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밝네요. 밝은 하늘은 조금 낯선 느낌이었습니다. 아마도 저건 구전으로 전해져오는 광명시대를 인공적으로 구현해낸 거라고 생각됩니다만... 생각보다 신화스러운 느낌은 그다지 없었지만 로라시아에서 제국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가늠할 수 있는 지표였습니다. 이런 거대한 빛은 저희 땅에나 더 필요한 것 같은데요. 광장 지구에는 도착했지만 이래선 그저 넓기만 한 공터네요. 이런 곳에서 사냥꾼들이 모이고 있다는 건지요. 눈에 띄는 사냥꾼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들 제국의 평화로움을 만끽하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 같아보여요. 조금 더 수소문을 해보는게 좋겠지만... 솔직히, 여기까지 오는 건 너무나 먼 길이어서 지쳤습니다. 다행히 이곳에 벤치는 많네요. 조금 앉아서 생각을 정리해보는게 좋겠어요.
"에구구..."
...음, 저도 모르게 할머니 같은 소리를 내고 말았군요. 벤치에 앉아 주변을 살펴봅니다. 그야말로 '도시'라는 풍경이 눈에 하나씩 들어오네요. 지금까지는 왠지 간과하고 있었지만, 그제야 제가 타국의 큰 도시에 와있다는 느낌을 실감했습니다.
'저는 정말 멀리왔군요...'
고향의 사람들은 잘 하고있을까요. 그리고 저는 좋은 소식을 찾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그때까지 고향이 멀쩡했으면 좋겠습니다만... ...아니,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죠. 지금은 광증의 치료법을 찾는 것에만 집중하고 나아갑니다. 저는 그러기 위해서 온 거니까요. 조금은 긴장을 풀고, 허문 자세로 하늘을 올려다 봅니다. 빛이 있는 하늘이라. 묘한 하늘이었습니다.
엘레나는 벤치에 앉아서 잠시 휴식을 취합니다. 어렴풋이 떠있는 달의 형태를 보아하니 9시도 되지 않은 시간입니다. 그렇지만 벌써부터 피곤한 느낌입니다. 오래도록 걸어서 그런 걸까요. 그때 엘레나는 문득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낍니다. 누군가 휘파람을 불며 엘레나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 휘파람소리의 주인은 건장한 체격의 사내였습니다. 사내와 비견될 정도로 빼빼 말라붙은 남자 셋도 그 뒤에 붙어 따라오고 있습니다. 이윽고 엘레나의 앞에 뚝 멈춰선 사내가 음흉하게 웃습니다. 뒤의 마른 남자들도 입꼬리를 슬며시 올립니다.
"이봐, 이쁜 아가씨. 혼자야? 우리랑 같이 놀래?"
듣기만 해도 인상 찌푸려지는 발언입니다. 질 나쁜 남자들이 흔히 던지는 추파로군요. 그러다 마른 남자들 중 한 명이, 엘레나가 찬 핸드 캐논을 보고서 코웃음칩니다. 그가 꺼낸 말은 더욱 가관이었습니다.
"어이구야, 엄청 무서운 걸 갖고 계시네. 근데 그 총, 아가씨 거 맞아? 쏘는 법은 알아?"
그 말에 일행 모두가 웃음을 터트립니다. 아예 비웃음거리가 되어버린 모양입니다. 수도에는 이런 사람들이 버젓이 돌아다니는 건가요. 주변 행인들도 엘레나가 처한 상황에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이렇게 평화로운 곳에 가만히 앉아있으니 저도 조금은 온화하게 보였나봅니다. 척봐도 질 나쁜 남자들이 제쪽을 향해 다가왔습니다. 이런 싸구려 악당들이 활동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 아닌가요? 한숨이 나오는군요. 그런데 한 편으로는 조금 신선한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동쪽 대륙에서는 아무도 저를 이렇게 대하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이게 대도시라는 걸까요. 그러나 아쉽게도 저라는 사람은 이런 걸 경고 정도로 넘어갈만큼 무르지 않아요.
