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섞인 말에도 돌아오는 대답도, 천천히 기다리겠다는 말도. 불안정한 점 투성이에 아직껏 많은 것들을 알아가는 과정에 있는 그가 애정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기까지 걸릴 여정은 그리 짧지 않을 테다. 최선을 다한다면 언젠가는 함께 걷는 때가 불안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올까? 그를 낳은 고향, 암울한 그곳을 빠져 나온 이래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자신해왔음에도 이럴 때만은 자신이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손가락을 꿈질거리며 골몰하던 그의 생각이 끊어진 것은 그때였다. 이어지는 멜피의 대답에 그는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젠장, 너무 치명적인 수법이다. 이미 멜피는 그를 너무 잘 알았다. 그동안 그가 그만큼 투명하게 굴었다는 사실의 방증일 뿐이지만, 아무튼. 당당하게 덤벼봤자 아직 까불려면 한참 멀었다.
"……대가리를 깨서라도 안 그런다. 못난 새*는 되지 말아야지."
가정만으로도 쩔쩔매니 그런 상황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하다. 그렇게 되도록 할 생각도 없고. 빠르게 꼬리를 내리고서는 그는 슬그머니 멜피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바닥까지 내려간 꼬리를 한 번 더 꺾어서 내렸다.
"어, 미안하다."
어린애 취급 해줘도 상관 없는, 오히려 그럴수록 좀 더 약해지는 그와는 달리 멜피는 쓰다듬어 준다고 물렁해지는 동급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미묘하게 시무룩해졌지만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옆에 있어주면 된다고 하니까 그게 또 좋아서다. 멜피가 준비를 끝내는 동안 그도 물통의 물을 버리고 잡다한 뒷정리를 마쳤다. 휴게실을 빠져나와 복도를 걸어가는 길은 한산했지만 바로 앞에 큰일이 닥칠 거라 생각하니 조금 긴장이 된다. 그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는 팔짱을 낀 채로 고민을 거듭했다. 그도 따끔하게 혼나기는 싫었던 것이다.
"벌써 혼났다고 해?"
이미 혼나고 왔으니까 더 안 혼내도 된다고…… 말하면 통할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왜 이제야 데려왔냐거나 응급처치 함부로 했다면서 같이 두 배로 혼날지도. 열심히 머리를 굴려봤지만 그럴싸한 계책이 더 떠오르지는 않았다. 사지로 걸어들어가는 기분이 이런 건가 싶지만, 그렇다고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꾸준히 걸으니 어느새 의무실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는 천천히 문을 열고 의무실 안으로 들었다.
네가 고맙다고 하자 또 기분이 좋아져버려서. 나는 속으로 이게 계속 된다면 웬만한 부상은 잊고 싸울 수 있지 않을까하는 이상한 상상도 해보았다. 그걸 말했다가는 너한테 혼날게 뻔하니 말하지 않겠지만.
그리고 울겠다는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듯한 너의 모습에 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물론 진짜로 그런 상황이 되면 상대방이 자신이 우는것 정도에 타격을 받지 않는다는것은 질리도록 잘 알고있으나. 눈 앞에 있는 네가. 그럴리 없다고 생각하며 괜한 걱정을 덜어버리고 너의 뺨에 부비적댔다.
"그러면 대가리 안 깨지게 열심히 유혹해야겠네."
그리고나서 나는 꼬리를 내리는듯한 환영이 보이는 너를 눈을 희며 바라보라다가 미안하다고 말하자 그럴거 없다며 미소지었다. 아이 취급이 싫다는건 아니었으니까. 다만 아무리 그래도 의무실에선 쫌.. 이란 마음이었다.
"으음~ 괜히 둘 다 혼나지 않을까."
뒷정리가 끝나고. 너와 함께 떠나는 길이었지만 솔직히 발걸음은 무거웠다. 내가 잘못한거야 알고 있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데리고 와준 네가 혼나는건 더 싫었기에. 어쩔 수 없지~ 하는 마음가짐이 더 크기도 했고... 어느새 의무실에 도착해버린것도 있어서, 나는 그림자를 풀고 너를 따라서 의무실에 들어섰다.
"..........."
치료 자체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던거 같다. 의외로 혼나는거 자체는 그냥 의무실 자체에 긴장해서 잘 안들렸던거 같기도 하다. 긴장을 억누르고자 어느새 너의 소매를 잡아버렸기에, 아까 말한대로 되버린건 슬펐지만..
