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런 날이 있다. 그 날의 일과를 모두 마치고 개인실로 돌아와 명상을 하고 전에 읽던 책까지 다 읽었는데도, 몸은 전혀 피곤하지 않고 정신도 말짱한 날. 최근에도 한 번 있어서 밤늦은 시간이었지만 산책을 나갔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오늘 역시 그래야 할 것 같다.
"읏차."
침대에 늘어진 몸을 휙 일으켜 옷을 갈아입는다. 어차피 밤이니 가볍게 입을까 하다가 결국은 평소처럼 꽁꽁 싸매고 만다. 장갑까지 새로 끼고서 거울을 보면, 계절에 비해 과도하게 노출을 꺼리는 복장 위로 머리만 둥둥 뜬 거 같다. 이제는 다른 색의 옷도 입어볼까. 그런 생각은 들자마자 사라져버린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므로. 그리고 허리장식 형태의 모조 보검을 옷 위로 두른다.
"산책- 가야지-"
통통 튀는 걸음으로 개인실을 나와 슈퍼마켓을 통해 밖으로 나오면 늦은 밤시간 답게 어두운 하늘과 어둑한 마을이 보인다. 그래도 아직은 불 켜진 곳이 몇몇 있어서 아주 어둡지는 않지만. 레레시아의 발은 상점들이 있는 쪽이 아닌 더 한적할 공원으로 향했다. 두 손을 가볍게 뒷짐을 지고서 느긋하게 걸어 공원에 도착하면, 별도로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가 잘 정돈된 보도블럭의 위를 걷는다. 타박타박 일정하던 발소리가 한번씩 박자를 맞추어 모종의 스탭이 되곤 한다. 그 때마다 키득, 웃는 소리 더해진다.
공원에 산책, 에스티아에게 추천받은 곳을 무념히 걸어가보는 도중이었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한명의 여성 레레시아-, 저번에 이야기를 나누다 파탄이 났던. 그런 여성. 세븐스는 독이었던가. 자신처럼 타인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 자였지. ...뭐 그런 점에서는 공감이라 해야할까.
"안녕하세요-"
그렇게 입을 열어 그녀에게 말한다.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진 않지만. 이번에는 필요한 일이니까. 그리 생각하며 만약 자신에게 반응하는 당신을 본다면 가볍게 손을 흔들어줫을 것이다. 표정은 딱히 변화가 없지만 말이다. 그러며 뒤이어서 이야기를 꺼냈다.
긴장을 풀고 느긋히 즐기는 산책은 그만큼 주변에 무심해지게 만든다. 그렇다고 무아지경까지는 가지 않으니. 뒤에서 온 누군가의 인사말 정도는 금방 알아들었다. 하지만 그게 그녀를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어서, 듣자마자 멈춰섰지만 돌아보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주변을 휙휙 돌아보고 말 걸 사람이 레레시아 뿐이라는 사실을 인지할 때까지의 시간이.
"어. 안녀엉."
뒤로 돌아서지 않고 고개만 비뚜름히 뒤로 기울여 확인하니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 사이 사이의 흰색과 노란 눈은 기억 속에서 바로 한 사람을 끄집어낸다. 레레시아는 아리아의 흔들거리는 손을 보기만 하고 호응은 해주지 않았다. 그대로 지그시 응시하다가 우연이네요 라며 패드가 아닌 목소리로 말을 하는 아리아에 눈을 슬쩍 가늘게 좁혔다. 잠깐이었지만.
"그러게에. 우연이네에."
마찬가지로 감정 없이 말하고 기울인 고개를 앞으로 내린다. 그리고 뒤로 돌아서 천천히 뒤로 걷기 시작하며 시선을 아리아에게 맞추고 말한다.
"리아는 여기 무슨 일-? 산책이려나아?"
이 시간에 여기 있다는 건 산책 외엔 없을게 뻔한데도 굳이 말로써 그걸 묻는다. 아슬아슬, 위태롭게 뒤로 걷는 재주를 부리면서.
