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정확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마을에 있는 것들은 자율에 맡긴다고 했고 그 이외의 부분에 대해서는 전 자율로 생각하라고 한 적은 없어요. (시선회피) 그냥 마을 안의 시설들을 자율로 하라고 했었지요. 세븐스의 차별은 정말 극단적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민족말살정치를 당한 민족들을 떠올려보면 좋을 것 같네요. 그 어떤 자유도 없고, 모든 것을 빼앗기고, 그러고도 탄압당하고, 저항하거나 도우면 바로 죽을 수도 있고..
그냥 말 그대로 세븐스에게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아요. 그 어떤 것도. 그렇기에 레지스탕스가 생긴거고요.
따뜻하다. 손길은 장갑 너머로도 부드럽다. 이스마엘은 이런 사람에게도 어떠한 과거가 있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섣불리 묻거나 추측하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 도달한 세븐스가 가진 과거가 어떤 부류인지 이스마엘은 잘 알기 때문이다. 대다수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으니 상처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혹여 그렇지 않다고 한들 여전히 조심스러운 건 마찬가지다. 예상치 모를 역린을 건드릴 수도 있으니.
아, 언니가 나빴다는 건 아닌데! 이스마엘은 잠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가벼이 받아주는 것임을 깨닫곤 입술을 꾹 다문다. 입술의 속살을 자근자근 짓씹는 모습을 보니 멋쩍은 것 같다. 초콜릿의 단 향내가 마음을 진정시켜 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이 놀라고, 많이 안심하고, 많이 풀어지던 탓에 이젠 한 감정에 오래 머물기 위해 무진 노력하기로 했다.
"네, 좋아합니다."
이스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쇼카콜라는 어릴 적 카페인 때문에 먹지 못했지만, 가끔 맛보는 허쉬의 맛은 끝내줬다. 마시멜로 시리얼을 사주기도 했지만 허쉬의 묵직한 단내만큼 깊진 못 했던 것 같다. 그 이후로도 초콜릿은 먹고 싶었지만 이가 썩는단 이유로 성인이 되어서도 잘 먹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기 때문인지 초콜릿 상자는 매력적이다 못해 사랑스럽게 보인다. 매력적인 초콜릿의 윤기, 좋은 냄새, 거기다 하루에 하나씩 먹는다 해도 나누어 먹으면 열흘, 혼자 먹으면 스무 일은 족히 먹을 수 있는 양. 카카오는 신의 열매라고 하더니, 그 이름이 왜 붙었는지 알 것만 같다.
검은 장갑 대신 하얀 손이 보인다. 머뭇거리는 모습에 이스마엘은 당신의 능력을 떠올렸으나, 모른 척하듯 초콜릿에 집중했다. 알고 있어도 가끔 유하게 넘어가 주는 것이 좋으니까. 유산지 포장 그대로 들어 올린 초콜릿이 입술 위에 톡 닿는다. 거부감 없이 입을 벌려 입술 사이로 초콜릿을 물었다. 기실 독이 있든 없든 당신이라면 먹었을 테다. 이스마엘은 동료라는 이름이 붙어있으면 칼이라도 기꺼이 찔려주었을 테니. 입술로 문 초콜릿을 천천히 입속으로 굴려 넣자 볼 한구석이 빵빵하게 차오른다. 손등으로 뺨을 스쳤을 적 초콜릿의 윤곽이 느껴질 정도로.
"응……?"
초콜릿이 혀 위에서 눅진하게 녹아간다 쌉싸름하고 적당히 단맛이 혀 위를 오래 맴돌지 않고 깔끔하게 사라진다. 입안에 음식이 있는데 얘기하긴 좀 그랬는지 다물린 입을 우물거리며 대답을 고민한다. 언니라고 부르지 않아도 되냐는 말엔 작은 고민을 가졌다. 누나라 부르는 게 나았을까, 아닌가. 일단 이 상황은 제하고. 동생을 하지 않겠느냐니. 초콜릿이 잇새에서도 부드럽게 씹혀 녹더니 이내 목구멍에 흐르듯 넘어갔다.
"지금은…… 조금."