그는 얌전히 부비적당했다. 하필 지금 한 말이 유혹하겠다는 소리라서, 이건 유혹의 일환인가─이게 본격적인 유혹으로 통한다는 게 우습다마는─아니면 이제까지와 같은 애정표현인가 헷갈린다. 하지만 둘 중 어느 쪽이건 그에게 탁월하게 먹혀들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내색은 안 하려고 했지만 뭐, 겉과 속이 일치하는 그가 속마음을 숨길 수 있을 리 있나. 히쭉 입 끝이 움찔거리는 게 빤히 보인다.
"그래도 *, 두 번 혼나는 건 싫은데."
그간의 사정을 들었고, 여기까지 오는 데만 해도 멜피에게는 큰 결심이 필요했다는 걸 아니 그것으로 꾸지람 듣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걸 어떡하나. 문을 열고 들어간 의무실은 막 임무를 끝내고 사람들이 밀어닥치던 때에 비하면 한산해진 상태였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다간 어떤 말이 돌아올지 무서워 부상에 관해서만 간략하게 줄여 말하긴 했지만, 결국은 야단을 맞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것 또한 의료진들의 업무이니 어쩔 수 없겠지만서도. 그는 치료가 끝날 때까지 곁에서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던 때에, 제 옷소매를 잡아 오는 손길이 느껴져 그는 멜피를 바라보았다. 긴장감이 역력한 모습에 손끝이라도 닿아볼까 생각하기도 했으나 잔뜩 예민해졌을 상태에 더 자극을 주면 안 될 듯해 묵묵히 기다리기만 했다.
몇몇 과정을 거친 후에야 마침내 치료가 모두 끝났다. 그는 드디어 자유로워진 멜피에게 다가가 한쪽 손을 슬쩍 내밀었다.
"존* 잘 참았다.……그리고, 아까 못 잡아줬던 거."
치료 중에 방해 될까 가만히 있었던 그때를 말하는 거다. 그렇게 말하는 태도는 이제는 조금쯤 자연스럽게 보였다. 맨 처음 악수 운운할 때에 비하면 그사이 장족의 발전을 이룬 셈이다.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며 물었다.
딱히 유혹을 하려는 생각없이 부비적거리고 있자니. 너의 입 끝이 경련하듯 움찔거리는것이 보였다. 그 모습에 기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해서, 놀려볼까 생각이 들었던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뭐, 오늘은 봐주도록 할까~.
"아하하."
두번 혼나는건 싫다는 이야기에, 네가 나를 걱정해주는걸 알았지만. 나는 구태여 웃어 넘겼다. 그렇다고해서 내가 의무실에 가서 내 사정을 설명할리도 만무하고. 그럴 필요성도 없으니까. 뭐 그냥 잠깐 혼나고 말면 되는것이었다. 다만 정작 의무실에 가니 안 좋은 기억들이 떠올라서 긴장해버렸으니. 이것이 좋은건지 나쁜건진 모르겠다. 그저 무의식중에 너의 소매를 잡아버린것은 눈치를 챘지만 그것을 놓은 용기는 없었다.
치료가 끝나서야 의무실에서 나갈 수 있었으므로, 실제로는 짧았지만 체감상 길었던 시간을 뒤로하고 나는 너를 바라봤다. 아까 못 잡아줬던거라니. 너의 말에 작게 웃음을 흘린 나는 멀쩡한 손으로 너의 손을 잡았다. 딱히 지금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아픈건 아니지만 신경 쓰는것도 미안하니까.
"그래야지, 시간도 시간이고."
사실 조금 잊고 있었지만 우리는 전투가 다 끝나고나서 또 약간 시간이 지난뒤 만난거였으니. 창밖을 보니 그야말로 한밤중이었다. 이건 다른 의미로도 의료진한테 미안해야 할지도..
"그.. 자기전까지 따뜻한거라도 마시면서 옆에 있어줄 수 있..을까?"
아마 지금 몸의 피로로 봐서 잠자는데 오래 걸리진 않을거 같지만. 그래도 뭔가 너와 바로 떨어지기 싫어서 나는 너에게 내 방에 와줄 수 있냐는 뜻으로 말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