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며 내가 새벽에 주방에 들어간지도 8시간 정도, 냄비 3개에 보글보글 끓고 있는 육수를 보면서 나는 고민하고 있었다... [맛을 모르겠어.] 왜 이런걸 생각 못 한걸까... 개조된 후로, 나는 딱히 냄새를 맡을수도 맛을 볼 수도 없는 모습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라멘은 향이랑 맛이 중요한 음식... 지금까지 요리한 경험으로 봤을 때, 최대한 보통 사람 기준에서 맛있도록 만들긴 했지만...
[애초에 만화만 보고 만드는게 잘못이었나?]
머리를 긁적긁적거리며, 앞치마에 넣어뒀던 만화책을 꺼냈다. "사이보그 전사 실버 봄버". 내가 가장 아끼는 작품... 여기에 왠지는 모르겠지만 한 권을 통째로 쓰는 라멘 에피소드가 있었다. 엄청 상세한 내용 덕분에 보고 바로 라멘 만들기를 시도해도 좋을 정도로... 지금 팬들 사이에선 작가가 좀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그린게 아니냔 말도 있었다.
그래도 이거 덕분에 저번에 한정으로 나온 라멘 요리사 실버 봄버 피규어도 살 수 있었으니까 뭐. 끓어대는 냄비를 휘휘 젓다가 조금 먹어본다. 역시 아무 맛도 안 나는데... 오히려 내가 맛이 나면 안 좋은거니까 괜찮나? 누구 한명 잡아다 먹여볼까?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머엉- 하게, 호수를 바라보면서, 저 수면처럼 잔잔한 아스텔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머릿속은 복잡다망하나 귀로 들어오는 소리를 차곡차곡 정리해 놓을 틈은 있더란다. 한마디 한마디 들어오는 말을 곱씹으며 다시금 생각을 정리해본다.
복수. 과거 레레시아의 복수심은 그저 폭력적이었고 무차별적이었다. 이 세상이 저주스러웠고 어머니를 죽인 그들과 누명을 씌운 그들과 아무튼 모든게 원망스러웠다. 원망스럽고 원망스러워 피를 끓게 하는 그 감정에 몸을 내던지고 싶었다. 살점 하나에서 뼈 한조각까지 전부 분노의 불길에 불살라버리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 했다. 어머니는 구하지 못 했어도, 남은 가족이 있었으니까. 분노로 눈이 붉어진 그녀에게 매달리던 라라시아를 떨쳐내기엔 미안함과 죄책감이 그러지 못 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녀가 없었다면 어쩌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않았을까. 과연.
"...우리는 영웅이 아니라..."
아스텔의 얘기 중 나온 그 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우리는 영웅이 아니다. 영웅도 아닌데 복수심을 갖는게 잘못인가. 그렇게 묻는다면 단박에 대답할 수 있다. 아니. 당한 것이 있으니 돌려주는 건 당연한거다. 복수심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것을 향할 대상을 똑바로 보는 것이 중요하지.
"오."
미끼도 걸지 않은 낚시바늘에 물고기가 걸려오자 레레시아도 가까이 가서 물고기를 보았다. 헤. 못 생겼어. 주둥이를 뻐끔대는 물고기를 보며 중얼거리고 그가 물고기를 호수로 돌려보내는 것도 지켜본다. 그렇게 가까이 온 김에 옆에 자리를 잡는다. 한결 착잡함이 가신 눈동자가 엷은 파문이 번지는 호수를 바라본다.
"네 얘기를 들으니까 조금은 정리가 되네. 음. 옛날이라면 그냥 다 없애고 싶어했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렇지만 아예 복수를 포기하고 싶지도 않고. 마침 대상은 확실하니 그 쪽으로 향하면 되겠지. 에델바이스의 방침이라면 어긋날 일도 없을거야. 당장은 그 정도로만 생각해야겠다. 응. 이렇게 간단한 걸 괜히 며칠이나 시간 버렸어."
시간낭비 오지게 했네- 자조적이던 좀 전과는 달리 개운한 목소리였다. 반듯하게 앉아서 호수를 구경하던 그녀는 고개를 돌려 아스텔을 보았다. 노란 눈이 깜빡깜빡하더니 그런 질문을 던졌다.
오늘따라 왜 이리 배가 고픈 것인지. 에스티아는 투정 부리는 목소리를 내면서 식당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근데 이건 또 무슨 냄새인건지. 뭔가 맛있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에스티아는 괜히 냄새를 맡으면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주방에서 뭔가를 만들고 있는 것일까 싶어 에스티아는 이내 호기심을 가지고 주방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늘 밥을 만드는 이가 오늘은 또 뭘 만들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주방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순간...
"......"
순간적으로 에스티아는 문을 다시 쿵 닫았다. 자신은 지금 뭘 본 것일까. 상의를 벗고 있고 앞치마를 하고 있는 제이슨을 본 것 같은데. 내가 너무 피곤한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에스티아는 두 눈을 조용히 비볐다. 응. 그래. 내가 잘못 본 것이 분명해. 그렇게 생각하며 에스티아는 다시 조심스럽게 주방의 문을 열고 그 안을 바라봤다.
