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나 대였는데, 결국 또 다시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나를 보며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수준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를 바라보고 있는 너를 보자면. 결국은 이렇게 될걸.. 알고 있었던걸지도 모른다. 너는 지금 나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아마,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까지 많이 이해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을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애매한 거리감이었기에 나는 너에게 끌렸을지도 모른다. 너도, 그랬으면 좋을거라고 생각하는 만큼.
"그럼 내 남자친구는 나한정 최고의 호구네~."
비교적 밝게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아직 목소리가 돌아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구태여 '남자친구'라는 부분에서는 힘을 줬다. 아까 말했던것처럼 지금 당장 결혼을 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나는 단순히 애인으로 안심하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이제 너 말고 누구랑도 안 사귈거니까 호구답게 책임지고 결혼해줘야해." 나는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미소지었다. 약속이 없으면 불안해하는 겁쟁이니까, 나는 너에게 약속이라는 이름의 보증을 원하는것이다. 그것이 속박이 된다고해도. 그렇기에 나는 다짐하고 있는 너의 찌푸러진 얼굴을 매만졌습니다. 응, 믿을게. 그렇게 말하듯이.
"너야말로 이제 반품은 불가능하니까. 후회해도 안 봐줄거야."
먼저 고백한것도 이쪽이지만 이렇게나 이기적인 소리가 있을까. 나는 작게 웃으며 농담아닌 농담을 마쳤다, 그리고 벽에 기대어 안는 너의 옆에 살포시 앉으며 미소지었고. 너의 감미로운 사랑고백을- 을-?
"읏-"
기껏해야 한두마디로 끝날거라 생각한것이. 생각 이상으로 길어지는 모양새에 나는 다시 얼굴을 붉힐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의 '그래서 사랑해. 존*, 하, 씨*. …많이.' 부분에서는 정말이지 얼굴이 터져나갈거 같았다. 어쩌지 나 이런게 취향이었던걸까? 화끈 화끈한 얼굴을 손부채질하고. 나는 부끄러움을 감추고자 너의 어깨에 부비적 거렸지만. 아마 그것도 잠시. 너의 시선과 말이 눈과 귀에 들어오자 나는.
"..........."
그제서야 다쳤던걸 생각해내고 정신이 그쪽에 닿았고. 그제서야 통증을 다시 느끼며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말았다. 사랑이 무섭다는게 이런걸까. 아까까지만 해도 하나도 안 아팠는데 긴장이 풀리자마자 이 모양이다.
라라 : 얘. 레레. 요전에 너희 팀원 둘이 같이 의무실 왔던데. 분위기가 되게 묘하더라. 레레 : 응? 누구? 무슨 분위기? 라라 : 그 키 크고 검은 머리 여성분이랑 얼굴에 흉터 있는 긴 머리 남자분인데. 연인 같은? 그런 분위기였어. 레레 : 흐응. (히죽) 그렇구나아. 그으렇구나아.
임무에서 돌아오고 벌써 시간이 꽤 지났다. 그때 입은 부상도 거의 다 나았고... 그러니까 지금은 평소 일상으로 돌아오면 된다, 그런 이야기다. 그렇지만 너는 평소와 같은 일상에, 작은 비일상을 한 스푼 얹은 채로 있었다. 지난 번에 배신자라고 불렸던 걸 떠올리면, 아마 다른 사람들이 너에 대해서 어느정도는 짐작을 하고 있으리라. 그럼 한 명 한 명 만나서 직접 이야기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물론 가디언즈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어떤 일이 생길지는 알 수 없었기에 신중해야 할 문제기는 했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휴게실에 앉아, 아이스티를 한 잔 마시며 너는 네 소지품을 정리했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 서로 부딪혀 짤랑이는 소리를 내는 군번줄이려나. 네 과거를 이보다 정확하게 드러내는 게 어디 있을까. 군번줄을 보고 있노라면 지난번에 살짝 보았던 다른 군번줄도 생각하게 된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면 마냥 이게 물증이 되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우려나. 어쨌든 너는 찰랑이는 군번줄을 고이 접어 헝겊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뿐만 아니라 가디언즈임을 증명해 줬던 신분증. 너를 수배했던 전단 등을 헝겊 주머니에 집어넣은 뒤에, 텅 빈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걸 어디다가 두면 좋을까, 역시 몸에 지니는 게 제일이려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휴게실 문을 열어 복도로 나선다, 곰곰히 생각하며 걷는 너는 정작 숨길까 말까 고민하던 것을 두고 나온 것도 까맣게 잊었더랬다. 그런 와중 누군가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인사는 했을 것이다. 무의식간이었겠지만.
