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짱을 낀 채로 생각했다. 내가 먼 미래에 요리점을 연다... 사람들이 들르고, 옛 동료들도 찾아온다. 웃으면서 식칼을 놀리고 윅을 움직인다.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는데 얼마나 많은 일이 있을지도 생각했다. 당장 가디언즈라는 기둥을 잃은 도시는 무너질게 뻔했다. 다시 사회를 세우고 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고, 모두가 함께한단 보장도 없었다.
[그래도 이몸은 불로란 말씀. 네가 아줌마가 될 때까지 이대로 살아있으면, 잘 되지 않겠어?]
농담 섞인 말을 하며 후후 웃었다. 뭐, 안된다는 보장도 없는 일이다. 어떻게든 부닥쳐보고, 힘내서 해결한다. 그 정도로도 충분하겠지. 그렇게 되면 이런 꼬맹이들도 길가에 많이 나오고, 세상도 좀더 밝아지지 않을까. 열심히 포크로 면을 먹는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문득 생각나서, 책을 다시 펼쳐본다. 앞치마를 입은 실버 봄버가 국자를 든 채로 말했다. "얼마나 오래 걸리든 상관없어. 모든 라멘이 동등하고 평등해지는 날이 오기까지 힘내면 되는거다!" 뭔 대사인가 싶었지만. 지금이라면 조금 이해가 가는 말이었다.
그대로 [너도 열심히 해서 이몸에게 미각을 느낄 수 있는 머리를 달아달라고.] 라며, 웃으며 말했다.
아주 오래 걸린다고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겠다는 대사를 들으면서 에스티아는 순수하게 멋지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지 않은가. 실제로 지금 완전 낭만적이라고 그녀는 생각했고 절로 두 눈을 초롱초롱 반짝였다. 이어 포크로 면을 다시 돌돌 말아서 먹은 후, 육수를 마시면서 에스티아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 우리는 라멘이 아니라 세븐스지만 말이야. 그리고 미각을 느낄 수 있는 머리? 지금도 가능하긴 하지만, 사실 너무 위험부담이 커서 말이야. 네 뇌를 직접 건드려야 하거든."
그러니까 말 그대로 뇌와 연결을 해서 음식을 먹을 때마다 전기 신호를 줘서 맛을 느끼고 있다고 착각하게 하는 방식이라면 지금도 만들 수 있었다. 단 어디까지나 뇌를 직접 건드려야 하니, 자칫 잘못하면 그가 영영 못 깨어날수도 있기에 그녀는 그 방식을 시도할 수 없었다. 혹여나 만약에라도 잘못되면 자신의 손으로 동료를 하나 죽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안전한 방법까지는 10년만 기다려줘. 최대한 안전한 쪽으로 생각해볼테니까! 나는 에스티아 올리에트. 못 만드는 것은 없어! 아자!"
괜히 파이팅 포즈를 취하면서 그녀는 접시에 담겨있는 마지막 면발을 후루룩 먹으면서 티슈를 꺼낸 후에 자신의 입가를 천천히 닦아냈다. 물론 기품있고 예쁘게 닦기보다는 그냥 입가에 묻어있을 국물과 건더기를 치우기 위해 빠르게 닦아낸 느낌에 가까웠다. 이내 그는 티슈를 다시 주머니 속에 집어넣은 후에 그를 바라보면서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259-260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그 정도로 아스텔은 좀 많이 어설프고 미숙한 면이 있답니다. 죽이는 것과 싸우는 것을 제외하면 그렇게 막 능력치가 엄청 높고 그러진 않아요. 그래도 기본적인 생활은 할 수 있고 사회를 살아갈 때 필요한 지식은 충분히 있긴 하지만요.
[...갑자기 뇌를 건드린다는 말이 나오니까 느낌이 굉장히 묘한데. 뭐 그래- 10년 정도라면야.]
아자! 하며 파이팅 포즈를 잡는 그녀를 보며 덩달아 나도 오우! 하며 주먹을 쥐는 자세를 취하고, 그대로 서로 주먹을 꽁 부딫혔다. 뭐 가끔은 이런것도 괜찮은가.
...그리고 그릇을 받아준 다음, [아 그래.] 라는 말과 함께 그쪽을 뒤돌아봤다.
[얼마 전에 "사이보그 전사 실버 봄버 ~인베이더의 습격~"을 구했거든. 같이 볼꺼?]
여기서 잠깐! 사이보그 전사 실버 봄버 ~인베이더의 습격~이란!? 사이보그 전사 실버 봄버의 TV판 외전으로, 실버 봄버가 우주에서 온 악의 군단 인베이더즈를 상대로 혈혈단신으로 싸워나가는 이야기다!