"....."
다시 한 번 순간적으로 에스티아는 문을 쿵 닫았다. 뭔가를, 뭔가를 잘못 본 것인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진짜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은 뭘 해야 좋을까. 침을 꿀꺽 삼키면서 에스티아는 침착하게 주방의 밖으로 나서려고 했다. 물론 잡으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네가 뭔가 잊고 있다는 걸 깨닫는 데까지는 그렇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숨길 만한 장소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숨길 물건이 없다는 사실, 너는 식은땀이 흐르는 듯,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에 시선이 마구 흔들린다. 어디에 떨어트렸지? 누군가 찾았을까? 뒤져보지는 않았으려나? 주인을 찾아주려면 안에 담긴 걸 확인하고자 하겠지? 이건... 큰일이 난 건 아닐까? 너는 급하게 몸을 돌려 네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복도 이곳저곳을 눈으로 훑으며 헝겊 주머니를 찾지만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 있는 거지? 그렇게 걸어 걸어 도착한 곳은 휴게실, 여기에마저 없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속이 쓰렸다.
"......"
천천히 문을 여니, 다행스럽게도 헝겊 주머니는 탁자 위에 올라가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소파에 앉은 레이먼드와 눈이 마주치자 너는 순간적으로 숨을 참았다. ...본 건가? 너는 침착하게 휴게실 안으로 들어가, 헝겊 주머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대로 그만 가지고 나가자. 괜한 말은 하지 말고.
그녀의 말에 아스텔은 그렇게 짧게 대꾸했다. 에델바이스의 방침에 어긋날 일도 없고 충돌할 일도 없다. 복수를 포기하지 않되 대상은 확실하게 할 것이다. 몇 번을 곱씹어도 에델바이스의 방침과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누군가는 좀 더 영웅적인 뭔가를 바랄지도 모르나 이 에델바이스를 만든 로벨리아는 자신들은 영웅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아스텔은 그 말의 의미를 대충은 알고 있었다. 자신들은 역사에 기록될 일도 없고 금전적인 뭔가를 바라고 이런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에델바이스 멤버 중에는 그런 것을 바라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나 그 누구도 그것을 보장해줄 수 없었다. 그저 세븐스의 권리와 자유를 찾기 위한 집단. 단지 그 뿐인 집단이었고 엄연히 세상을 뒤집어 엎어버리려고 하며 U.P.G를 엎어버리려고 하는 집단이었다. 말이 좋아 레지스탕스지. 누군가의 눈엔 테러리스트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다면 좀 더 복수심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일이라고 아스텔은 생각했다. 물론 레레시아가 어떻게 생각할진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이내 아스텔은 다시 한 번 낚시줄을 호수로 힘껏 던졌다. 퐁당. 또 다시 찌가 물 속에 가라앉는 것을 확인한 후, 아스텔은 조금 더 낚시바늘을 호수 깊은 곳으로 살며시 밀어넣은 후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내 들려오는 물음.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느꼈으나 낚시를 하고 있기도 했기에 시선을 다른 곳에 주진 못하며 아스텔은 입을 열었다.
"...묻지 말라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없다면 말이야. ...도저히 물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라면 나도 굳이 묻진 않지만."
어쨌건 너무나 심각하고 위험해보이는 분위기가 아니면 어지간하면 묻는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아스텔은 반대편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이어 그는 눈동자만 살짝 옆으로 돌려 레레시아를 바라보면서 되물었다.
"...이상해? ...적어도 내 기준에선 교류를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만. ...뭐랄까. 이런 것은 서툴러. ...삶이 삶이라 딱히 동료라던가 그런 것을 깊게 가져본 적이 없다보니."
배~고~파! 라며 소리 지르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벌컥 문을 연 누군가. 아, 저 녀석인가. 인사하려는 차에 문을 닫고 가버린다. ...뭐지? 라고 생각한 차에 다시 열리는 문. 그리고 이어서 그 문이 쾅 닫히기 전에-
[개조인간의 슬픔 로켓 펀치-!!]
재빨리 팔을 발사시켜서 문 사이에 끼워버린다. 그 결과 문 틈 사이에 토막난 기계 팔뚝이 그대로 끼어 있는 기괴한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다가가서- 그대로 팔을 파악! 끼우고 그녀의 머리를 탁! 잡았다.
[왔구나! 꼬마 대장!]
그리고 얼굴을 들이밀며 크게 웃었다. 그대로 양 겨드랑이에 손을 끼우고, 고양이를 들어올리는것 마냥 들어버린 다음- 주방 안쪽에 의자를 놓고 거기에 앉혔다. 상반신 탈의 상태인 근육질 앞치마 사이보그는 보면 볼수록 말로 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마침 잘 왔구만.] 이라고 말한 나는 작은 맛보기용 접시에 냄비 3개에서 육수를 조금씩 담아서 줬다.