라며 내가 새벽에 주방에 들어간지도 8시간 정도, 냄비 3개에 보글보글 끓고 있는 육수를 보면서 나는 고민하고 있었다... [맛을 모르겠어.] 왜 이런걸 생각 못 한걸까... 개조된 후로, 나는 딱히 냄새를 맡을수도 맛을 볼 수도 없는 모습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라멘은 향이랑 맛이 중요한 음식... 지금까지 요리한 경험으로 봤을 때, 최대한 보통 사람 기준에서 맛있도록 만들긴 했지만...
[애초에 만화만 보고 만드는게 잘못이었나?]
머리를 긁적긁적거리며, 앞치마에 넣어뒀던 만화책을 꺼냈다. "사이보그 전사 실버 봄버". 내가 가장 아끼는 작품... 여기에 왠지는 모르겠지만 한 권을 통째로 쓰는 라멘 에피소드가 있었다. 엄청 상세한 내용 덕분에 보고 바로 라멘 만들기를 시도해도 좋을 정도로... 지금 팬들 사이에선 작가가 좀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그린게 아니냔 말도 있었다.
그래도 이거 덕분에 저번에 한정으로 나온 라멘 요리사 실버 봄버 피규어도 살 수 있었으니까 뭐. 끓어대는 냄비를 휘휘 젓다가 조금 먹어본다. 역시 아무 맛도 안 나는데... 오히려 내가 맛이 나면 안 좋은거니까 괜찮나? 누구 한명 잡아다 먹여볼까?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머엉- 하게, 호수를 바라보면서, 저 수면처럼 잔잔한 아스텔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머릿속은 복잡다망하나 귀로 들어오는 소리를 차곡차곡 정리해 놓을 틈은 있더란다. 한마디 한마디 들어오는 말을 곱씹으며 다시금 생각을 정리해본다.
복수. 과거 레레시아의 복수심은 그저 폭력적이었고 무차별적이었다. 이 세상이 저주스러웠고 어머니를 죽인 그들과 누명을 씌운 그들과 아무튼 모든게 원망스러웠다. 원망스럽고 원망스러워 피를 끓게 하는 그 감정에 몸을 내던지고 싶었다. 살점 하나에서 뼈 한조각까지 전부 분노의 불길에 불살라버리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 했다. 어머니는 구하지 못 했어도, 남은 가족이 있었으니까. 분노로 눈이 붉어진 그녀에게 매달리던 라라시아를 떨쳐내기엔 미안함과 죄책감이 그러지 못 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녀가 없었다면 어쩌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않았을까. 과연.
"...우리는 영웅이 아니라..."
아스텔의 얘기 중 나온 그 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우리는 영웅이 아니다. 영웅도 아닌데 복수심을 갖는게 잘못인가. 그렇게 묻는다면 단박에 대답할 수 있다. 아니. 당한 것이 있으니 돌려주는 건 당연한거다. 복수심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것을 향할 대상을 똑바로 보는 것이 중요하지.
"오."
미끼도 걸지 않은 낚시바늘에 물고기가 걸려오자 레레시아도 가까이 가서 물고기를 보았다. 헤. 못 생겼어. 주둥이를 뻐끔대는 물고기를 보며 중얼거리고 그가 물고기를 호수로 돌려보내는 것도 지켜본다. 그렇게 가까이 온 김에 옆에 자리를 잡는다. 한결 착잡함이 가신 눈동자가 엷은 파문이 번지는 호수를 바라본다.
"네 얘기를 들으니까 조금은 정리가 되네. 음. 옛날이라면 그냥 다 없애고 싶어했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렇지만 아예 복수를 포기하고 싶지도 않고. 마침 대상은 확실하니 그 쪽으로 향하면 되겠지. 에델바이스의 방침이라면 어긋날 일도 없을거야. 당장은 그 정도로만 생각해야겠다. 응. 이렇게 간단한 걸 괜히 며칠이나 시간 버렸어."
시간낭비 오지게 했네- 자조적이던 좀 전과는 달리 개운한 목소리였다. 반듯하게 앉아서 호수를 구경하던 그녀는 고개를 돌려 아스텔을 보았다. 노란 눈이 깜빡깜빡하더니 그런 질문을 던졌다.