아직 고민하고 싶었던 것 같다. 화이트 초콜릿과 붉은 시럽이 장식된 초콜릿. 이스마엘은 머뭇거리다 수줍게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우물쭈물 거리는 모습 사이로 눈이 또 구석을 향해 도르르 굴러간다. "말씀은 정말 고맙지만, 아직 많이 부끄럽습니다." 누군가의 가족이 되는 행위 같기도 했다. 두 사람의 사이에 낀다면 행복하겠지만, 그건 목표를 이루고 난 뒤여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스마엘은 목표를 향해 올곧은 눈을 가지고 있었기에.
세븐스와 비능력자를 떠나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은 대로 행하는 법이다. 지극히 일부의 타고난 성질과 성향을 제외하고- 사람이란 여백이 많은 캔버스와 같아서, 세상을 인지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모든 감각이 정지할 때까지 주변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것으로 스스로를 표현한다. 누군가에게 희노애락과 가치관과 생각하는 법을 배우며 다른 누군가에게 다시 그것을 가르쳐준다. 가르치는, 표현하는 방법에 차이와 옳고 그름은 있지만. 무릇 사람이라면 그렇게 스스로가 받은 것을 여러 이름의 타자에게 행한다. 자신이 그렇게 대해졌기에.
농의 어조로 그녀가 나빴다 하니 고운 녹색 눈동자가 동그래진다. 하지만 금방 가라앉는다. 입술을 꼭 깨물고 잘근대는 것이 무안하기라도 하나 싶었다. 그 모습을 보며 레레시아의 숨에 웃음기가 섞인다. 무안하다면 더 말을 얹지 않아야겠지. 가만히 바라보다가 초콜릿 좋아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가져오길 잘 했네. 어쩐지 네가 제일 먼저 생각이 나더라니. 그래서 그랬나보다."
네가 좋아할 것 같았으니까. 역시나 지나가듯 중얼거리는 말이지만 거짓이나 농담 같지는 않다. 일단 사실이긴 하니까.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냥 저번처럼 시시콜콜한 대화나 좀 하다가 그녀의 개인실로 돌아갈 줄 알았다. 어떤 의미로는 좋은 선택이었던 걸까.
이스마엘은 그녀가 맨손으로 초콜릿을 집어주었음에도 거부나 다른 행동 없이 받아먹었다. 주저함이 없는 그 모습은 그녀로서는 생소하며 기분이 묘해지게 만든다. 그녀의 세븐스를 모르지 않을 텐데. 순한 눈빛이 잠결에 경계하며 칼을 세우던 아까의 것과 오버랩된다. 천장과 바닥만큼이나 차이 나는 두 눈빛이 어째서인가 하나로 보인다. 그 눈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뺨을 쓸어주자 초콜릿의 볼록한 굴곡이 콕 하고 지나간다.
내 동생 할래. 툭 하니 내놓은 제안에 답이 늦길래 영 내키지 않나 했다. 그런데 표정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고. 그래서 레레시아도 초콜릿을 물고서 기다리자, 수줍게 미소를 짓는 입술에 그새를 못 참고 굴러가는 눈동자가 새삼 귀엽다. 잠시 고민을 한 듯한 이스마엘은 지금은- 이라며, 완만한 거절 혹은 사양의 뜻을 말해온다. 뭐, 한 번 해 본 말이니까. 그녀는 고개 한 번 끄덕이며 말했다.
"네 대답이 그렇다면야. 나중에 생각이 바뀌면 얘기해. 아니면 그냥 적당히 기댈 곳으로 여겨도 되니까."
거창하게 동생이니 뭐니 할 거 없이 그저 동료라는 이름의 의조처로, 의지하는 상대로 써먹어도 된다고. 선뜻 그렇게 얘기해주고 씨익 웃는다. 하얀 손이 또다시 이스마엘의 얼굴을 간질이고 얄미운 목소리가 말한다.
"그럼 지금은 귀-여운 마엘이의 약점 찾기라도 해볼까나. 어디, 간지럼은 잘 참는 편일까?"
저번에 보니까 살짝 약해보이던데- 라며 지난 번 입김이 닿았던 목덜미를 손끝으로 톡톡 건드리거나 도망치지 못 하게 꾹 붙들고 조금 더 장난질을 치며 얼마간의 시간을 더 보냈겠지. 무게 없는 시시콜콜한 대화에 맛있는 초콜릿도 있으니 분명 나쁘지 않은- 좋은 시간이었으리라 생각해본다.
