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마엘에게 있어 오늘은 유달리 피곤한 날이었다. 환절기가 되면 유독 그랬다. 어릴 때도 그랬지만 다 커서도 온도차를 이기지 못하는 것 같다. 씻고 나오니 눈꺼풀이 배로 무거웠다. 평소 같으면 책이라도 읽다 잠들었을 텐데, 지금은 활자는커녕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침대에 누운 이스마엘이 골똘히 무언가 생각하듯 천장을 노려봤다. 뭔가 깜빡한 것 같은데, 뭘 깜빡했더라. 뭐더라……. 무의식 깊은 곳에 끌려가듯 잠에 빠지는 일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뒤로 이스마엘은 깊은 잠에 빠졌다.
이스마엘의 방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노크하지 않고 문을 여는 행동에 인기척이라도 느껴져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다. 당신이 들어온 이스마엘의 방은 지나치게 깔끔하다. 옷은 옷대로 차곡차곡 정리돼 있었고, 책상 위도 필기구의 정렬이 말끔하다. 책상 위에 하나 남아있는 것이라면 오로지 목탄 하나로 전경을 그려놓은 종이 한 장뿐이다. 공터, 당신이 아는 곳이다. 그리고 책상 구석에 뜯지 않은 편지봉투가 여러 장 쌓여있었다. 방의 주인은 없는 건가? 아니다. 빙 둘러보면 침대가 보였고, 그 옆 낡은 상자가 고이 닫혀있는 협탁도 보였을 것이다.
이제 보니 침대 위에 사람의 인영이 보인다. 이스마엘이다. 이불도 덮지 않고 그 위에서 잠든 걸 보니 그럴 겨를도 없이 잠든 것 같다. 깊은 잠에 빠졌는지 숨소리가 고르다. 다가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몰래 놓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석연찮은 점이라면 평소 이스마엘의 주변에 있던 노이즈가 말끔하게 사라져있다는 점이겠다.
이건 당신에게 있어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
// 그래서 기회를 드렸습니다... 나도 날려서 잠깐 당황스러웠다... ;-; 서로 힘내자구...
그녀도 가끔 그런 일이 있었다. 책을 보느라 집중해서. 명상에 깊게 빠져서. 미처 잠그지 않은 문을 라라시아가 열고 들어오는 걸 몰랐던 일이. 그래도 어느 정도 들어오면 눈치 채곤 했으니 아마 이스마엘도 그렇지 않을까 했다. 아니면 안에 없던가. 없으면 없는대로 초콜릿만 두고 나오려고 했는데.
발톱을 한껏 집어넣고 살금살금 걷는 고양이처럼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그리고 살며시 돌아보자, 방 안의 모습이 천천히 지나간다. 전체적인 인상은 청소와 정리가 잘 되어 깔끔한 방이구나, 정도. 일단 들어오고보니 그냥 두고 나가야지 했던 초기의 목적은 조용히 사라지고 조용히 방 안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책상으로 다가가 기웃기웃, 필기구를 건드려보고 목탄 그림도 빤히 본다. 아. 여기 거기네. 머리 잘라준 곳. 그런데 이거 숯인가?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눈을 돌리다가 책상 구석의 뜯지 않은 편지봉투들을 발견한다. 하나도 아닌 여러개가 쌓인게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손을 대진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 양심은 있- 던가? 에이 몰라. 그렇게 책상을 돌아보고 근처에 협탁이 있길래 거기에 초콜릿 상자를 두려다 무심코, 그제야 침대를 보았다. 그리고 혀를 깨물었다.
"!!...!..."
짜릿한 통증에 튀어나올 뻔한 비명을 삼키며 고통을 참는다. 왜냐하면 없는 줄 알았던 이스마엘이 침대에서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몰랐지? 그가 너무 쥐죽은 듯이 자고 있어서 그랬나? 아니. 사람은 자신이 평소에 알던 것과 조금만 달라져도 인식이 달라진다. 지금 침대에서 자고 있는 이스마엘에겐 노이즈가 없었다. 저번에도, 임무 때도, 늘 얼굴과 머리 전반을 가리던 노이즈가 없는 모습이라 아마 인지가 늦었던 것이다. 그건 그렇지만 혀가 아프다. 젠장! 그녀는 잠시 쪼그려 앉아서 혀의 얼얼함이 가실 때까지 잠시간을 견뎠다. 겨우 아픔이 가시자 스윽 일어나 침대로 다가갔다.
