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도 엘레나의 말이 농담인 걸 아는지, 마찬가지로 가벼운 대답으로 응수합니다. 금세 기운을 되찾은 모습입니다.
"어머나, 그런 숭고한 뜻을 가지고 계셨다니."
그 말에 여성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손을 맞대어 가벼운 박수소리도 한 번 냅니다. 순수한 놀라움의 의미입니다. 약간의 존경도 담아서요. 다수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홀로 여행길에 오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 말입니다.
"엘레나 양의 원정을 진심으로 응원할게요."
그녀가 그리 말하며 웃습니다. 엘레나가 닭을 전부 해치웠을 무렵, 딱 알맞은 타이밍에 남성이 식당으로 들어섭니다. 작은 쟁반을 든 채로요. 그는 뼈만 남아버린 닭을 보고서 호탕하게 웃습니다.
"식사는 맛있게 하신 모양이오. 이건 요청하신 디저트요."
곧 테이블 위에 디저트 두 접시가 올라옵니다. 하나는 손바닥 크기의 블루베리 파이입니다. 파이 틀에 새콤달콤한 잼이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반으로 쪼갠 생 블루베리도 올라가 있어 씹는 맛이 한껏 배가됩니다. 다른 하나는 노란 빛깔을 내는 복숭아 푸딩입니다. 탄력 있고 탱글탱글해서 무척 먹음직스러워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숭아 과육이 알알이 박혀있습니다. 한 스푼 떠먹으면 기분 좋은 단맛이 느껴집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남편 자랑인가요. 하지만 충분히 이해 되네요. 이런 디저트를 만들 수 있는 남자가 어디 몇 명이나 될까요.
"그럼 내일도 기대하고 있도록 하죠. 후후."
디저트를 전부 비우기까지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요. 맛있는 건 이렇게 금방금방 사라진다니까요. 아쉬운 일이죠 정말.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 부부분들께 인사를 드리고 방으로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앞서 만난 안 좋은 소식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만족스러운 식사였어요.
부부도 각자 엘레나에게 인사를 하고서 제 할 일들을 합니다. 식기 치우는 소리가 분주합니다. 배를 이리 만족스럽게 채웠으니 좋은 밤이 될 것 같습니다. 엘레나는 다시 방으로 올라갑니다. 간소한 방은 아까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노란 빛의 등불이 내부를 은은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열린 창 너머로 서늘한 바람이 새어들어옵니다. 밝은 색의 커튼이 가볍게 살랑입니다. 지금 잠자리에 들면 딱 좋을 것 같습니다.
여행길에는 많은 일들이 따라오는 법이죠. 그것이 좋든, 그렇지 않든 말이에요. 오늘처럼 긴 여행길은 저에게도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내일도 분명 더욱 길겠죠. 이 여행은 언제 끝나며, 결말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또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뭐, 그것을 위해서는 일단 지금 자두는게 좋을 것 같네요. 안녕히 주무세요. 저는 그렇게 다음 날을 준비하기 위해 잠에 들었답니다.
잠자리가 썩 편안하진 않지만 여행의 피로를 풀기엔 충분합니다. 엘레나는 그렇게 깊은 잠에 듭니다.
그리고 엘레나는 깨어납니다. 벽에 걸린 낡은 시계가 6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바깥은 늘상 어두컴컴하지만 인간의 몸만은 기가 막히게 제 시간을 맞추곤 합니다. 낯선 타지에서 맞이하는 새로운 날입니다. 지난 밤 엘레나는 꿈 없는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몸의 피로가 전부 풀린 것 같습니다. 시간이 이른 만큼 주인 부부가 깨어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래도 어제 든든히 먹어둔 덕에, 그렇게 허기지진 않습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니 맑아진 머리와 타지의 어두운 하늘이 저를 맞이해 줬습니다. 먼 옛날, 전해져오는 구전으로는 하늘에서 빛이 내려올 때가 있었다고 하는데. 아무리 들어도 뜬구름 잡는 신화적인 이야기로 밖에는 들리지 않는군요. 그나저나 마차의 출발 시간은 어떻게 되려나요. 홀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마부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와 저는 같은 여관에 머물고 있었으니까요. 자, 그럼 또 움직여볼까요. 준비와 몸단장을 마치고 홀로 내려가봅니다.
그렇게 계속 무언가를 찾던 여성은 곧 찾았다, 하며 숙였던 고개를 들고 엘레나를 바라봅니다. 그녀의 손에 무언가 들려있습니다.
"아니, 줄 게 있어서 말이지요."