화이트 타이거와의 공투나, 실버 봄버의 누이에 관한 이야기 등 팬을 위한 볼거리가 가득하지만 TV에 나왔을 때 이후로 따로 영상매체로 발매되지 않다가... 최근 블루레이로 발매된 것이다! 당연히 팬들에 의한 매진 행진! 그러나 제이슨은 힘으로 구한 것이다... 여기서 힘이란 완력이다.
그녀가 기대자 아스텔이 힘을 주어 버틴다. 덕분에 넘어지지 않고 느슨히 기대었다. 상체만 기울이려니 불편해서 다리도 슬쩍 자세를 바꿔놓자 제법 편안해졌다. 그 와중에 팔이 푹신하지 않아 안 불편하냐는 물음에 프흐. 가늘은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네가 쿠션도 아닌데 푹신할 거라고 생각이나 하겠어? 안 불편해- 든든하니 편하구만."
아. 그렇지만 넘어지게 두면 화낼 거야. 짧게 덧붙인 말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그 뒤에 레레시아가 이런 저런 말을 해주자, 가만히 듣고 있던 아스텔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기댄 그대로 고개를 들어 아스텔을 보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뜨며 그의 얼굴과 스쳐가는 표정을 지켜보았다. 저런 표정도 할 줄 아는구나. 웃을 땐 저렇구나. 줄곧 지켜보던 시선은 물고기 끌어오는 소리에 아래로 향하고, 물 튀기는 소리를 따라 호수로 향했다. 저멀리 퐁당- 하고 수면 위로 자잘하게 파문이 번진다. 잠시 호수를 바라보다가 흐응. 목을 울렸다.
"고맙긴. 별 말도 안 했는데. 일일이 대답해주니까 내가 다 고맙다."
귀찮을 법도 한데 대답을, 그것도 묻지 않은 것까지 술술 해주니 듣는 입장으로는 귀가 호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까는 고민을 들어주고 나름 생각이 정리될 만한 얘기도 해줬으니. 이거 과분해서 밥이라도 한 끼 사야겠다고 반은 진심 담긴 너스레를 떤다.
"그건 그렇고- 너는 지금이나 나중이나 비슷할 거라 했지만, 난 네가 변할 수도 있을거라 생각해. 사람 앞날은 당장 한 걸음 앞도 모르는 거라잖아. 네가, 원해서 그런 실력을 갖게 된게 아닌 것처럼. 내일, 당장 오늘 밤에라도 무슨 일이 생겨서 그 일이 너한테 어떤 영향을 줄 지 어떨지는 모르는 일이야. 언젠가는 너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게 될 수도 있지. 옛날의 나는 그랬는데 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좀 기대되지 않아? 과연 뭐가 자신을 변하게 할지?"
물론 앞으로 좋은 일만 있진 않겠지만. 일어날 일들 중에 그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앞을 바라보게 할 수 있는, 힘들어도 다시 한 걸음 내딛을 수 있게 만드는, 자신의 안에 작은 변화의 싹 정도는 틔울 만한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변하는게 두려울 것도 없어. 어디가 어떻게 변하든 내가 나인 건 절대 변하지 않을 테니까 말야."
아, 그렇지만 라라는 좀 변해줬으면 좋겠어. 시스콘 너무 심해. 라며 잠시 툴툴거리나 싶더니 고개를 들어 아스텔을 보곤, 싱긋- 하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꽤 빠르게 매진되는 그런 물건일텐데. 그것을 떠나서 세븐스인 자신들이 구하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일텐데. 우연히 여기에 그 상품이 들어왔나? 아니면 다른 곳에 있었나? 혹은 약탈? 어느 쪽이건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에스티아는 크게 흥미를 보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한가지 궁금증이 살짝 떠올랐고 에스티아는 그 궁금증을 입에 담았다.
"제이슨은 그런 작품들을 좋아하는구나. 자신이 로봇이 되어서? 아니면 원래부터 그랬던거야? 아. 이전의 기억은 조금 애매하려나. 그래도 뭔가 성향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로봇이라서 그런 것인지 조금 궁금하긴 해서. 참고로 난 원래 그런 거 좋아했어!"
그런 작품 좋아하는 것이 이상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대꾸하면서 에스티아는 기대감 넘치는 눈빛을 보였다. 그렇다면 언제쯤 가면 좋을까? 잠시 생각을 하다 에스티아는 제이슨에게 다시 이야기했다.
"제이슨은 라멘 만든다고 바쁠테니까 나중에 시간되면 내 연구실로 와서 얘기해줘. 아마 어지간하면 거기에 있을테니까. 없으면... 내가 다른 볼일 보는 중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고."