오늘따라 왜 이리 배가 고픈 것인지. 에스티아는 투정 부리는 목소리를 내면서 식당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근데 이건 또 무슨 냄새인건지. 뭔가 맛있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에스티아는 괜히 냄새를 맡으면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주방에서 뭔가를 만들고 있는 것일까 싶어 에스티아는 이내 호기심을 가지고 주방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늘 밥을 만드는 이가 오늘은 또 뭘 만들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주방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순간...
"......"
순간적으로 에스티아는 문을 다시 쿵 닫았다. 자신은 지금 뭘 본 것일까. 상의를 벗고 있고 앞치마를 하고 있는 제이슨을 본 것 같은데. 내가 너무 피곤한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에스티아는 두 눈을 조용히 비볐다. 응. 그래. 내가 잘못 본 것이 분명해. 그렇게 생각하며 에스티아는 다시 조심스럽게 주방의 문을 열고 그 안을 바라봤다.
"....."
다시 한 번 순간적으로 에스티아는 문을 쿵 닫았다. 뭔가를, 뭔가를 잘못 본 것인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진짜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은 뭘 해야 좋을까. 침을 꿀꺽 삼키면서 에스티아는 침착하게 주방의 밖으로 나서려고 했다. 물론 잡으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네가 뭔가 잊고 있다는 걸 깨닫는 데까지는 그렇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숨길 만한 장소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숨길 물건이 없다는 사실, 너는 식은땀이 흐르는 듯,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에 시선이 마구 흔들린다. 어디에 떨어트렸지? 누군가 찾았을까? 뒤져보지는 않았으려나? 주인을 찾아주려면 안에 담긴 걸 확인하고자 하겠지? 이건... 큰일이 난 건 아닐까? 너는 급하게 몸을 돌려 네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복도 이곳저곳을 눈으로 훑으며 헝겊 주머니를 찾지만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 있는 거지? 그렇게 걸어 걸어 도착한 곳은 휴게실, 여기에마저 없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속이 쓰렸다.
"......"
천천히 문을 여니, 다행스럽게도 헝겊 주머니는 탁자 위에 올라가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소파에 앉은 레이먼드와 눈이 마주치자 너는 순간적으로 숨을 참았다. ...본 건가? 너는 침착하게 휴게실 안으로 들어가, 헝겊 주머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대로 그만 가지고 나가자. 괜한 말은 하지 말고.
그녀의 말에 아스텔은 그렇게 짧게 대꾸했다. 에델바이스의 방침에 어긋날 일도 없고 충돌할 일도 없다. 복수를 포기하지 않되 대상은 확실하게 할 것이다. 몇 번을 곱씹어도 에델바이스의 방침과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누군가는 좀 더 영웅적인 뭔가를 바랄지도 모르나 이 에델바이스를 만든 로벨리아는 자신들은 영웅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아스텔은 그 말의 의미를 대충은 알고 있었다. 자신들은 역사에 기록될 일도 없고 금전적인 뭔가를 바라고 이런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에델바이스 멤버 중에는 그런 것을 바라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나 그 누구도 그것을 보장해줄 수 없었다. 그저 세븐스의 권리와 자유를 찾기 위한 집단. 단지 그 뿐인 집단이었고 엄연히 세상을 뒤집어 엎어버리려고 하며 U.P.G를 엎어버리려고 하는 집단이었다. 말이 좋아 레지스탕스지. 누군가의 눈엔 테러리스트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다면 좀 더 복수심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일이라고 아스텔은 생각했다. 물론 레레시아가 어떻게 생각할진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이내 아스텔은 다시 한 번 낚시줄을 호수로 힘껏 던졌다. 퐁당. 또 다시 찌가 물 속에 가라앉는 것을 확인한 후, 아스텔은 조금 더 낚시바늘을 호수 깊은 곳으로 살며시 밀어넣은 후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내 들려오는 물음.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느꼈으나 낚시를 하고 있기도 했기에 시선을 다른 곳에 주진 못하며 아스텔은 입을 열었다.
"...묻지 말라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없다면 말이야. ...도저히 물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라면 나도 굳이 묻진 않지만."
어쨌건 너무나 심각하고 위험해보이는 분위기가 아니면 어지간하면 묻는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아스텔은 반대편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이어 그는 눈동자만 살짝 옆으로 돌려 레레시아를 바라보면서 되물었다.
"...이상해? ...적어도 내 기준에선 교류를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만. ...뭐랄까. 이런 것은 서툴러. ...삶이 삶이라 딱히 동료라던가 그런 것을 깊게 가져본 적이 없다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