곧 여성이 카운터를 빠져나와 엘레나에게 다가갑니다. 그녀가 손을 펼치자, 주먹 크기 정도 되어보이는 돌멩이가 보입니다. 바른 모양으로 보기 좋게 깎아놓았군요. 그뿐만 아니라 돌에서는 금빛 기운 같은 게 넘실넘실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돌의 표면도 노랗게 반짝입니다.
"수도로 가는 전송석이에요. 전송 마법을 담아놓은 거랬나, 사용하면 바로 수도로 이동할 수 있다고 하더래요. 한 번만 쓸 수 있고요. 참, 마법이란 게 신기하긴 해요."
그러니까 이 돌은, 마력을 불어넣어서 마법을 기억시킨 도구였던 겁니다. 생활 속에서 사용되는 각종 기계와 장치들처럼요. 다만 전송 마법을 사용하는 도구는 그리 흔치 않았습니다. 전송 마법을 시전할 수 있는 마법 사용자들이 별로 없었으니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는 상당한 희귀품이었습니다. 일회용이라는 점도 한 몫 하고요.
"수도에 사는 우리 아들 본다고 비싼 돈 들여서 사놓았는데, 녀석이 그렇게 떠나버려서 쓸 일이 없어졌지요."
그러면서 여성은 맥없이 웃어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분명 그런 얘길 했었죠, 수도에 아들이 살았었다고. 하지만 부부의 아들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세상을 뜬 모양입니다.
제가 있던 땅은 마법이 발달하지 않아 마법 사용자들을 찾아보기는 힘들지만, 마도구를 기용하는 일 자체는 꽤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마도구의 성능은 진짜 마법에 비해서는 한계가 명확하지만 관련 학문을 닦지 않은 문외한이라도 사용 할 수 있는게 장점이니까요. 그렇기에 여주인이 손을 펼쳐서 제게 보여준 돌맹이가 평범한 돌맹이가 아닌 마법이 담긴 물건이라는 것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드님이 말이지요."
그러고보면 어제도 그런 얘기가 나왔었습니다. 일부러 묻지는 않았지만 역시 아드님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거군요. 안타까운 사연이 담긴 물건입니다. 이런 걸 제게 넘겨도 괜찮은걸까요. 저는 잠시 돌맹이를 바라보다가 그 금빛의 전송석을 제 손으로 가져왔습니다.
여성이 따뜻한 미소를 지어보입니다. 여태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보았던 어떤 것보다 더욱 밝은 표정입니다. 애물단지라고는 해도, 그녀에겐 아들을 추억하게 해주는 물건이었을 겁니다. 그런 것을 넘겨준 건 엘레나에게 호의와 존경을 보인 것과도 같습니다. 아무래도 어제의 대화가 썩 인상깊었던 모양입니다.
"아, 이제 슬슬 아침 준비가 끝났겠네요. 식당으로 가 계시면 바로 식사를 내올게요."
여성은 그렇게 말하고서 주방으로 종종걸음을 합니다. 엘레나가 식당으로 들어서면,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홀을 흘겨보던 마부를 볼 수 있겠네요. 그의 테이블에 놓인 접시는 싹 비워져 있습니다.
손 안에서 금빛을 은은히 자아내는 귀환석이 구르고 있었습니다. 분명 당장은 쓸모 없어졌다고 할지라도 여주인에게는 아들을 추억할 수 있는 물건이었을 겁니다. 마법은 웬만해서는 시세가 떨어지는 일도 없으니 다시 팔아도 비싼 돈을 받을 수 있었겠죠. 하지만 그러지 않고 오로지 호의로 이런 물건을 제게 넘겨주는군요. 저는 단지 이방인인데도 말이에요. 아무래도 이곳의 부부는 과거를 딛고 설 수 있을만큼 현명하고 사려깊은 인물들인 모양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또 들르도록 하죠."
가볍게 미소지으며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저도 힘내지 않으면 안되겠네요. 이제 아침을 먹고 힘내서 수도로 향하는게 좋겠습니다. 다시 밤 중에서도 깊은 밤이 찾아오기 전에 말이죠. 참, 팬케이크도 맛있었어요.
주인 부부는 여관을 떠나는 엘레나를 밝은 표정으로 마중했습니다. 마부는 전송석을 받아든 엘레나를 보며 아쉬운 눈치를 보냈습니다. 유능한 사냥꾼인 엘레나가 동행하지 않을 거라는 점 때문일까요. 어쨌든 엘레나는 전송석을 사용합니다. 전송석을 꼭 쥐니 따뜻한 기운이 피부를 타고 전해져옵니다. 그런 뒤 눈을 감으면 서서히 주변 공기가 바뀌는 게 느껴집니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도 납니다. 머리도 살짝 어지럽네요. 급격한 이동의 영향인 것 같습니다. 이윽고 전송석의 열기도, 금빛으로 빛나던 표면도 천천히 사그라듭니다.