자신도 개인 시간 정도는 다 있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는 장난스럽게 쿡쿡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그녀의 말에 틀림은 없었다. 자신이라고 좋아서 싸우는 기술이나 죽이는 것에 강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죽고 싶지 않아서 이리저리 계속 이 악물고 익히다보니 이렇게 된 것 뿐이지. 아마 평범한 삶을 살았다면, 하물며 세븐스로 태어나지만 않았다면 자신이 누군가와 싸우거나, 누군가를 죽이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스텔은 생각했다. 필요하다면 망설이지 않고 싸우거나 죽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목숨을 끊는 것이 그렇게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런 것에 무덤덤해지는 자신이 참으로 낯설었고, 여전히 꺼려지는 행동 중 하나이긴 했다. 단지, 필요하다면 망설이지 않을 뿐.
"...시스콘? ...그래? 그냥 잘 챙겨주는 그런 타입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모르는 것도 있을테니까."
라라시아. 의료진에 속해있는 그녀에 대해서는 아스텔도 어느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스콘이라고 불릴 정도인가? 라고 하면 조금 애매한 느낌이었으나 그렇게 깊게 파고들진 않았다. 그냥 필요 이상으로 자신의 혈육을 잘 챙겨주는 것이겠거니 생각하면서 그는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뭐가 어떻게 변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역시 나보다는 세상이 더 변했으면 좋을 것 같아. ...세상이 정말로 안정되고, 세븐스와 비능력자가 화합할 수 있는 세상이 된다면... 대장에게 이야기해서 장기 휴가라도 받은 후에, 여행이나 떠날까 싶기도 하고."
물론 그런 날이 언제 찾아올진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언젠간 오지 않을까. 그렇게 막연하게 생각하면서 아스텔은 이번에는 낚시대를 굳이 던지진 않았다. 낚시보다는 그녀와 대화하는 것을 택한 모양이었다.
"...너는 어쩌고 싶어? ...정말로 세상이 안정되어서 자유와 권리를 얻게 된다면 말이야. 뭐든지 가능하고,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된다면 말이야."
"그렇구나. 그럼 앞으로는 가끔 해 봐. 생각하는데는 시간만 있으면 되니까 어렵지도 않구."
앞날에 대한 기대는 여럿일수록 좋은거 아니겠냐며. 너무 깊이 파고들지 않게 말한다. 쉬이 건드리면 안될 부분이란 건 어느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법이었다. 다만 손을 대어도 좋을 때가 온다 해도, 그녀가 손을 뻗을지는 미지수지만.
"지금은 각자 위치가 있으니까 티가 안 나서 그래. 여태까지는 나도 그러려니 했는데. 이제는 안 될 것 같아. ...이건 조만간 대화를 좀 해야 할지도."
라라의 시스콘 기질에 대해 그저 지금은 티가 안 날 뿐이라고 레레시아는 얘기해주었다. 얘기라고 해도 한두마디에 끝말은 거의 혼잣말이었지만 말투상 그냥 중얼거린 것 같기도 하다. 그런가보다 하고 넘길 수 있을 만하게, 가벼운 분위기로 대화를 이어간다. 아스텔의 미소를 보곤 이미 미소를 지은 그녀의 표정이 살짝 진해진다. 그대로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호수로 돌리고 그녀가 말했다.
"사람이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변하려 하면 세상도 변한댔어. 세상이란 건 결국 사람이 만드는 거고. 세븐스도 비능력자도 같은 사람이니까. 지금 세상에 저항하고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언젠가는 지금과 다른 세상이 오겠지."
그 다른 세상이 지금보다 나을지 나쁠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더 나은 쪽으로 바뀌길 원하는 사람은 분명 있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에델바이스가 있다. 그 의지가 꺾이지만 않는다면 머지 않은 미래에 더 나은 세상이 올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막연한 나중이 조금은 윤곽이 잡히는 듯 하지 않냐고 말하고, 다리를 모아 팔로 감싸안는다. 조금 더 편하게 아스텔에게 기대어 나중을 묻는 그의 말에 대답한다.
"그런 세상이 와서 다시 내 자유와 권리가 주어진다면- 이라. 글쎄. 뭐하지? 뭐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서 상상하기가 어렵다. 일단은 그동안 못 하던 걸 하고 싶을 거 같아. 지금보다 더 많은 걸 보고 경험하고, 보통의 여자애처럼 사는- 건 좀 무리일까나. 응. 나도 여행이 좋을 지도. 한 번 세상을 돌아보고나면 왠만큼 하고 싶은 건 다 해볼 거고, 그러면서 이후를 찾을 수 있을 거 같아."