"이 물건에 흥미가 있습니까?"
홀스터에 꽂혀져 있던 핸드 캐논을 순식간에 뽑아들어 손아귀에 쥐었습니다. 그들은 움찔거릴 시간도 없었을 겁니다. 퀵드로우는 심문관의 기본 소양 중에도 기본이에요. 보통 이걸 뽑아든 시점에서 위험을 느끼고 도망치는게 상식적인 인간일 테지만... 이 무지한 사람들이 그럴리는 만무하죠. 뭐, 와중에도 저는 다행히 상식인이기 때문에, 몽매한 사람에게 함부로 총부리를 겨누거나 하는 결례를 범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댁이 한 번 가르쳐주시죠. 쏘는 법."
핸드 캐논을 반 바퀴 돌려 손잡이가 무뢰배를 향하도록 기꺼이 건네어줍니다. 예에, 저는 자신있습니다. 이건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권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사람은 제대로 드는 것 조차도 할 수 없죠. 제가 이 물건을 처음 만졌을 때가 떠오릅니다. 힘이 들어간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단 한 발조차 격발하기도 힘든 방아쇠 압. 그리고 운 좋게 쐈다고 하더라도 그 뒤를 따르는 자학에 가까운 수준의 반동. 그 순간 저는 이것이 순수하게 인간이 아닌 것들을 상대하고 처단하기만을 위해 만들어진 '손대포'라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저희의 땅에는 이와 비슷한 도구, 그리고 이를 이용한 고유무술이 여러 갈래로 전해져 내려올 정도로 전통적인 문화로서 형성 되어있죠. 단순히 총이라는 말로는 형용 할 수 없는 겁니다. 특히나 심문관의 이것은 좀 더 제대로 숙지시키지 못하면 전혀 다룰 수 없는 그런 무구에요. 이 핸드 캐논은 그런 물건이었습니다.
"귀가 먹었습니까? 받으세요."
로라시아와 동 대륙은 여태까지 교류라는게 전혀 없었습니다. 이 참에 문화교류를 확실히 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저는 손의 핸드 캐논을 가볍게 흔들면서 도발하는 목소리로 재촉했습니다.
사내는 여전히 핸드 캐논을 양 손으로 쥐고 흔들어댑니다. 하지만 아예 레이피어가 목 아래에 들어오자 잠깐 동안은 놀란 표정이 됩니다.
"어이쿠, 아예 그냥 찔러버리시게?"
하지만 곧 사내는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옵니다. 이죽대며 깝치는 게 영 꼴불견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도시 한복판에서 사람을 찌를 배짱은 없다고 생각하는 거겠지요. 하지만 저쪽이 시비를 먼저 걸었으니 찔러도 정당방위가 아닐까요? 뒤의 남자들도 사내와 같은 생각인지 킬킬대며 비웃습니다. 한술 더 떠 사내는 "그렇게 나오니까 더 마음에 드는데? 난 아가씨 같은 여자가 싫진 않거든." 라며 저질스런 추파를 날리기까지 합니다.
이 사람들, 뻔뻔하기 짝이 없군요. 이대로 남자의 목을 찔러도 되겠지만 이런 번영한 도시 한복판을 피로 더럽히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 막 방문했을뿐인 제 평판도 떨어질 뿐더러 그걸 청소하는 사람들은 무슨 죄일까요. 무엇보다 제 레이피어를 그렇게 쉽게 더럽힐 수는 없죠.
"―그래요.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하지만 레이피어에는 찌르는 검술만 있는 건 아니랍니다. 그것도 모르고 있었겠죠? 칼 끝을 내려서 거두는 시늉을 하다가 갑작스럽게 주먹으로 이 '대장'의 턱을 후려갈깁니다. 제 주먹을 감싸는 레이피어의 사이드 링과 핸드가드는 야수의 공격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해서 말이에요. 사람이 맞으면 기절하지 않을까요?
