된다던데. 라고 덧붙인 제는 이내 툭, 하고 코로 당신의 팔 한 쪽을 두어 번 건드려보려 하더니 주둥이를 벌린다. 다행스럽게도 잇새에 물어 젖지 않은 무언가를 손바닥 위에 내려주기 위함이었다. 붉은 에델바이스를 상징화한 배지 하나.
줄을 다시 크랭크로 감아넣고, 끈을 이용해 왼쪽 팔에 매어둔다. 고물의 찌그러진 부분을 툭툭 치고선 밸브를 돌려서 열자 기체가 새 나오는 소리가 잠깐 들린다. 이제 왼팔을 들어 연구실의 한쪽, 비어있는 벽에 향한 다음엔 다 녹슨 오토바이 브레이크를 방아쇠 삼아 달아놓은 것을 누른다.
가스가 퍽 하는 소리를 내며 발사되고, 그 힘으로 줄의 끝 부분이 벽을 향해 날아간다.
"대충 어떤 물건이냐면, 새롭게 달고 싶은 장비의... 시제품이라기보단 컨셉 참고용 목업 같은거랄까. 이 줄 끝에 갈고리를 달아서, 와이어처럼 쓰려고."
크랭크를 다시 손으로 감아서 줄을 되감지만 가끔씩 턱턱 걸리는 등 난황을 겪자, 난처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붙잡으려고 하는 이일지도 모를 일이었기에 로벨리아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 모습은 보이지 않겠지만 어딘가에 아스텔이 숨어있을테고, 만일의 경우에는 움직일테니 그녀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안심할 수 있었다. 물론 상대가 자신이 모르는 보검을 사용하는 세븐스 중 하나라고 한다면 조금 힘들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제라고 불러달라고 하는 그 말에 로벨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본명이라기보단 자신이 따로 칭하는 호칭 같지만 사실 본명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내 붉은 에델바이스를 상징화한 뱃지를 받아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머리의 여성이 자신이냐는 물음에 이어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붉은 저항의 에델바이스를 이끌고 있는 대장인 로벨리아 올리에트. 로벨리아라건, 올리에트건 편하게 부르도록 해. 그건 그렇다고 쳐도 설마 부탁으로 만나게 된 이가 이런 이일 줄이야. 변신형 세븐스인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은 즉, 저 자의 세븐스는 변신형 세븐스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로벨리아는 이어서 말을 이었다.
"내가 부탁받은 것은 세븐스 하나를 탈출시킬테니 받아달라는 것이었다만. 너는 어쩌고 싶지? 아니. 애초에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를 들은 바가 있나?"
일단 상대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서 로벨리아는 굳이 붉은 저항의 에델바이스에 대한 깊은 설명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부탁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무조건적으로 저 자를 동료로 받아줄 순 없는 일이었다. 일단 여러모로 이야기를 나눠볼 필요가 있었으니까.
대체 왜 그랬냐는 의미가 담겨있는 에스티아의 눈빛이 레이먼드에게 향했다. 고철을 주워서 만들다니. 당장 여기로 오면 자신이 이것저것 만들어서 제공해줄 수 있는데. 자신의 실력이 못미더워서 그런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나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며 에스티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보아하니 와이어 같은 것을 만들고 싶은 것일까.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 여기서 뚝딱 만들어내라고 한다면 그건 무리였지만.
"정확한 용도가 어떻게 되는 거야? 와이어처럼 걸어서 이동하고 싶은 그런 거야? 아니면 적을 붙잡고 싶은거야? 갈고리를 단다고 해도 그 용도가 다 다르잖아."
벽에 걸쳐서 이동을 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적의 무장을 뺏거나 하기 위해서 붙잡으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둘 다 하고 싶은 것인지. 그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면서 에스티아는 가만히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온 물건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손을 휘저었다.
"아예 처음부터 새롭게 만드는 것이 나을 것 같아. 그것을 재활용한다기보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좀 더 가볍고 단단한 소재를 쓰면 무게도 훨씬 많이 줄어들테니까. 당장 만들어내라는 조금 힘들고... 며칠은 걸리겠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면?"
즉, 시간을 달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의 세븐스가 기계를 만들어내는 세븐스는 아닌 것을. 그렇기에 제작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아. 보상은 필요없어. 나는 물건 만드는 것을 좋아하니까 그것으로도 충분히 보상이야! 대충... 3일 정도는 걸릴 것 같아."
피크닉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갤 끄덕이던 네 말에 그녀가 뺨을 붉히며 부끄러워하자 뭔가 부끄러울 만한 말을 했는지 네가 했던 말을 곱씹어 본다. 으음...
"하하... 부끄러워하시라고 말을 한 건 아니긴 하지만요. 기분이 좋다니 다행입니다."
수치심보다는 칭첸을 듣고 느끼는 일종의 쑥스러움이겠지. 앞으로도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말에는 저도 마찬가지에요. 라고 대답해 준 이후에는 소소한 대화가 오갔다. 오가는 대화 중 틈틈히 음료와 크로플을 먹어가니 벌써 탁자는 깨끗해져 간다. 기쁜 듯이 웃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너 역시 살짝 미소를 지은 채로 간단한 시간을 끝마친다.
"즐거웠습니다 타루 양. 그러면 일주일 뒤에 피크닉 준비를 하고 다시 만나요."
