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텔, 만이 아니라 에스티아, 로벨리아에게도 숨겨진 얘기가 있을 거란 건 아마 조직원이라면 생각 한 번 정도는 해봤을 것이다. 단지 그걸 말로써 의문화하지 않을 뿐. 무언가를 숨기는 건 그들만 그런게 아니니까. 그렇지만 그녀가 선택지로 내걸었던 건 단순히 숨겨진 얘기는 아니었다. 그러니 듣기에 다를 지도 모르겠다고, 지나가듯 중얼거렸지.
"그래애. 오랜만에 맡겨볼까나아."
여성역이래도 특별히 다를 건 없었겠지만, 리드를 그대로 아스텔에게 맡기고 레레시아도 스텝을 내딛었다. 리드하는 쪽이 아닌 것과 아스텔의 정직하고 깔끔한 움직임은 평소와 달라서 되려 새로웠다. 춤을 출 때는 항상 춤 생각으로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는데. 지금은 오히려 생각이 정리되어간다. 희미한 술기운마저 가라앉히는 정적인 분위기 속에 그녀의 허밍이 가느다랗게 울린다. 바람 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화음처럼 섞여들었다. 턴을 돌 때의 발소리마저 조화를 이루던 그 시간은 끝을 흐리는 허밍과 같이 끝났다.
팔과 손이 떨어지고 마주 섰을 적에, 레레시아의 얼굴엔 그저 순수한 미소가 드리워 있었다. 어색해하는 아스텔을 볼 때까지도.
"에이- 겸손하긴- 서로 발 한 번도 안 밟았는데에 이 정도면 충분히 잘 하는 거라구우?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니까- 어색한거야아. 훈련이랑 똑같다구-"
입을 열자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냐는 듯 평소와 같은- 그 미묘한 표정으로 돌아와 나름 칭찬 같은 말을 해준다. 듣기에 그럴진 몰라도 진심이긴 했다. 무리하게 기교를 부리려 하지 않고 성격답게 우직했던 춤사위는 쉬이 잊히지 않을 것이었으니.
"아- 아. 만족스러웠네- 가끔 상대해주면 좋을지도-? 우히히. 음- 그럼 이제 아까의 첫번째랑 두번째를 알려줄 차례일까나아."
부스스- 그녀가 제자리에서 휙 돌자 긴 머리가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 하고 어수선하게 흔들린다. 풀석거리는 머리칼을 달고 한 걸음 두 걸음 아스텔과 거리를 둔다. 뒤 돈 사이 표정은 과연 어땠을까. 금방 돌아서서 보인 얼굴은 방금과 다를게 없다. 레레시아는 아까처럼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중지와 검지. 두 개였다.
"궁금하다니까 알려주긴 하겠지만- 에- 모르겠다. 먼저 두번째부터어. 뭐 이건 별 거 아니야- 지하에 있는 워프 장치로 바깥에 데려가 줄 수 있는지 싶어서어. 아예 나가는 건 아니고 바람 쐬기- 그리고 첫번째는-"
두번째를 먼저 말하며 중지를 접자 검지 하나만 오뚝하게 남았다. 그녀는 손가락을 잠시 응시하다가 입술 위로 가져가 대었다. 이제부터 말하는 건 비밀이라는 것처럼.
"첫번째는, 만약에- 혹시, 정말로 만약에. 내가 어딘가 이상해져서 팀이나 조직에 위해가 될 것 같아지면, 조용히 처리해달라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처럼 만들어달라고. 그게 내용이었어."
질질 늘어지던 말투가 어느새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바뀌어 내놓은 그 내용이 과연 어떻게 들렸을까. 이번엔 그녀가 시선을 옆으로 굴리며 회피하곤 말이 없어졌다.
그녀는 멍한 시선을 허공에 올리며 미적지근한 대답을 한다. 당신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곡예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문맥만으로 당신이 곡예라는 하나의 전투 기술을 이용해서 아이들을 상대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당신의 권유에, 손에 들린 떡에 눈길을 한 번 주더니 "안 된다." 하고 말하는 것이다.
"...아니. 적어도 다른 이라면 더 잘 출 수 있을거야. ...솔직히 추면서 스탭을 어떻게 밟는지만 계속 생각한 것도 있고."