"저 사실은 이방인이라서 말이죠. 본디 동쪽 대륙에서 야수와 이단을 사냥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도시는 제가 지내던 곳과는 다르게 엄청나게 크고 넓더군요. 네, 이곳 지리를 빠삭하게 아는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자칫 길을 잃어버릴 정도로 말이에요."
의식이 흐릿할 남자에게서 핸드 캐논을 집어 손으로 도로 가져왔습니다. 잠깐이라고는 해도 이런 무식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만들다니. 제 파트너에게 안 될 짓을 했군요. 나중에 꼼꼼히 닦아주어야겠어요.
"잠시 도시 신사분들께 길 좀 묻도록하죠."
물론, 한 번 시작한 일은 끝내고 나서 말이에요. 돌아서서 자세를 잡는 즉시 주변의 잔당들에게 레이피어와 핸드 캐논을 휘두릅니다. 물론 멀쩡한 사람을 상대로 베거나 쏘지는 않아요. 단지, 이 물건들에게 직접 가격 당하거나 얕게 찔리는 정도로도 죽는게 낫겠다 생각이 들만큼 아프겠죠. 그게 바로 제가 원하는 겁니다. 후회하게 해주겠어요. 레이피어를 움직여 남자들의 어깨를 찔러 경직시키고, 만들어진 틈으로 안쪽으로 파고들어서 핸드 캐논으로는 복부를 깊게 때려넣습니다.
엘레나의 주먹을 얻어맞은 사내는 그대로 엎어져서 기절했습니다. 갑작스런 사태에 뒤의 남자들도 깜짝 놀란 듯 합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엘레나에게 대항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실컷 두들겨맞은 남자들이 멍투성이가 된 몸으로 현장을 떠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들 모두는 하나같이 겁에 질린 채로 떠나갔습니다. 엘레나를 괴물 보듯이 하며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잠깐의 소란 탓에 몇몇 행인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네요. 한편 남자들이 도망치듯 돌아간 길에는 기사 한 명이 서있었습니다. 한쪽 눈에 안대를 한 남성입니다. 저 기사도 방금의 소요를 목격한 걸까요? 그는 천천히 엘레나에게로 걸어와 입을 엽니다.
"불량배들을 직접 혼내주다니 배짱 한 번 대단하군. 사냥꾼인가?"
기사의 표정은 무심했으나 상대를 나무라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사내를 흘깃 쏘아봅니다.
얻어맞은 잔당들이 저를 야수라도 보는 눈을 하며 등을 보이고 도망칩니다. 몇 번 팔을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말이에요. 이래서는 오히려 제쪽이 부족하다고 느낄 정도네요. 방금 그 치들을 쓰러트려서 길을 좀 물으려고 했는데 하나는 기절에 나머지는 도망이라. 뭐, 아무튼 소동은 정리 됐습니다. 그거면 된 거 아닐까요?
"후우."
무기를 거두고 숨을 내뱉고 있자 저 편에서는 기사가 다가옵니다. 이런, 설마 다 보고 있던 걸까요. 방금 소동 때문에 저에게 책임을 물으려고 하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물론 지금의 행위에 대해서는 부끄러움 없이 당당한 태도였습니다만, 기사분이 제게 하는 말은 전혀 다른 의도의 것이었습니다.
"혼내주다니요. 그들이 저와 놀고싶어하는 눈치인 것 같아 놀아줬을 뿐입니다. 하지만 먼저 뻗어버리다니, 이 도시 남자들은 전부 이 모양인가요."
날카롭게 뜬 눈으로 기절한 불량배를 내려다보며 말했습니다. 단지 이 남자뿐만이 아닙니다. 방금의 주점이나 연인을 잃고 오열하는 여자. 그리고 그 모든 걸 방관하는 시민들. 어쩐지 도시의 좋은 면보다는 나쁜 면을 더 많이 보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새삼스럽진 않아요. 어둠을 틈타 이상한 마음을 먹는 자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니까요. 그것을 위해 기사나 심문관 같은 이들이 있는 것이죠.
"저는 동쪽 대륙의 심문관, 아지무 엘레나입니다."