전송이 완료된 것 같습니다. 살며시 눈을 뜨면, 방금 전 있었던 마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도시 전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먼저, 눈 앞에는 지평선도 보이지 않을 만큼 건물이 빽빽이 자리잡은 것이 보입니다. 쌓아올린 벽돌집들이 대로를 중심으로 양옆에 펼쳐져 있습니다. 민가의 창문을 사이로 밝은 빛이 새어나옵니다. 어제 보았던 중갑옷의 기사들도 이곳의 넓은 거리를 활보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하늘 위를 봅니다. 언뜻 보면 특이할 것 없는 밤하늘처럼 보이겠지만, 자세히 보면 저 너머에 밝은 빛이 밤하늘로 스며드는 풍경이 약간이나마 보입니다. 저건 어디서 나는 빛인지 궁금해집니다. 뒤를 돌아보면 그곳엔 높은 장벽이 세워져 있습니다. 야수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것 같습니다. 장벽엔 흠집마저 없고 무척 튼튼해 어떤 야수들도 쉽사리 깨부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문득 옆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납니다. 그곳엔 정교하게 놓인 철로 위로, 증기를 내뿜는 열차가 있었습니다. 열차의 문이 열리자 승객들이 탑승하고 내립니다. 잘 꾸며진 열차역도 보입니다. 저 열차, 엘레나는 난생 처음 보는 물체가 아닐까요. 그래도 저 쇳덩이가 이동수단이라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여주인이 건네준 전송석은 확실히 유능한 것이었습니다만, 저 자체가 마법에 서툰 것은 어찌할 수가 없었던 것 같군요... 뭐, 마도구니까요. 수도에만 제대로 입성했다면 된 것 아닐까요? 어지러운 머리를 쓸어넘기며 눈을 뜨자 확실히 저는 여관과는 다른 공간에 있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제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하나 같이 듣도 보도 못한 것들 뿐이라 다른 세상에 온 것만 같아요! 뒤에는 철벽같은 장벽이 높게 쌓여있고 하늘의 저편에는 구전신화를 재현해 놓은 것처럼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어요. 그리고 저 시끄럽고 연기가 나오는 건 뭐죠? 새로운 야수인가요?! ...아니, 그럴리가 없겠죠. 저건 운송수단일 겁니다. 안에서 인파가 쏟아져나오는 걸 보면 퍽 많은 사람을 싣을 수 있게 되어있는 것 같네요. 제가 타고왔던 마차랑은 완전히 딴 판이군요. 로라시에 대륙에 온 건 이제 이틀뿐인데도 전혀 다른 풍경을 셋이나 봐버렸습니다. 제 고향이 만약에 이렇게 큰 도시였다면 수생 야수들도 함부로 저희의 땅을 넘어오지 못했을텐데요... 허나 이런 풍족한 환경임에도 불구, 로라시아 대륙에 아직도 광증의 해결책이 없다는 사실이 심연의 위험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주고 있엇습니다.
'그런데.'
수도에 온 것 까진 좋습니다만. 저는 이제 어디로 향해야 하는거죠?! 광증에 대해 알아보겠다고 수도로 가겠다고는 했지만, 막상 이렇게 단숨에 오게 되니 막연한 기분이 드는군요!
"...으음..."
그리고 턱을 붙잡고 주위를 빙빙 맴돌던 저는 생각해낸 겁니다.
"...술집으로 가죠!"
여관에서 나오자마자 술집에 갈 생각을 하다니 조금 글러먹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역시 소문이 모이는 곳은 술집이랑 여관만한 곳이 없죠. 거기서 정보를 조금 알아보고 움직여야겠습니다. ...항구도시에 처음 내렸을때처럼 미친 사람 취급받고싶지는 않으니까 말이에요. 그럼, 목적지도 다시 정해졌으니 움직여보죠.
엘레나는 주점을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대로의 바로 옆에 당당히 간판을 올려놓았으니 말입니다. '꿈꾸는 달'이라는 이름의 주점입니다. 내부에 불이 켜진 걸 보면 영업 중인 모양입니다. 주점 내부는 넓지만, 손님은 별로 없었습니다. 이른 시간이기 때문일까요. 손님은 테이블 앞에 홀로 앉아 음료를 홀짝이는 사람부터 두세명이 모여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까지 다양했습니다. 카운터에 서서 잔을 닦고 있던 주인이 엘레나를 흘끗 쳐다봅니다. 머리를 빡빡 민 데다가 얼굴에 흉터까지 그득한 남성이었습니다. 그는 주점으로 들어오는 엘레나를 보고도 별 인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금세 시선을 거두고 다시 제 일에 전념할 뿐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