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서로 아무것도 없이 맞닥뜨린다면, 네.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무엇이든지 마음의 준비라는 건 필요하다고 너는 생각했다. 준비를 끝마치더라도 제대로 실행되지 않는 일이 부지기수인데, 준비조차 하지 않은 일이 성공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물론 증오심이나, 그에 준하는 감정을 토대로 막연하게나마 항상 준비되었다고 볼 수는 있겠지만 이성이 배제되어서야 어디 그게 효과적이겠는가. 본디 인간은 이성을 벗어나서는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고 본다면 이성을 놓아버린 순간 그건 한 마리 짐승에 지나지 않겠지. 이들은 죽이기 위해 훈련받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전부 죽여버려서야 조화는 뜬구름일 뿐이지, 평화와 조화라는 이상을 그대로 붙잡기에는 이미 두 발을 땅에 딛은 순간부터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 말하고, 필요악이라며 구색을 갖춘다. 이상적 인간은 이상에 다다를 수 없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가 그렇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전체는 언제나 부분의 합 이상이니, 이상적인 인간들이 모인다고 해서 이상의 세계가 펼쳐지지는 않는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겠지, 하물며 그런 존재보다는 불완전한 사람들 투성이인 세상이라면 뭐라고 말을 더할 수 있을까? [vanitas.] "음, 글쎄요... 저도 확신이 없으니까요, 이래서는 제대로 된 논의조차 아니게 됩니다만은."
결국 허점투성이, 너는 멋쩍은 듯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의도가 제대로 실리지 않은 말의 뜻을 찾으려는 것 만큼 힘들고 고통스러우며, 의미 없는 일이 어디 있을까. 애초에 보물이 없는데 땅을 파 내려가고, 동굴을 뚫고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의미는 없었다. 그래, 의미 같은 건 없다.
"그러면 안 되죠, 인간은 인간이고 싶을 리가 없잖습니까. 제 앞에 있는 건 인간인 것 같은데요."
무엇인가 바란다는 것은, 결핍과 부재로부터 인한다. 적어도 네 앞에 선 그는 그런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에. 아니면 그저 그가 농담하듯 말했기에 마찬가지로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기 위해서였을까. 어쨌거나 그리 이야기하는 네 목소리는 무겁지 않았다. 이미 한 번 그가 비슷한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거부하는 걸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려나. [vanitatum.] "네, 저는 꽤나 잔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을 돌리지 말아라, 손에 묻은 피를 씻어내려 하지 말아라, 눈 앞에 쓰러진 이들의 표정을 기억해라, 네가 딛고 있는 토지에 묻힌 이의 모습을 떠올려라, 마지막 순간까지 지르던 비명을 들어라. 아, 네게는 무뎌질 자격 따위 없다. 무시하는 게 용납될 리가 없다. 선택했다면 책임져야만 한다. 때로는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지지만, 때로는 한없이 무거운. 책임지지 않는다면 뭐가 다른가, 옳고 그른 것을 따질 수는 없다. 구부러지지 않는다면 끝내 꺾이고 말테지만, 그건 꺾인 뒤의 이야기다. 꺾이기 전까지는 그 역시 정의이며, 물과 같이 자유롭게 흐르는 것 역시 정의겠지. 어째서 레지스탕스는 레지스탕스일 뿐인가. 어째서 아직도 체제는 전복되지 않았는가? 압도적인 힘의 차이 때문에? 결집되지 못한 뜻 때문에? 이유따위 찾아낼 수 있을리 없다.
"하하...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되는 대로 말할 때가 가끔 있어서요."
마침내 혁명이 성공했다고 해도, 혁명을 뒷받침하는 요인이 성공의 전부는 아닌 것처럼. [et omnia vanitas.] "유익한 대화네요, 저는 그다지 영양가 있는 이야기를 해드리지는 못했지만."
무겁게 자리를 떠나려던 걸음이 이번엔 아스텔에 의해 멈췄다. 멈추긴 했지만 돌아보진 않았다. 레레시아는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아스텔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별 거 아닌 얘기를 하듯 차분한 그의 목소리를 나름 귀기울여 듣다가, 이름이 불리자 아주 작게 흠칫 한다. 이후 작은 중얼거림이 그녀의 입 안에서만 구른다.
"그런거 아니다. 뭐."
그녀는 계속 그대로 서 있었으니 소매를 잡아둘 필요도 없었겠지만. 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잡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잡는 순간, 예고 없는 접촉이 닿는 순간 이번엔 눈에 띄게 움찔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덕분이랄까 살짝 뚱해진 얼굴이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나고 그녀의 시선이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 지금 그의 말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 그녀의 눈동자에 맴돈다.
그래도 시선은 시선일 뿐. 그의 말이 끝날 때까지 그녀는 조용히 있었다. 잡혔던 소매가 놓여지고 덧붙이는 말까지 들은 후에, 그제서야 시선을 슬쩍 아래로 굴린 레레시아가 잠시 우물쭈물한다. 그 사이 달싹인 입술이 이상한 사람, 이라고 중얼거린 것도 같다. 바로 말이 툭 튀어나왔기에 그저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스텔이 무섭거나 혐오스러운게 아니야. 동정도 하지 않아. 그거야말로 실례인 짓이니까. 그런데도 미안하다고 한 건, 방금은 내가 말실수를 한게 맞기도 하고. 한순간 욱해서 저질러놓고 수습하는 거에 서툴러서 이럴 때 할 말이 그것 밖에 없으니까 그래. 더 얽히지 않게 하겠다는 것도."
아. 진짜. 말 도중 그녀가 투덜거리며 머리를 헤집었다. 하얀 머리카락 사이로 숨었던 손이 내려와 아스텔이 잡았던 소매 위를 덮고 꾹 눌렀다.
"과묵한 줄 알았더니 말 진짜 많네... 얽히거나 귀찮게 굴지 않겠다는 건 솔직히 미안해서 그런거야. 일순간이래도 너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판단해서 헛소리를 지껄였으니. 앞으로 더 그럴 일 없게 하겠다는 건데. 미안해 하지 말라면 뭐... 그냥 지금까지처럼 굴지 뭐. 일부러 피해다니는게 더 귀찮고."
으하-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더니 가늘게 좁힌 눈으로 아스텔을 응시한다. 째려본다기보다 신기한 걸 보는 시선이다. 잠시 그러다가 눈에 힘을 풀고 그런 말을 슬그머니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