자고 있는 그를 보기 전에 먼저 협탁에 초콜릿 상자를 올려놓았는데, 협탁에도 뭔가 있었다. 딱 봐도 낡아보이는 상자다. 상자... 닫혀 있는... 상자... 이런게 보이면 한 번 열어보는게 인지상정- 은 무슨. 레레시아는 당장이라도 뻗어지려는 손을 참고 침대로 몸을 돌렸다. 그냥 누웠다가 깜빡 잠든건지. 피곤해서 미처 이불을 덮지도 못 하고 잠든건지. 고른 숨을 쉬며 자는 이스마엘을 지그시 내려다본다.
머리 하얀 건 저번에 잘라줬으니까 알았지만. 피부, 색이 짙었구나. 음. 얼굴은 선이 가는 편인건가. 자고 있는 모습으로는 인상이나 표정을 알 수 없으니 조금 아쉽달까. 그래서였는지 왜인지, 그녀는 슬그머니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이스마엘의 얼굴로 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자고 있는 그의 볼을 아주, 아주 살짝 건드려보려고 했다. 그러다가 깨면? 그 땐 그 때고.
호흡은 일정하나 그 소리가 크진 않았다. 침대에 누워 골똘히 생각하던 사람의 자세 그대로 미동도 없이 잠들었기 때문인지 그대로 눈을 떠 재잘거려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았다. 당신이 혀를 깨물더라도 그 고통이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몽중 깊은 곳을 헤매고 있었다. 당신이 고통이 가시기까지 기다리는 동안에도 이스마엘은 눈을 뜨지 않았다.
노이즈도, 마스크도 없으니 얼굴이 온전히 드러난 모양새다. 짙은 피부색과 더불어 감긴 눈의 속눈썹은 길다. 모난 곳은 없지만 상처가 좀 있는 편이었다. 가령 뺨은 이제 밴드를 떼고 아물어가는 과정에 있었고, 왼쪽 눈썹을 가로지르는 상처는 빠르게 아물었지만 흉터가 남아있었다. 머리카락은 부채꼴로 길게 퍼져 있었기에 목에 남아있는 희미한 흉터도 볼 수 있었다. 목에서 시작해 옷에 가려졌지만 분명 가슴팍까지 이어질 것이 분명한 흉터까지.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표정을 보니
그렇게 관찰만 하면 좋을 텐데도. 사람은 지금까지 잘 해왔음에도 작은 실수를 벌이곤 한다.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당신이 그 상황이다.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을 적 희미하게 느껴지는 진동, 그리고 뺨에 닿는 촉감까지. 이스마엘은 잠을 자면 깊게 잠들었지만 작은 충격이나 소리에도 기민하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뺨에 손가락이 닿자 이스마엘은 눈을 번쩍 떴다. 눈을 굴리지도 못하고 자신에 뺨에 닿는 손을 우악스러운 손길로 꽉 붙잡으려 하며, 다른 손으로는 잽싸게 베개 밑에 있던 어떠한 안전장치도 없는 택티컬 나이프 하나를 손에 쥐었다.
"누구야, 어디에서 왔지?"
당신이 반항하지 않는 이상 누워있던 자신과 당신, 그 위치를 뒤바꾸려 한 뒤, 당신 위에 올라타듯 하며 목에 칼날을 들이밀려 했을 것이다. 가뜩이나 흉흉하던 눈빛은 잠결에 초점이 맞지 못했으나 어둠 속에서도 번들거렸고, 머리카락은 숙인 고개에 맞춰 우수수 쏟아졌다. 이스마엘의 목에 걸려있던 은색 줄이 덜렁거리며 쏟아졌다. "대답해." 아직 꿈에서 벗어나지 못해 당신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는지 이스마엘이 숨을 한 번 씨근덕댔다.