아, 그 전에 마주치게 될 수도 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약속은 지키겠다며 덧붙인다. 계산을 마치고 나와, 그렇게 약속을 마지막으로 아마 헤어지지 않았으려나.
당신이 나오자 계단에 앉아있던 그녀가 고개를 치켜들면서 아는 척을 한다. 보아하니 신발을 고쳐신고 있는 중이었던 것 같다. 대원을 호칭하며 반응하는 건 그녀만의 인사 대신이자 반가움의 표시였다. 아니나 다를까, 곧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당신 앞으로 졸졸 다가가 당신을 올려다 보는 것이었다.
"아니다. 엔은 방금 식사를 마쳤다. 그래서 이제 바깥으로 나오게 한 거다."
그녀라고 항상 먹고만 있는 것은 아닐테니. 오히려 그녀가 바깥에 나와있는 경우는 '식사'를 마친 후 밖에는 없었다. 다만 '포식'이나 '사냥'은 또 다른 경우다. 하지만 그걸 뭐라고 하더라- 그녀는 조금 고민하다가 지금을 포괄하는 단어가 생각났는지 "산책이다." 하며 말을 덧붙였다.
그럼 이대로 자리를 떠도 되겠지만, 왜인지 그녀는 당신을 빤히 바라보며 서있었다. 그러더니 문득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럼 이것보다 제트 분사기를 따로 장착하는 것이 좋을텐데. 그래도 이게 좋다면 알았어."
한번 제대로 만들어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에스티아는 일단 근처에 있던 노트에 쓰여있는 할 일 리스트에 한 줄을 더 추가했다. 이것저것 많이 쓰여있는 것으로 보아 뭔가 하는 것은 꽤 이것저것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레이먼드의 의뢰를 해결할 정도의 여유는 있는 모양이었지만. 아무튼 레이먼드의 추가적인 부탁에 에스티아는 가만히 그가 가지고 온 것을 바라봤다. 이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팔이 무거운 것은 와이어 때문이 아니라 무거운 재료를 써서 그런 거야. 고철을 주워서 써서 만들었다면 안 무거운 것이 이상하잖아. 요즘은 신소재를 쓰지. 고철을 쓰진 않아."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일단 참고하겠다고 그녀는 이야기했다. 다만 굳이 등쪽까지 확장을 시킬 필요가 있을까? 라는 의문은 있었다. 그래도 그런 컨셉을 원한다면 어느 정도 만들어줄 수 있었다.
"그건 그렇다고 쳐도 보검의 무장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추가적인 무장을 달 생각이야? 물론 그건 개개인의 자유지만 말이야. 아무튼 오케이. 일단 기동성이 좋게 만들어주면 되는 거지?"
혹은 더 부탁할 것이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하려고 하면서 에스티아는 웃으면서 두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에게 맡겨만 달라는 듯이.
2년 전. 어느 도시의 빈민가로부터 갓 스물 된 여자 쌍둥이가 탈출하던 중, 때마침 근방에 파견되었던 에델바이스 대원에게 구조되었다.
당시 한 명은 전신 곳곳, 특히 옆구리에 심한 부상을 입어 간신히 숨만 붙어 있었고 다른 한 명은 피투성이였으나 부상이 일절 없었다. 마주쳤을 땐 심히 두려움을 드러내며 경계했으나, 가디언즈가 아닌 레지스탕스라는 것을 알자 태도가 돌변하여 그녀들의 구조를 희망했다. 이후 부상을 입은 쪽은 시급히 치료에 들어갔으며 몸은 멀쩡하지만 정신이 없어 횡설수설하는 쪽에게 들은 얘기로는, 자신들은 근처의 빈민가에서 살았고 몇시간 전 억울하게 누명을 쓴 그녀들의 어머니가 자신을 희생하여 둘만 겨우 도망쳤다는 내용이었다. 혹여 생존했을 어머니의 구출을 희망하는가 물었지만 그녀는 눈물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이미 그녀들을 대신해 다수의 총탄을 맞았으며 건물에서 벗어나자마자 폭발이 일어나 무너지고 있었으니 괜한 희망은 갖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 뒤엔 그녀에게도 휴식을 권했으나 부상 당한 쪽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사흘 후. 사경을 헤매던 쪽이 정신을 차렸다. 다시 사흘 정도 시간을 들여 회복이 이루어진 후, 두 사람에게 안전한 마을로 갈 것인지를 물었으나 거절하고 에델바이스에 합류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둘 모두의 적극적인 의사표명이었다- 라기보단 부상이 없었던 쪽의 일방적 의사인듯 했으나, 양쪽 모두 직접 말한 것은 사실이므로 이후 보고를 통해 두 사람은 에델바이스에 입단하게 되었다.
숨이 넘을락말락 했던 부상의 여파인지는 알 수 없으나. 노란 눈을 가진 쪽은 입단 후에도 한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였다. 배정 받은 개인실에서 종종 비명소리가 나거나 벽에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고 한다. 기초 훈련을 받으러 나왔다가 쓰러지거나 그 자리에서 구토를 하는 일도 있었다. 이 기간은 대략 1개월 가량이었다. 그동안 다른 한 쪽이 극진한 보살핌으로 돌본 결과, 그 뒤로는 서서히 나아져 어떤 증상도 다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간은 자폐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 몇몇 대원들 사이에선 저러다 다시 그러는거 아니냐, 내보내야 하지 않냐는 말이 돌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