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평화로운 대화 도중 크게 안 했다는 이야기에는 고개를 내면에서 끄덕인다. 실제로 큰 소리는 아니었다. 자신이 우연히 귀가 약간 좋기에 들렸을 뿐.
"네, 잘 부르시던데요?"
허밍에는 가벼운 칭찬을, 칭찬은 트라우마가 있는게 아닌 이상 싫어하는 이는 없으니까. 상대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안 걸린다는 이야기에는 고개를 끄덕인다. 실제로 평탄한 길이기도 하고.
"그런가요- 이 공원에서 뒤로 걷기 프로셨군요"
애매한 칭찬, 뭐 어찌하랴 자신의 어휘가 풍부하지 않은 것을. 이어지는 이야기에는 고개를 끄덕인다.
"네, 생체기 수준이긴 하죠 하지만-"
가볍게 말을 끈다. 그래야 다음 말에 임팩트가 조금 생기니까.
"쓸데없는 것으로 다쳐도 조금 낭비잖아요?"
물론 나는 너를 걱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상처로 인해 '방해'가 되지 않아야 하지 않겠냐는듯 싱긋 미소를 짓는다. 돌려서 이야기하기.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다. 10년간 단련된 나라면. 당신과 거리를 유지하며 계속 걸으며, 서늘한 금빛 눈동자에 무표정한 노란 눈을 마주보며 그녀는 그리 답을 남겼다.
이전 임무에서 본 적이 없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출발했을 때는 물론 블러디 레드에서 탈출 후 전투 도중에 보았으니까. 알면서도 그런 소릴 한 건 약시나 비꼼이 분명하다. 그것을 유연하게 혹은 익숙하게 받아쳤을 때는 다시금 작게 목을 울릴 뿐이었다.
"흐음."
그 뒤로 들려오는 말들을 레레시아는 멈추지 않고 들었다. 누군가들과 달리 눈에 띄고 싶지 않다던가. 지나간 이야기는 쓸데없다던가. 이런 식의 대화를 빙자한 게임은 지겹다던가. 지겹다. 그 문장의 어감이 바뀐 걸 레레시아도 알았다. 슬그머니 드러난 듯한 아리아의 행동에 레레시아도 긴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멈춰섰다.
"그래. 지겹다면 그만하자고. 나도 더는 그 말투 못 들어주겠으니까."
뒤따라오던 아리아는 좀 전처럼 멈췄을까. 멈췄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레레시아는 한 발 끝을 지익 끌며 돌아선다. 다시 아리아와 마주 보는 구도로 돌아가, 그것에 멈추지 않고 성큼 앞으로 나아간다. 아리아의 앞에 다다를 때까지. 코앞에 마주할 정도로 가깝게 거리를 좁히려 하며 여전히 서늘한 시선과 함께 말했다.
"그러니 어디 한 번 까봐.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알면서도 왜 굳이 말을 걸고 되도 않는 교류를 하려고 했는지."
레레시아가 아까까지는 시선만이 다소 날카로웠다면, 지금은 그저 서 있는 것조차 한 자루 칼 같았다. 느슨함, 태만함은 집어치우고 이성을 긴장이란 끈으로 바짝 조인 것처럼. 상대적으로 큰 키만큼 내려다보는 시선이 어디 한 번 할말 해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고지식한 혁명가 동지들 모임에서 살아 돌아왔다. 상상 이상이었다. 내가 제일 놀랐던 부분은 거기에 있는 인물들의 라인업이었는데... 죄다 이바닥에서 한가닥씩 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제일 멍청한 짓을 하는 사람은 사실 제일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더니, 그게 정말이었나? 하지만 그건 중요한게 아니고 특히나 그 무리 가운데에 있던 그 사람. 하르트만 교수가 나의 이목을 특히 이끌었었다.
하르트만 교수는 제 7파동 -그러니까 세븐스- 학문에서 기반을 갖추고 있는 인물이다. 뭐 솔직히 아주 뛰어난 커리어를 가지고 있다고는 말 할 수 없는 인물이지만. 세븐스가 오히려 인류의 점진적 퇴화를 야기하고 있다는 발언으로 이미 학계에서는 유명하다. 말하자면 그는 제 7파동계의 악동인 것이다. 그의 세븐스와 인간성의 연구에 관한 논문들은 나도 한 때 제법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놀랍게 다가왔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 '세계 대화합'을 위한 소꿉놀이 모임의 리더였다니? 이런 표현은 조금 웃길지도 모르겠지만 그 때만큼은 동네 플리마켓에서 스타를 만난 여학생의 기분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레지스탕스의 활동말인데, 예상했던대로 그냥 탁상공론의 연속이었다. 카페에 3시간 동안 나란히 앉아 서로 저마다 바라고 있는 이상세계를 내놓으며 충돌하고 있던게 전부였다. 레지스탕스는 무슨 차라리 스터디그룹 이름을 붙이는게 어울릴 정도였다. 그런데 그 과열되가던 분위기에 속에서 넌지시 던져진 하르트만 교수의 발언이 떠오른다. '선한 행위가 항상 지혜로운 것은 아니고, 악한 행위가 항상 어리석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세븐스와 비세븐스의 구애없이, 우리만큼은 언제나 깨어있는 상태로 있어야 합니다.' 솔직히 그의 그런 사상이 맞다 틀리다를 떠나서... 굉장히 울림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요즘같은 죽기 아니면 살기같은 흑백논리로 점철된 대립사회에서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직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와서 실감하게 된 것인지만 나는 내심, 그런 걸 원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까지 난 그냥 쓸데없는 논쟁을 하기 싫어서 입을 아예 다물고 있었는데, 그의 생각을 조금 더 들어보고 싶어서 말을 꺼내고 말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제 7파동의 뜨거운 감자인 하르트만 교수와 대면할 수 있는 기회가 언제 오겠는가? 결국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인가 그들처럼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모임은 그게 전부다. 그렇게 끝이 났다. 그들이 정말 혁명을 성공시킬지 그러지 못할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나는 이제 발을 뺄 것이다. 비폭력을 지향하는 레지스탕스라고 할지라도 그건 결국 혁명활동이다. 언제 그 카페에 가디언즈가 들이닥쳐 우리들을 척살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니까. 혹시 모르지, 몇 주 뒤 쯤이면 인터넷기사에 하르트만과 그 치들의 이름이 박혀있을지도.
그래도 나름대로 신선한 자극이 되는 시간이었다. 오늘 경험은 추억으로 묻어두고 내일부터는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잔혹하고 편향된, 허무한 일상말이다. 이 기록에도 원래 그랬던 것처럼 나의 불평불만만이 쌓여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