문 사이에 로켓 펀치를 끼우고 팔을 다시 끼운 후에 제 머리를 턱 잡는 그 모습에 에스티아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물론 그녀는 기계나 로봇을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상의를 벗고 앞치마를 입고 있는 제이슨이 자신의 머리를 잡고 있고 자신을 들어올리는 모습에 그녀는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두 눈을 깜빡였다. 어느 순간 의자에 안졓진 후에 육수를 담아서 주는 그 모습에 에스티아는 순간적으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좀 더 두 눈을 깜빡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제이슨. 지금 이거 무슨 상황이야?"
배고파서 식당에 왔더니 얼떨결에 앉혀져서는 뭔지도 모를 국물을 떠서 자신에게 먹으라고 하니 이것이 설마 책에서 본 음식에 독이 들어있는지 확인하는 뭐 그런 것인가 싶어 그녀는 괜히 더 당황하면서 국물을 가만히 바라봤다. 허나 냄새는 꽤 좋은 편이었다. 어라. 이거 생각보다 맛있나?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우선 오른쪽부터 차례대로 돼지, 닭, 어패류 국물을 조금씩 맛봤다. 진하기도 하고, 구수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맑은 맛이 각각 다 달랐다.
"와. 이거 무슨 국물이야? 제이슨. 뭐 만드는 중이야?"
호기심이 조금 강하게 들었는지 그녀는 제이슨을 바라보면서 무슨 요리를 만드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잠시 두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그에게 이야기했다.
"그도 그런데 갑자기 왠 요리야? 지금까지 만드는 모습 못 본 것 같은데. 아닌가? 미처 내가 못 본건가?"
그렇게 말하며 나는 앞치마에서 낡은 만화책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사이보그 전사 실버 봄버 17권"... 팬들이 말하길 "라멘 편". 작가가 미치광이가 되어 버린건지 한권을 통째로 라멘 관련으로 그려 버렸고, 그리고 그게 퀄리티가 아주 좋아서 왠지는 모르겠지만 인기가 많았던... 그런 마의 작품이다.
[이걸 보고 갑자기 땡겨서 해 본거야. 그리고, 난 자주 요리하는 편인데? 너 말야. 가끔 크림새우나 동파육 같은거 나오면 맛있게 먹잖아. 그거 내가 한거다만.]
그 말 대로, 식당에서 "이거 중국식이네" 싶은 음식이 나온 게 있었다면, 대부분은 내가 만든 것이었다. 우육면같은건 반응이 아주 좋았지. 평소엔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간 보기를 부탁하는 편이지만, 오늘은 혼자였으니까...
뭐 지금이라도 누가 와준게 다행인가. [그런데 무슨 일이야. 배고파서 밥먹으러 온거냐?] 대충 거칠게 머리를 만져주면서, 나는 국자로 냄비를 휘휘 저었다.
라멘. 아마 동양의 음식이었지? 그다지 먹어본 기억은 없었다. 그냥 지식 정도만 알고 있었지. 그도 어쩔 수 없지 않겠는가. 세븐스인 이상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아무래도 동양의 음식을 체험하기는 조금 힘든 법이었으니까. 아무튼 낡은 만화책을 제이슨이 보여주자 에스티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사이보그 전사 실버 봄버 17권을 가만히 바라봤다. 와. 나. 이거 아는데! 흥미가 가득한 표정으로 에스티아는 눈을 반짝였다.
"제이슨도 이거 좋아해?! 나도 이거 좋아하는데! 그러고 보니 여기서 아마 라멘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그랬지? 그래서 나도 라멘은 어떤 음식일까. 막 궁금하고 그랬는데!"
괜히 기분좋게 웃으면서 그녀는 두 손을 모아 환한 미소를 보였다. 그러다가 자주 요리를 한다는 말에 그녀는 와. 소리를 내면서 두 눈을 깜빡였다.
"동양류 음식을 자주 만드는구나. 제이슨은 동양에서 온 사람이야?"
여긴 아무래도 서양에 가까웠기에 동양에서 온 사람이 그렇게 흔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에델바이스에도 동양에서 온 이들이 좀 있긴 하지만. 그것도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온 이도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역시 조금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어 에스티아는 눈을 반짝였다. 아무튼 거칠게 자신의 머리를 만지자 그녀는 불평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다시 손으로 정리했다.
"머리카락은 함부로 건드는 거 금지야. 엉망이 되어버린단 말이야. 아무튼 배고파서 온 거긴 한데. 이 요리 얼마나 걸려?"
여기까지 왔으니 좀 더 먹는 것이 좋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에스티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답을 기다렸다.
아무 일 없이 가져갈 수는... 없었다. 마치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처럼 있었던 그는, 네가 주머니에 손을 대자마자 말을 걸어왔다. 과거라.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 거라는 약간의 소망이 좌절된 부분에 너는 조금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네 얼굴을 보는 대신 음료를 마셨고, 네 이름을 부르며 텅 빈 깡통을 주머니 옆에 올려놓았다.
"......전부, 보셨습니까?"
배신자라는 말은 이미 지난 번 임무에서 들었으리라, 그러나 그게 너라는 확실한 증거는 이것 뿐. 뭔가 심증을 굳게 붙잡은 듯한 그의 행동에 너는 너에게 향하는 시선을 마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