어쩌면 여행이 안 끝날 지도 모르지만? 또다시 농담 같은 어조로 말하고 작은 웃음소리를 낸다. 옆에서나 겨우 들릴만한 작은 소리였다.
그는 씩 웃으며 농담 섞인 소리를 했다. 실없는 말로라도 위로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진심 담긴 말이기도 했다. 남자친구라는 말은 생경하다. 듣고서 조금, 미묘한 기분이 들어서 두 손으로 제 얼굴을 문질러 댔다. 평생 생각도 해본 적 없고 달리 바란 적 역시 없었던 일인데, 사람이 너무 당황하거나 현실성 없는 일을 경험하면 차분해진다고 했던가. 쑥스럽기보다는 오히려 침착해지는 기분이었다. 들뜨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이미 여러 차례 크게 놀란 덕분인지 울렁이는 격동도 참을 만큼은 가라앉았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세세하게 표현할 겨를 없이 그저 편안한 기분으로, 제 두 손을 마주 잡고 담담하게 말할 수 있었다.
"……네 마음 다 받아줄 수 있을 때가 되면, **. 그래야지."
고작해야 사귀자는 말에도 불에 덴 고양이처럼 화드득 도망쳐 버리니 그런 날이 오려면 한참은 멀었고, 그때까지 서로 무사하리란 보장도 없지만, 그는 그렇게 확답했다. 제 스스로 무엇이든 할 자격은 없다고 자학하면서도 내심마저 그렇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들에게도 앞날을 꿈꿀 자격이 있다. 선택할 수 없는 운명으로 인해 고통받았으나 그렇기에 불확실한 미래나마 온전히 갖고자 나아가는 것이다. 험지를 구를지언정 그것은 제 손으로 헤쳐나가길 택한 고난이기에. 설혹 더한 절망이 닥치더라도 후회는 없으리라 확신했다.
"안 봐주면 존* 어쩔 건데." ……쓰다듬 받는 주제에 당당하게 대꾸한 데는 연원이 있었다는 뜻이다.
간질거리는 소리를 한 장본인은 진지하기만 했다. 그저 좋고, 좋아서, 좋아하는 이유를 풀어놓는 데 열중한 나머지 말 한 마디마다 빨개지는 멜피의 얼굴을 다 지나서야 보게 된 것이다. 뒤늦게 얼굴 붉어진 모습을 보고 그는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참 짓궂게도 웃었다. 아무런 걱정 없이 웃던 때는 짧았다. 다시금 통증에 시달리는 멜피를 보자 다시 표정이 굳었다. 그는 우선 멜피를 천천히 일으켜 세워주고선 잠시 머뭇거렸다. 단순히 아픈 사람을 들쳐 메거나 싫다고 고집부리는 걸 윽박질러서 끌고 가는 일은 어렵지 않았는데, 아파서 우는 여자친구는 어떻게 조심스럽게 달래줄지…… 어떻게 해야 좋은지 몰라 속으로 안절부절 못 하다가 결국 결정을 내렸다. 그는 척, 사뭇 엄장한 태도로 손을 내밀었다.
"그, 같이 가서…… 손 잡아줄까. ……아님 *, 안아 줘?"
무슨 병원 가기 싫은 어린애 사탕 주겠다는 소리도 아니고. 그렇지만 그는 진지했다. 제 쪽에서 이런 제안을 했다는 것도 나름 용기 낸 거다.
"어차피 모두에게 말할거라면, 이렇게 흘려도 상관은 없을거라 봐. 아님 일부러 흘려보거나."
어차피 모두에게 알릴 거라면 조금 부주의해도 용서가 될 것이다. 이러나 저러나 결과는 같으니까. 다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철저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 숨겨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드러나더라도 대충 둘러댈 뻔뻔함도 있어야 하고.
"나? 내가 뭘 숨기는 게 있겠어. 그냥 부주의한게 좀 비슷한거지. 이런거 저런거 까먹고 다니고, 흘리고 다니고 뭐 그런거."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한다. 나는 숨기는 것이 없다. 그보단 굳이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지만.
"별 것도 아닌 녀석이 별 것도 아닌 삶을 살아오다가, 그런 변변찮은 삶이 지루해져서 그걸 집어던지려 하는 중일 뿐이지."
그렇기에 만사에 부주의하고, 그냥 지 생각하는 대로만 움직이는 단순무식한 녀석이 이 자리에 앉아있는거다. 헝겊 주머니 앞에 두었던 캔을 들고, 찌그러트린 다음에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경쾌한 금속 소리를 내며 가볍게 들어가자, 오예 하고 김빠지는 환호를 하며 그저 장난을 치고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