임무도 아닌데 이렇게 춤을 추는 것이 처음이라서 어색한 것일지도 모르고, 그냥 적성에 잘 맞지 않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나 확실한 것은 적어도 아스텔은 지금 이 순간을 어색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상대의 입장에선 굳이 그래야 하나. 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아무튼 가끔 상대해달라는 말에 아스텔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조금 힘들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의 표시였다.
"...말했다시피 어색해서 말이지. 춤을 추고 싶다면, 다른 능숙한 이와 추는 것을 생각해봐. ...일단 내 기준에선 대장이 가장 잘 춰."
정확히는 로벨리아 이외에는 잘 모르긴 하지만. 아무튼 그렇게 생각을 밝히며 그는 자신과 거리를 두고 있는 레레시아를 가만히 바라봤다. 1번째와 2번째. 그 내용을 듣지 못했던 이야기가 지금 나올 것이 분명했기에 아스텔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2번째는 워프 장치를 통해 바깥에 데려가주는 것. 그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워프 장치를 작동시키는 이가 있어야 했기에 우선적으로 로벨리아의 허락이 필요했다.
"...그 사안은 대장이 허락해준다면 가능할거야. 간단하게 바람을 쐬는 것 정도라면 아마 허락해줄 것 같지만... 어느 정도 제약은 있을 거야. 가디언즈가 없을법한 장소로 말이야. 역으로 탐색당하면 곤란하니까."
그렇기에 나중에 로벨리아에게 이야기를 해보라고 이야기를 한 후 첫번째 내용이 나오려고 하자 아스텔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자신이 이상해져서 위해가 될 것 같으면 조용히 처리해달라는 그 말에 아스텔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뒤이어 그는 고개를 천천히 위아래로 끄덕였다. 처음에 말한대로 그다지 당황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허나 단순히 그 정도 행동으로 끝나지 않으며 아스텔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대장이 딱히 나에게 명령을 하진 않았지만, 만약 정말로 그런 일이 있다면 그럴 생각이야. 너도, 다른 이들도 예외없이. ...에스티아는 다시 한번 설득해보자고 할테고, 대장은 경우에 따라서는 그냥 넘기자고 하겠지만, 나는 이 에델바이스. 그리고 대장에 해가 될 것 같으면 그게 누구라도 검을 들 생각이야. 비밀을 요구한다면 그에 대해서는 지켜줄 수 있어. ...아예 아무도 모르게 묻어버리는 것을 요구한다면 그것도 좋아. ...익숙하거든. 그런 건."
이내 아스텔은 자신이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정리하면서 아스텔은 하늘을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말을 고민하다가 조금 더 말을 이었다.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싸움을 배우고 난 이후부터 타의건, 자의건 여럿 세븐스의 목숨을 끊었어. ...피에 물들어버린 손과 칼에 조금 더 묻는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겠지. ...그러니까 그 점은 어렵지 않게 들어줄 수 있지만..."
그다지 감정을 실지 않고 무덤덤하게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다른 이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을까? 허나 어떻게 본다고 해도 별 상관없다는 듯 아스텔은 다시 말을 천천히 이었다.
"...가급적이면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동료를 처리할 수는 있지만, 내키는 일은 아니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할 것은 하겠지만."
그렇게 말을 마치며 아스텔은 살며시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그녀의 부탁에 대한 허락이었다.
그녀의 빠른 보폭과 처음 만났을 때, 무엇인가를 먹고 있었다는 점 등을 보아 레시는 군것질을 좋아한다 추측했다.
"...하하..회의감? 글쎄~ 그냥..뭐랄까?..."
자신의 감정이 얼굴로 드러나보였다는 것이 창피했던 선우는 얼굴을 붉히며 답을 머뭇거렸다. 자신이 느낀 점을 그대로 말하면 레레시아가 보는 선우는 에델바이스엔 맞지 않는 인물이 될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곳을 나가고 싶지는 않다. 이곳에 있는 건 정말로 좋으니까. 바깥과는 달리 여긴 자유로우니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 당연한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 그러나 가디언즈를 상대로 세븐스를 해방시키겠다는 생각을 가진 선우는 이 당연한 행복을 누리고 있다.
죄책감과 자괴감, 그리고 자신이 이 일을 할 자격이 있나는 회의감이 뒤섞인 감정일 것이다. 옆의 매대에서 초콜릿 한 박스를 꺼낸다. 아마 지금 느낀 이 감정을 쉽게 잊긴 어려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