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가 아니라 이야기. 무슨 이야기일까 싶어 마리가 입을 여는 걸 가만히 쳐다본다. 에델바이스에 오기 전에 있었던 일들, 머물렀던 다른 레지스탕스의 이야기. 조화와 평등을 추구하는 에델바이스는 비교적 많이 온건한 편인 레지스탕스라고 볼 수 있는 반면, 마리가 있었던 예전의 레지스탕스는 아마 그 반대쯤 되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은 레지스탕스를 더 찾기 어려우니 그다지 특이한 건 아니겠지만. 오히려 너나 마리가 지금 몸담고 있는 에델바이스가 별종이라면 별종이리라.
"확실히, 레인... 그 사람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만약 그렇다면 알지도 못하면서 끼어든 게 됐을 수도 있고. 네, 그렇게 반응하지 않아서 손해를 본 적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동의하지는 못하더라도 어째서 그렇게 행동했는지는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캔을 들어 음료를 마시는 마리를 보던 너는 시선을 네 손에 들린 음료수 캔으로 돌렸다. 그런가... 무슨 독심술을 지니거나 한 게 아니라면 이야기하지 않으면 닿지 않아. 말하지도 않고, 들으려 하지도 않고 이해받길 바라고 이해하길 바라서는 안 되는 거겠지.
"그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그렇다면 좋겠는데요."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그 일 뒤로 얼굴을 마주보기가 조금 꺼려졌던 건 사실이다. 살기는 아니었겠지만 오싹한 시선을 느끼기도 했었고. 분명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에 이를 악물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역시 나서는 건 좋은 게 아냐.
"먼저 이야기를 걸어오는데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아요, 감정이라는 건 한순간 끓어올랐다가도 시간이 지나면서 가라앉기 마련이니까요. 시간이 지나도 남아있는 감정은 더 이상 감정이 아니겠죠, 머릿속으로 난 마땅히 이런 느낌을 가지고 있어야 해. 라며 되새길 뿐이에요."
그러니까, 당장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한다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이야기하는 걸 포기하지만 않으면, 네... 그렇죠, 스스로 하는 행동이 억지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요. 그때라면 다시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 거에요. 시간은 기다리는 사람의 편이라고들 하잖아요."
“상대방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지. 사실 속마음을 이야기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서로간에 믿음이 부족할 수도 있는거구. 믿음이 충분하다고 해도 보여주기 싫은 모습은 누구나 가지고 있으니까.”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한다며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에게나 말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이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다.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지금은 이 울타리 안에서 등을 맡대는 동료이니까 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만약 눈 앞에 있는 이가 적이라면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이야기를 내어줄 수 있겠는가.
마리는 쥬데카의 이야기도 귀를 기울이며 듣는다. 감정은 일시적인 것이라는 것도 이야기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시간은 기다리는 사람의 편이니 언젠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말도 꽤 상냥하다.
“응. 시간은 기다리는 사람의 편이니까. 나도 리오를 기다리고 있어.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러니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 배시시 웃었다. 아마 지난 번에 쥬데카가 말했던, 아직은 말하기 힘들다고 했던 그 이야기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몸을 벽에 추욱 기대며 마리가 말을 돌렸다.
“최근엔 전기뱀장어하고 전기가오리를 연구해보고 있어. 전기뱀장어는… 머리가 +극이고 꼬리가 -극이래.”
이런 저런 전기뱀장어에 대해 느릿느릿 이야기하다가 쥬데카가 왜 갑자기 전기뱀장어 이야기를 하는지 쳐다본다면, 아니 굳이 그렇게 쳐다보지 않더라도 뒤에 말을 붙일 것이었다.
“전에 리오가 스턴건 이야기 했었잖아.”
조금 졸린지 하품을 하며 작은 손으로 입 앞을 가렸다. 눈이 깜빡깜빡한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딴생각을 한다. 왠지 쥬데카 앞에서는 말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 잘 들어주기 때문인가, 하고.
꽤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하며 로벨리아는 회식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래봐야 그냥 회의실을 사용하는 것 뿐이지만. 어쨌건 지금은 다른 팀도 특별히 임무가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아니. 애초에 그런 날을 계산해서 지금 이렇게 잡은 것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로벨리아는 술을 먹지 않는 편이었다. 먹었다가 무슨 모습을 보이려고. 절대 그럴 순 없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조용히 입장한 후, 근처에 있는 이들에게 인사를 보내면서 비어있는 자리에 앉았다. 에스티아와 아스텔의 모습을 확인한 후, 로벨리아는 따로 가지고 온 탄산수 캔을 딴 후에 잔에 천천히 따랐다.
'뭐, 술은 아니지만 거품이 나오는 것은 술과 다를 거 없어.'
맥주나 이거나 그게 그거지. 그렇게 생각을 하며 로벨리아는 컵에 따른 탄산수를 천천히 마셨다. 달콤하진 않지만 그래도 톡톡 쏘는 맛이 꽤 괜찮다고 생각하며 이내 그녀는 안주를 천천히 눈으로 훑었다. 그러다가 시선이 어딘가에서 향하는 것을 느꼈을 것이고 그녀는 가만히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없으면 말고. 그렇게 짧게 말을 하며 로벨리아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 일단 안주를 고르려는 듯, 그녀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콘치즈를 한 숟갈 떠서 먹었다.
슥 옆에 눕혀둔 패드를 들어 답을 적어둔다. 그 다음 당신에게 보이고는 그녀는 와인을 한모금 마실 따름이다. 콘 치즈를 한 입 먹는 것을 보며 아리아는 근처에 있는 샐러드를 포크로 찍어 한입 먹을 뿐이다.
'대장님은 술을 안 마시는건가요?'(필담)
그러며 당신이 탄산수를 마시는 것을 보며, 그녀는 물어본다. 순수한 호기심일까. 아니면.. 느긋한 태도를 취한채 한입 먹은 샐러드를 다 씹어 목으로 넘기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상관에 대한 예의를 나름 지키는 것일까. ...뭐 에스티아든 아스텔이든 상관 느낌은 없지만 로벨리아라면 상관 느낌이 있다고 그녀는 생각하는 것이다. 무르익은 분위기라지만 그녀는 전혀 취하지 않았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