답을 예상한 질문과 돌아온 예상한 답. 마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의 모범 답안 같은 상황이다. 퍼스널 스페이스를 전혀 접촉하지 않는 지극히 평화로운 대화다. 이대로만 이어지면 오늘이란 하루를 무사히 보낼 수 있겠으나 세상은 늘 생각대로 굴러가 주지 않곤 했다.
"어라- 들렸어-? 그렇게 크게 안 했는데에."
아리아가 허밍을 언급하자 그게 들렸냐며 고개를 갸웃한다. 분명 큰 소리로 한 건 아니었지만 주변이 조용한만큼 작은 소리여도 들렸을 가능성은 있다. 그래도 뭐, 듣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니 상관없다. 어깨를 작게 으쓱이곤 말한다.
"나도 산책 중- 여기 길은 깨끗해서어 그런거에 안 걸려어."
그런 길임을 알고 있기에 그렇게 걷는다는 걸까. 발도 꼬이지 않고 잘도 걷는 걸 보면 한두번 이런게 아닐지도 모른다.
"뭐어 여기서 넘어져 다치는 거 정도야- 임무 나가서 다치는거에 비하면- 생채기 수준이지- 리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아무리 평탄한 길이라도 잘못 구르면 가벼운 염좌도 일어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녀의 말처럼 임무에 나가서 어딘가 찢기고 부러지는거에 비하면 경미한 수준이다. 아리아도 그렇지 않냐며 거는 말은 그런 의미 같지만. 그런 상처를 걱정할 사람이 아니지 않냐는 뒷면이 있는 것도 같다. 잔잔하고도 서늘한 금빛 눈동자가 말하는 것은.
지극히 평화로운 대화 도중 크게 안 했다는 이야기에는 고개를 내면에서 끄덕인다. 실제로 큰 소리는 아니었다. 자신이 우연히 귀가 약간 좋기에 들렸을 뿐.
"네, 잘 부르시던데요?"
허밍에는 가벼운 칭찬을, 칭찬은 트라우마가 있는게 아닌 이상 싫어하는 이는 없으니까. 상대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안 걸린다는 이야기에는 고개를 끄덕인다. 실제로 평탄한 길이기도 하고.
"그런가요- 이 공원에서 뒤로 걷기 프로셨군요"
애매한 칭찬, 뭐 어찌하랴 자신의 어휘가 풍부하지 않은 것을. 이어지는 이야기에는 고개를 끄덕인다.
"네, 생체기 수준이긴 하죠 하지만-"
가볍게 말을 끈다. 그래야 다음 말에 임팩트가 조금 생기니까.
"쓸데없는 것으로 다쳐도 조금 낭비잖아요?"
물론 나는 너를 걱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상처로 인해 '방해'가 되지 않아야 하지 않겠냐는듯 싱긋 미소를 짓는다. 돌려서 이야기하기.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다. 10년간 단련된 나라면. 당신과 거리를 유지하며 계속 걸으며, 서늘한 금빛 눈동자에 무표정한 노란 눈을 마주보며 그녀는 그리 답을 남겼다.
이전 임무에서 본 적이 없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출발했을 때는 물론 블러디 레드에서 탈출 후 전투 도중에 보았으니까. 알면서도 그런 소릴 한 건 약시나 비꼼이 분명하다. 그것을 유연하게 혹은 익숙하게 받아쳤을 때는 다시금 작게 목을 울릴 뿐이었다.
"흐음."
그 뒤로 들려오는 말들을 레레시아는 멈추지 않고 들었다. 누군가들과 달리 눈에 띄고 싶지 않다던가. 지나간 이야기는 쓸데없다던가. 이런 식의 대화를 빙자한 게임은 지겹다던가. 지겹다. 그 문장의 어감이 바뀐 걸 레레시아도 알았다. 슬그머니 드러난 듯한 아리아의 행동에 레레시아도 긴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멈춰섰다.
"그래. 지겹다면 그만하자고. 나도 더는 그 말투 못 들어주겠으니까."
뒤따라오던 아리아는 좀 전처럼 멈췄을까. 멈췄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레레시아는 한 발 끝을 지익 끌며 돌아선다. 다시 아리아와 마주 보는 구도로 돌아가, 그것에 멈추지 않고 성큼 앞으로 나아간다. 아리아의 앞에 다다를 때까지. 코앞에 마주할 정도로 가깝게 거리를 좁히려 하며 여전히 서늘한 시선과 함께 말했다.