보는 걸로만 만족하고 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앉아서 얼굴에 손을 댄 걸까. 찬찬히 들여다 본 이스마엘의 얼굴이 그리 편하게 자는 것 같진 않아서? 혹은 자잘히 상처와 흉터가 보여서일까. 눈썹을 가로지르는 흉터나 목에서 가려진 옷 아래로 이어지는 오래되어 보이는 흉터도 그렇지만, 최근에 생긴 걸로 보이는 뺨의 상처가 가장 눈에 밟혔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뺨을 건드린 손은 아마도.
"오."
그녀의 손이 뺨에 닿자마자 뜨이는 눈을 보고 겨우 작은 소리를 냈다. 결국 깨워버렸나. 이런 이런, 깨워버렸네- 그렇게 능청을 떨려던 그녀의 생각은 콱 잡히는 손에 훅 날아간다. 대신 빠르게 상황을 따라 반응한다.
그의 한 손은 그녀의 손을 잡고, 다른 손은 베개 밑으로 들어가는 기민한 움직임을 보고 레레시아는 몸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잡히지 않은 팔을 등 뒤로 넘기자마자 그녀의 몸이 휙 당겨져 침대 위로 눌렸다. 그 짧은 사이 녹색의 안광이 레이저처럼 어둠 속을 구르는 것을 보았다. 그나저나, 여기가 바닥이었으면 꽤나 아팠겠군. 그 와중에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의 위에 올라타 목에 나이프를 겨눈 이스마엘을 바라보았다.
누구냐고. 어디에서 왔느냐고. 전에 들었던 것과 전혀 다른 날카로움이 담긴 목소리는 갓 깬 사람답게 잠겨있다. 아니, 아직 잠에서 덜 깬 건가? 그녀는 쉬이 입을 열지 않고 그를 잠자코 응시했다. 흉흉한 빛을 발하는 두 눈과 시야를 어지럽히는 단발의 하얀 물결과 목에 걸린 것으로 추정되는 은색 줄의 흔들림과 아주 정확하고 적절하던 그 움직임까지. 대답을 재촉하는 소리에도 당황하지 않고, 눈을 이리 저리 굴리던 레레시아는 금빛이 감도는 눈동자를 살짝 휘었다. 그리고 대답, 아니, 말했다.
"나쁜 꿈이라도 꾸었니. 왜 그리 날이 서 있을까."
그녀로서는 조금 생경하게 들릴 나긋한 목소리를 내며 예민하게 곤두서있을 이스마엘의 신경을 다독여주려 한다. 말 뿐만 아니라, 미리 등 뒤로 넘겨 제압에서 풀어두었던 팔을 들어올려 한 손이나마 그의 얼굴을 감싸 쓰다듬어주려 한다. 괜찮아. 나긋함 속에 다정함이 담긴 목소리가 부드럽게 공기를 울린다.
"천천히, 눈을 감고 숨을 한 번 크게 쉬어. 여기에 널 해할 건 없으니. 괜찮아. 안심하고 천천히 눈을 감고, 다시 뜨고-"
두려워하는 아이의 경계심을 풀어 안정감을 주듯, 심호흡을 유도하고 진정이 될 만한 말들을 들려준다.
"내가 누구인지는 직접 보면 돼. 자. 조금씩 보는 거야. 내가 누구인지. 네가 어디에 있는지."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 조용히 숨을 죽였다. 과연 이 정도로 통할까 아니면 기어코 피를 보게 될까. 가만히 그를 주시하며 반응을 기다린다.
이스마엘이 자신의 눈 초점이 잘 맞지 않는다는 사실과 상대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목에 칼을 들이민 이후였다. 보이는 실루엣으로 가늠하자면 긴 머리를 가진 사람인 것 같다. 표정을 찡그리자 눈매는 더욱 매서워진다. 대체 얼마나 피곤했길래 이렇게까지 보이지 않는 건지. 제대로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가디언즈인가? 가디언즈다. 분명 가디언즈일 것이다. 분명 자신을 쫓 온 것일 테다. 그렇지 않을 이유는 없다. 자신은 의무를 버리고 도망쳐왔으니까. 그 사람들은 낙원에서도 사람을 사냥했으니 끝까지 자신을 쫓을 것이 자명한데 왜 방심했지? 지금 당장 처리해야 하나? 아니, 처리해야 한다! 칼을 쥔 손에 힘을 더 주기라도 했는지 금세 핏줄이 돋았다. 잇새를 악물던 찰나, 이스마엘은 몸을 움찔 떨었다. 나긋한 목소리 때문이다.