기사분께 저의 신분에 대해 제대로 소개했습니다. 이런 불경한 깡패들이 아니기 때문이죠. 밤바다를 밝히고 등대를 지키는 고결한 심문관입니다.
기사는 짧게 대답합니다. "키옌엔 워낙 다양한 인간들이 많아서 말이지." 뒤이은 엘레나의 의문에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답합니다. 그러다 엘레나가 자기 신분을 밝히자, 그도 적잖이 놀란 듯 눈썹을 치켜올립니다. 교류가 단절된 동대륙에서 온 사람을 본다면 누구라도 놀랄 겁니다.
"동쪽 대륙? 이거 참 귀한 손님이 오셨구만."
그가 턱을 매만지며 고민에 빠집니다. 무엇을 생각하는 걸까요? 그러다가도 금세 손을 내립니다.
"반갑네, 엘레나 경. 제국 기사단의 제1기사단장 레너드 드윈이라고 한다."
곧 기사도 제 소개를 합니다. 기사단이라면 지금까지 보아왔던 기사들이 모인 단체인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 중년 남자는 자신을 그 기사단 중 하나의 수장이라 소개했고요.
네, 맞아요. 저는 귀한 손님입니다. 하지만 어떨 때는 단지 아무 것도 모르는 이방인일 뿐이죠. 그래도 이쪽의 기사분은 제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아주시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하물며 이 분은 한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기사단장님이셨던 모양입니다. 좋아요. 이제야 조금 어깨를 펴고 대화를 나눌 수 있겠어요. 그렇다고 언제는 주눅이 들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뭐, 여태까지 너무 다사다난 했잖아요. 그렇지 않은가요?
"저희 심문관은 바다에서 올라오는 수생 야수를 상대하고, 광증을 앓는 이단을 사전에 파악하고 처단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사냥꾼과는 조금 다릅니다. 저희는 더 위험하고 본격적인 위협과 맞서며 주민들의 안전에 힘쓰고 있죠. 무엇보다도 가장 음울한 바다 속에서도 빛을 비출 수 있는 꺾이지 않는 영혼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등대지기라고도 불리죠."
이야기를 늘어놓고 보니 조금 길어졌네요. 하지만 심문관의 고결하고 숭고한 목적을 전달하려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사냥꾼들보다 조금 더 상위에 있는 자경단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자경단이라는 말로는 전부 설명이 되지 않을테니까요.
"그럼 바로 실례하겠습니다만 레너드 단장님, 혹시 밤사냥단에 대해서 알고계신 것이 있습니까? 저는 그들과 접촉해보고 싶은데요."
그나저나 여기서 기사단장님을 만난 건 행운이네요. 어쩌면 방금 일어났던 소동도 아예 쓸모가 없던 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장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도시에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정보를 알고 있을테니까요.
단장님의 손을 따라 시선을 향해봅니다. 저 은행의 뒷편인가요. 아무래도 주점의 주인이 괜한 거짓말을 한 것 같지는 않군요. 흥, 아주 심술궂은 사람은 아닌 모양이죠? 단장님께 감사를 표하고는 걸음을 마저 움직이려 했습니다만, 역시 물어오는군요. 떳떳하지 못한 이유는 아니라 밝히지 못할 것은 없지만...
"제 고향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단서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서 만나보려고 합니다. 사냥을 하는 이들이라면 마음 통하는 곳이 있지 않을까 해서요."
역시 광증에 약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나서는 그대로 말하기는 조금 꺼려지는 것이었습니다. 저야 아무것도 모르고 로라시아 대륙에 왔지만, 이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상식처럼 여겨지고 있을테니까요.
"...주민들의 고통을 제가 풀어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동대륙에서부터 배를 타고 온 이유를 되새기며 꾸욱 쥐어보인 주먹을 가슴에 가져갔습니다. 그래요, 하지 않으면 안 되는겁니다. 이 앞길이 허무로 가득하다고 하더라도 저는 그만둘 수 없어요. 그것이 저의 사명이라는 것이겠죠.