//이케이케 막레 할게~ 와 진짜 오래 돌렸다 ㅋㅋㅋㅋ... 이셔주 바쁜 현생 와중에 답레 다느라 고생했구~~ 후후후 우리 초카와이이한 온나노코 이셔 설정 두둑하게 챙겨갑니다~~
이미 지옥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을 거라는 당신의 가벼운 말이 재밌었는지, 공기 빠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너나, 나나. 이름값 하려는건 비슷하네.” 마찬가지로 흘리듯 하는 말이다. 속삭이듯 무언가 흥얼거리다가도, 그 다음 마디로 넘어가지 않고 끊어버린다.
“감당할 자신 없다니, 나 이외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는 걸까.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한테 죄책감을 느껴줄 정도로 정이 든 걸까.”
살살 웃다가도 들려올 말.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느껴 준다니, 비세븐스가 된것 같아서 기분은 좋네.” 이런 사회에 있어서 세븐스끼리 서로를 헐뜯어도 이상하지 않은 마당에, 동류애를 느끼는것 같은 당신. 소속감이 강한 편일까? 그래서 같은 가축을 죽이는 것에 머뭇거리는가? 의문은 딱히 숨기지 않아,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물론 전부 당신이 진실을 고한다는 전제 하 하는 생각이니, 이 주제를 깊이 파고 들려 하진 않는다.
“좋은 편으로만 생각하다보면 나보다 더 미치광이가 되버릴 거야.”
비아냥거리듯 하는 말은 가볍게도 들린다. “미치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 일생에 한 번은 느껴 봐야지.” 키득이는 척 하다가도 깔끔히 정리된 무표정. 당신의 실 없는 농담에 눈길만 돌려 바라보더니, 다시 하던 일을 한다.
“파이가 맛있으면 차라리 걔가 방에서 키우는 바퀴벌레들에게 줘야지. 걔네들 빈 집 지키느라 고생 많이해.”
정작 폭발 아티스트 그 분 방엔 벌레 안 나오지만, 그는 그저 이름 모를 그분 평판 추락시키는게 재밌나 보다. 당신이 누구 말 하는지 모르는것 같아서 조금 허무해도 괜찮다.
“이기심도 이타심도 결국 비슷한거 아닌가. 같은 단어라고 생각하는데.”
누군가의 내부에서는 늘상 폭발이 일어날듯 한다면, 그의 내부는 이질적인 울림이 들려올 정도로 고요하다. 귀 기울이자면 찢어지게 시끄럽지만, 정신을 다른데 돌려버리면 적막하기 그지없다. 번뇌가 다가오면 그는 그저 그게 비켜가거나 잦아들 때까지 그걸 마주볼 뿐이다. 다 꾸민 파이 위에 시나몬 설탕을 듬뿍 뿌린다.
“...I love you like an alcoholic.” 처음에 허밍하던 가사를 이제야 끝마친다. 내색하는 것은 여전히 별로 없지만, 어째 향수가 어렴품이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그런 특이한 사람이니 말이다.
“조심스럽네. 좀 재미없어.”
자신의 농담을 듣고 잘 모르겠다고 하는 당신의 말을 그저 종교싸움 하기 싫다는 뜻으로 들어버린다. 당신이 천주교 우월주의적 말을 하던 뭘 하던 사실 그는 재밌는 반응 없었을 테다. 무교니까. “왼뺨 맞으면 오른쪽 뺨도 내 준다는 반응들도 그렇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까지. 이상적인 크리스천이야.” 그런 서론을 하고선 뱉는 본론은, 호수 물이나 와인으로 바꿔오라는 종잡을수 없는 그 나름의 유머이다.
“이것도 지옥 가면 못 느낄 감각이네, 그치?”
그런 이상한 농담을 하더니, 예열된 오븐을 열면 후끈한 공기가 밀려나온다. 그는 이게 익숙한 양 소매 부분으로 손을 감싸고선 오븐 랙을 끄집어낸다 (*이러면 안됨, 화상 입는다*). 컵케이크 틀을 오븐에 집어넣고선 당신 몫도 이제 넣으라는 양, 밑 부분의 랙을 맨 손으로 끄집어 낸다. 조금 뜨거운지 (**많이!!!! 뜨겁습니다!!**) 손가락 하나로만 깔짝대듯 꺼내는게 참 미련해 보일지도 모른다. 오븐 장갑 찾는게 그렇게 귀찮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