"지금 무슨 소리를─"
몸이 더 크게 떨렸다. 경계하는 태도가 역력했다. 얼굴을 쓰다듬는 손에 이스마엘의 표정이 조금 더 험악해진다. "장난해?" 짐승이 낮게 울듯 묻는 목소리를 뒤로 한쪽 입술을 우그러뜨린다. 홉뜬 눈으로 쳐다보는 시선이 금방이라도 칼을 내지를 것 같았지만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기 때문인지 참사는 나지 않았다. 다정한 목소리에 이스마엘은 점차 자신의 생각이 이상했는지를 곱씹는 듯싶다. 괜찮다고? 뭐가 괜찮지? 가디언즈가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건가? 그런 짓을 저질러놓고……. 이스마엘은 흐린 눈을 질끈 감더니 몸을 한 번 떨었다. 숨을 쉬는 모습이 순간의 경계와 분을 삭이는 듯이 씨근덕댐에 가깝다. 뜨거웠던 감정이 다시 식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다시금 눈을 치켜뜨듯 하던 이스마엘이 새하얘질 정도로 쥔 손을 천천히 거두는 것도 어려운 일에 속했다. 아직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처럼 한참이고 미간을 찌푸린 뒤에야 이스마엘이 살짝 허리를 숙였다. 익숙한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고자 함이었다.
"……레시?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는데. 그 사람이 내 방에 있을 리가 없잖아."
아직은 혼란스럽지만 적어도 당신을 제압한 힘은 줄어든 상태였다. 이스마엘이 다시금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팽팽히 당긴 실을 튕겨본 적이 있는가. 날붙이를 대기만 해도 끊어질 것처럼 당겨진 실은 굳이 날붙이가 아니어도 뭐가 닿던 떨림이 생긴다. 그녀는 지금 이스마엘이 그런 실 같다고 느꼈다. 알 수 없는 무언가에게 아플 정도로 당겨져, 부드러운 깃털이 닿아도 파르르 떨어버리는 것 같다고. 그 모습들을 그녀는 유심히 그리고 진지하게 눈에 담았다. 귓가로 칼을 쥐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울려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목소리의 나긋함에 긴장을 풀기는 커녕 몸을 떨고, 위협 없는 손길에 숨길 수 없을 만큼 얼굴이 일그러진다. 목을 울리는 경계의 소리가 얼굴을 감싼 손에 울림으로 전해진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까지 몰아넣는 걸까. 의문이 들면서 동시에 긴장된 순간의 연속이었다. 이스마엘이 겨우 눈을 감고, 어렵사리 뜨고, 천천히 손을 거두는 때까지, 그녀는 허투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았다. 숨조차 흐트리지 않고 기다렸다. 그가 허리를 숙여 가까이 하면, 그녀의 노란 눈동자가 깜빡깜빡 쳐다보고 있었지.
그런데, 저 '레시'는 그녀를 말하는게 맞을까?
"꿈인지 아닌지, 그것도 직접 확인해보면 되지 않을까나."
새로운 의문의 진위를 확인하기 전에 그녀는 일단 이 상황부터 정리해야겠다고 판단했다. 나긋하지만 조금 장난기가 가미된 목소리로 톡 튀듯 말하곤 몸을 움직였다. 제압하던 힘이 슬그머니 줄은게 느껴졌으니까. 기습적으로 허리를 튕겨 이스마엘의 몸에 가벼운 충격을 주고 그녀는 그 반동으로 상체를 일으킨다. 그러면서 해방된 두 팔로 이스마엘을 끌어안으려 한다. 잽싸게 도망가지 않았다면 그녀의 무릎 위에 이스마엘이 마주보는 자세로 앉아서 안겨 있는 모양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 되었다면 아마 시선이 약간 어긋났을 테니, 그녀가 고개를 살짝 들고 마주 보며 웃는- 듯이 눈매를 힌 표정을 짓는다. 그 뒤 재잘대는 목소리는 평소로 돌아왔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