엘레나의 말이 끝난 뒤에도 레너드는 침묵을 유지합니다. 그가 건넨 말은 짧았습니다. "경건한 마음가짐이군. 꼭 일이 좋게 해결되길 바라지." 그리고선 고개를 끄덕여보입니다.
"그럼, 잘 가시게. 행운을 빌겠네."
레너드는 그렇게 인사하곤 걸음을 옮겨 멀어집니다. 그의 안내를 되새기며 은행 옆 골목으로 향하면, 2층짜리 건물들이 수없이 늘어진 풍경이 보입니다. 또 골목이라곤 해도 길이 넓고 밝아 음침한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 건물들 사이에는 유난히 수수한 양식의 건물이 있었습니다. 다른 건물들과 비교해 1.5배 정도는 더 커보이기도 합니다. 건물 앞의 작은 표지판에는 달과 밤을 형상화한 심볼과 함께 '밤사냥단'이라는 글귀가 쓰여있습니다. 제대로 찾아온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엘레나가 문을 두드리자 약간의 정적 이후 문이 스르륵 열립니다. 헌데 문을 열어준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문이 열린 것처럼요. 이 또한 마법일까요? 건물 내부는 무척 넓었습니다. 내부 인테리어는 겉모습과 마찬가지로 수수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어째선지 우아하고도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홀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양쪽 끝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난간 너머로 2층 복도가 보입니다. 홀 중앙에 긴 소파와 낮은 테이블이 놓여있습니다. 그리고 그 소파에는, 긴 금발 남성이 앉아있었습니다. 테이블에 작은 찻잔을 올려놓은 걸 보면 티타임을 즐기던 중이었나요. 그가 엘레나를 보고선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녀를 맞이하듯 기품있는 인사를 해보입니다.
문을 노크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처음 생각했던대로 밀고 들어가려 했습니다만, 공교롭게도 문이 열리는군요. 혼자서 스스로 말이에요. 흐음, 제국의 기술인걸까요? 마법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저는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안으로 들어가니 사냥단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저희 고향은 상황이 별로 좋지 않기 때문에 거점을 꾸미거나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인테리어와... 금발의 남성인가요.
"그냥 사냥꾼이 아닙니다. 심문관이에요."
버릇처럼 남자의 말을 수정했습니다. 이 남자도 심문관에 대해 알 리가 없겠지만 말이죠. 하지만 제게는 일종의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남성의 두 눈에 의아한 기색이 떠오릅니다. 그렇지만 부러 캐묻지 않고 엘레나의 다음 말에 대답합니다.
"예, 이곳이 밤사냥단입니다. 헌데 긴히 할 이야기라?"
남성이 문득 시선을 옮겨 엘레나를 꼼꼼히 뜯어봅니다. 노골적이진 않지만 약간의 경계심이 서려있습니다. 마치 취조당하는 기분입니다. 잠깐의 짧은 시간 이후, 남성은 엘레나의 말이 거짓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그제서야 다시 미소를 머금습니다.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남성은 엘레나를 이끌고 홀의 뒷문으로 걸어갑니다. 방금 엘레나가 들어왔던 정문과 비슷하게 생긴 문입니다. 그가 조심스레 문을 열어젖힙니다. 그 너머로, 막다른 골목에 마련된 넓은 공터가 나타납니다. 여러 개의 짚단 인형들이 세워져 있고, 가장자리에는 작은 벤치들이 몇 개 놓여있습니다. 보아하니 훈련장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듯한 소녀와 그녀를 지켜보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소녀는 날이 뭉툭한 소드스피어로 짚단 인형을 열심히 두들겨패는 중이었고요. 남성은 엘레나를 멈춰세우곤 먼저 여성에게 가 말을 전했습니다.
"누님, 누님에게 드릴 말씀이 있다는 손님이 오셨습니다." "흠, 그래? 저 여자인가?" 여성이 엘레나를 흘깃 쳐다봅니다. "예. 사냥꾼처럼 보이는데, 스스로는 심문관이라 소개하셨습니다." "알았다. 멜리아나, 훈련은 잠시 멈추도록." 그 말에 소녀가 힘찬 대답을 하며 행동을 멈춥니다.