"그러니 어디 한 번 까봐.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알면서도 왜 굳이 말을 걸고 되도 않는 교류를 하려고 했는지."
레레시아가 아까까지는 시선만이 다소 날카로웠다면, 지금은 그저 서 있는 것조차 한 자루 칼 같았다. 느슨함, 태만함은 집어치우고 이성을 긴장이란 끈으로 바짝 조인 것처럼. 상대적으로 큰 키만큼 내려다보는 시선이 어디 한 번 할말 해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고지식한 혁명가 동지들 모임에서 살아 돌아왔다. 상상 이상이었다. 내가 제일 놀랐던 부분은 거기에 있는 인물들의 라인업이었는데... 죄다 이바닥에서 한가닥씩 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제일 멍청한 짓을 하는 사람은 사실 제일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더니, 그게 정말이었나? 하지만 그건 중요한게 아니고 특히나 그 무리 가운데에 있던 그 사람. 하르트만 교수가 나의 이목을 특히 이끌었었다.
하르트만 교수는 제 7파동 -그러니까 세븐스- 학문에서 기반을 갖추고 있는 인물이다. 뭐 솔직히 아주 뛰어난 커리어를 가지고 있다고는 말 할 수 없는 인물이지만. 세븐스가 오히려 인류의 점진적 퇴화를 야기하고 있다는 발언으로 이미 학계에서는 유명하다. 말하자면 그는 제 7파동계의 악동인 것이다. 그의 세븐스와 인간성의 연구에 관한 논문들은 나도 한 때 제법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놀랍게 다가왔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 '세계 대화합'을 위한 소꿉놀이 모임의 리더였다니? 이런 표현은 조금 웃길지도 모르겠지만 그 때만큼은 동네 플리마켓에서 스타를 만난 여학생의 기분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레지스탕스의 활동말인데, 예상했던대로 그냥 탁상공론의 연속이었다. 카페에 3시간 동안 나란히 앉아 서로 저마다 바라고 있는 이상세계를 내놓으며 충돌하고 있던게 전부였다. 레지스탕스는 무슨 차라리 스터디그룹 이름을 붙이는게 어울릴 정도였다. 그런데 그 과열되가던 분위기에 속에서 넌지시 던져진 하르트만 교수의 발언이 떠오른다. '선한 행위가 항상 지혜로운 것은 아니고, 악한 행위가 항상 어리석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세븐스와 비세븐스의 구애없이, 우리만큼은 언제나 깨어있는 상태로 있어야 합니다.' 솔직히 그의 그런 사상이 맞다 틀리다를 떠나서... 굉장히 울림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요즘같은 죽기 아니면 살기같은 흑백논리로 점철된 대립사회에서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직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와서 실감하게 된 것인지만 나는 내심, 그런 걸 원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까지 난 그냥 쓸데없는 논쟁을 하기 싫어서 입을 아예 다물고 있었는데, 그의 생각을 조금 더 들어보고 싶어서 말을 꺼내고 말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제 7파동의 뜨거운 감자인 하르트만 교수와 대면할 수 있는 기회가 언제 오겠는가? 결국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인가 그들처럼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모임은 그게 전부다. 그렇게 끝이 났다. 그들이 정말 혁명을 성공시킬지 그러지 못할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나는 이제 발을 뺄 것이다. 비폭력을 지향하는 레지스탕스라고 할지라도 그건 결국 혁명활동이다. 언제 그 카페에 가디언즈가 들이닥쳐 우리들을 척살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니까. 혹시 모르지, 몇 주 뒤 쯤이면 인터넷기사에 하르트만과 그 치들의 이름이 박혀있을지도.
그래도 나름대로 신선한 자극이 되는 시간이었다. 오늘 경험은 추억으로 묻어두고 내일부터는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잔혹하고 편향된, 허무한 일상말이다. 이 기록에도 원래 그랬던 것처럼 나의 불평불만만이 쌓여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