짧은 대화를 끝낸 이후, 여성은 엘레나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옵니다. 누님이라는 호칭이 괜한 말은 아닌지 저 금발 남성과 꽤 닮은 외모입니다. 반면 곱상한 외모의 동생과 달리 상당히 호쾌해보이네요.
저를 살피는 눈빛에 경계심이 어려있군요. 의외라고 생각되지는 않아요. 제가 생각하기에도 다소 생뚱맞은 방문이었으니까요. 생전 처음 보는 무기를 찬 여자가 들이닥쳐서는 심문관이라 소개하며 단장을 찾는 모습이란. 하지만 지금의 제 상황은 그정도로 급한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이 남자가 막으면... 그건 그때가서 생각해보는 수 밖에요. 그러나 그가 저를 막는 일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미소로 안내해주네요. 저는 분명 쫓겨날 각오까지도 하고 이야기를 꺼냈습니다만. 흠, 이게 대도시의 여유라는 걸까요. 아니면 밤사냥단이라는 이 모임은 제 생각보다 더 규모가 큰 걸지도 모르겠네요. 저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겠죠. 조금 더 금발 남성을 따라가니 뒷편의 넓은 공터에 올 수 있었습니다. 이 특유의 풋풋하고 치열한 풍경. 저는 이곳이 사냥단의 훈련장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미 훈련이 진행중인 모양이었지만요. 저는 바로 그곳에서 이곳의 단장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밤사냥단의 단장은- 의외로 여성분이시군요. 조금은 의외였어요. 그녀는 크롬웰이라는 이름으로, 한 눈에 보기에도 억센 기개가 느껴지는 분이셨습니다. 이제는 제 소개를 해야겠죠. 저도 지지않도록 몸가짐을 다시 잡고는 단장의 눈을 마주쳤습니다. 지금의 저는 어떻게보면 저희 등대지기들의 대표, 또는 외교관이라고도 할 수 있을테니까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어제 막 바다를 건너 온 동쪽 대륙의 심문관, 아지무 엘레나라고 합니다. 편하게 엘레나라고 불러주시길."
어떤가요. 이정도면 꽤 간결하고 단호한 자기소개였겠죠? 심문관의 고결한 영혼이 잘 전달 되었을까요? 아무튼 그건 그렇다치고, 제가 여기에 온 이유를 슬슬 말해야 할 차례입니다.
"제가 이렇게 찾아 온 용건은―"
저는 잠깐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망설여져서 뜸을 들였습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말이에요. 어차피 이곳말고는 달리 갈 곳도 없잖아요. 스스로 찾고있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이든 간에요. 안 그런가요? 그러니, 여기서는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도록 합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는, 고개를 추켜 올려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카산드라가 가볍게 웃습니다. 그것도 잠시, 이어진 엘레나의 말엔 웃음기를 거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광증의... 해결책?"
그 말에 카산드라는 적잖이 놀란 눈치입니다. 저 뒤에서 카산드라를 지켜보던 남성도, 소녀도 역시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합니다. 이곳은 일찍이 광증 치료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이젠 학자들마저도 광증 연구에서 하나둘 등을 돌리기 시작한 로라시아 대륙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엘레나의 말이 얼마나 생뚱맞게 다가오는진 이들의 표정만 보아도 명백했습니다.
"광증에 치료법 따위가 없다는 건 알고 있는 건가?"
카산드라가 재차 확인하듯 묻습니다. 물론 엘레나는 진작에 들어 알고 있지만 카산드라는 그걸 알 턱이 없습니다. 그저 타지의 이방인이 뭣도 모르고 나불대는 거라고밖에 생각할 수밖에요.
역시 이런 반응인가요. 하긴,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광증을 일찍이 포기한 도시 사람이라는, 반대 입장이었다면 말이에요. 그만큼 저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겠죠.
"네,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꽤 최근 일이죠. 제가 항구도시에 도착하자마자 듣게 된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으니까요."
당시의 충격을 생각하니 무력감이 다시금 덮쳐오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가, 저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이미 마음을 먹은 일이니까요. 저는 다시 이곳의 단장님께 말씀을 올렸습니다. 이번엔 꽤 강하게요.
"그래서 일부러 수도까지 찾아와 도움을 요청드리는 겁니다. 사냥꾼이라면 광증과 심연에서 눈을 돌릴 수 없는 법이니까요. 광증에 대해 알고계신 단서를 제게 알려주세요. 뭐라도 좋습니다. 완벽한 치료가 아니더라도 좋아요. 아주 실낱같은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들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의지를 가다듬은 눈으로 단장을 바라봤습니다. 이들이 보기에는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보였을까요. 크게 다르지는 않을지도 모릅니다. 단지 제가 가려는 곳은 한 없이 어둠이었을 뿐이죠.
"그건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뻔한 이야기를 듣자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에요!"
저도 모르게 이를 갈면서 큰 목소리를 내고 말았습니다. 이래서는 방금 그 몰상식한 깡패들이랑 다를게 없을텐데 말이에요. 그만큼 제가 절박하다는 뜻이겠죠. 하지만 불안했습니다. 이곳마저 아는 게 없다면 어떻게 해야하나- 하는 불안이, 현실이 되어 보여지고 있었으니까요.
"...언성을 높혀서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찾아야만 해요."
그래도 냉정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이사람들을 다그치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에요. 저는 빠르게 방금 폐를 끼쳤던 사실을 사과했습니다. 아무래도 도시의 큰 사냥단이라고 심연에 대한 대책을 따로 마련하고 있는 건 아닌 모양이죠.
"좋습니다. 그렇다면 광증에 관련하여 아직도 연구하고 있는 단체나 사람을 알고 있다면 알려주세요. 소란 피우는 건 그곳에 가서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벌써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이와같은 상황이 몇 번이나, 얼마나 벌어져도 빈 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제가 배를 탄 순간부터 정해진 숙명입니다. 지금의 제 눈은 조금 날카로운 모양새가 되었을까요. 그런 눈으로 왜인지 고민하고 있는듯한 단장의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카산드라가 눈을 슬며시 감으며 사과의 말을 전합니다. 그녀에게도 먼 곳에서 찾아온 손님을 그냥 돌려보내야하는 것이 꽤 달갑지 않겠지요.
"황실 소속의 의사가 광증을 연구하고 있긴 하지만, 황궁이라는 게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니 말이야."
곧 엘레나의 질문에도 답을 내놓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대답입니다.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라니요. "나조차도 초대를 받아야 출입할 수 있는 곳이 황궁이다." 그녀가 몇 마디를 덧붙입니다. 제국의 황궁이란 곳은, 이름을 날리는 사냥단의 단장이라고 해도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닌 모양입니다.
불러세우는 목소리에 나아가던 발걸음을 멈칫 했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가려고 하는 곳은 이 제국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황궁. 분명 쉽게 들여 보내주지는 않겠죠. 그런데...
'황녀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요.'
몸을 도로 돌리고는 훈련장의 그들을 바라봅니다. 무기를 휘두르던 소녀. 어째서 황녀가 이런 곳에서 무기를 연습하고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멜리아나. 아니, 황녀님. 부탁드리겠습니다."
찬 물 더운 물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죠. 오히려 지금 상황은 말하자면 찬 물에 얼음을 띄운 것과 같아요! 그 정도로 운이 좋은 상황입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죠. 저는 걸음을 성큼성큼 옮겨서 자신을 황녀라고 소개한 소녀 앞으로 냉큼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왜 그랬을까요.
"이 저를, 아지무 엘레나를 반드시 황궁 안으로 들여 보내주세요!"
무릎을 굽혀 앉아 손을 맞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황녀라는 사람과 눈까지 마주치려고 하면서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