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일까? 이스마엘은 잠시 수많은 선택 중 직접 움직이게 만든 순간을 곱씹어 본다. 그래, 운명인 것 같다. 그것이 운명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다. 평생 꼬리표가 되어 따라다닐 테지만, 그 꼬리표가 있기 때문에 이스마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은 당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노이즈가 규칙적으로 움직였고, 그 몸짓에는 확신이 있었다. 운명은 받아들여야 한다고들 하며, 스스로 개척한다고들 하던가. 그렇다면 받아들이고 개척할 것이다. 나아갈 수 있는 이정표를 찾고 끝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이미 이곳에 있기 때문에 물러설 수 없으니 더욱이.
"그렇습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말주변이 없다고 하기에는 이스마엘의 경험이 부족했다. 이스마엘의 주변에는 말벗을 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족이 있었고 대화는 자주 나눴지만 그걸로 현재 당신의 말주변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인터넷 루미큐브에서 매칭된 사람들도 대화라기엔 정해진 문구와 이모티콘을 클릭해 서로의 감정만 공유할 뿐이었다. 아는 것이라고는 지금 대화가 잘 된다는 것, 당신과 대화한 덕분에 이스마엘이 잠시나마 끔찍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편하게 대해달란 말에 이스마엘은 다시금 고개를, 그것도 제법 열심히 끄덕였다. 아마 이것이 F로 시작해 D로 끝나는 위대한 단어의 시작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F-Word가 아닌 Friend 말이다. 드디어 내게 친구가 생기는 건가? 아, 장족의 발전이자 아름다운 세상이여! 의무실의 세븐스는 차트를 책상에 내려둔다. 허리를 숙여가며 의약품 중 부족한 것이 무엇이 있나 확인했던 건지, 콧잔등에서 덜그럭대는 안경을 고쳐 쓴다. 타박상? 타박상이라— 중얼거리던 세븐스는 허공에 있던 홀로그램 차트를 끌어와 무언가를 입력했다.
"어디 보자.. 어지간한 거즈나 천 붕대는 다 남아있네요. 일단 필요한 것들은 이거 맞죠? 그리고…… Mx. 이스마엘?" "예, Dr. 스미스 씨." "안드로이드 수리점의 필립 씨가 화상연고를 달라고 한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이스마엘이 손을 노이즈 사이로 밀어 넣고 무언가를 훔친 뒤 뒷짐을 지는 걸 발견한 모양이었다. 피비린내. 이런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 것은 당신도 있으나 산전수전을 다 겪어온 의료진도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세븐스는 안경 너머로 모난 눈을 했다.
"안 볼 테니까 여기 다 준비해드렸으니 꼭 치료하고 가세요."
스미스라 불린 세븐스는 다시금 차트를 챙기며 의약품 재고를 확인하기 위해 간이침대에서 멀어진다. 이스마엘의 주변에서 잠깐 노이즈가 지직 거린다. 당신을 돌아보는 듯한 모습이 어색하다. 이내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검지만 치켜올린 손이 노이즈에 가려져 입이 있을 곳으로 향했다. 오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무언의 뜻이었다.
"잘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의사의 눈은 속일 수 없나 봅니다."
이후 이스마엘은 손목을 향해 손을 더듬었다. 칩 딸깍이는 소리와 함께 이스마엘의 주변에서 노이즈가 사라진다. 단발로 일정하게 잘린 흰 머리카락이 목을 덮은 것이 먼저 보였다. 숙인 고개를 들었을 때, 이스마엘의 눈은 분명 생기 가득한 녹색임에도 서슬 퍼렇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시야가 제한돼 찌푸린 미간에 진 주름과 감긴 한쪽 눈의 탓이 컸다. 피 때문이다. 하관을 덮는 마스크 때문에 다른 부분은 지킬 수 있었지만, 적어도 연한 갈색의 뺨과 왼쪽 눈썹 위에 파편이 스쳤는지 피가 이제 막 굳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오물오물 먹으며 그가 하는 얘기를 듣는다. 중간에 건너주는 과자는 받아서 이리저리 보다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지금은 먹고 있는게 있기도 하니까. 공터와 가까운 벽에 등을 대고 공터를 청소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바닥의 왠 구멍 같은 걸 열어서 거기로 쓰레기들을 몰아넣는다. 저게 그의 세븐스인가. 같은 생각을 하다가 어쩐 일이냐는 물음에 어깨를 작게 으쓱였다.
"그냥- 지나가던 길-"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지나가던 길에 아이들 소리가 시끌시끌해서 와봤으니. 용건에 대한 대답은 그것 뿐이었지만. 달리 할 말은 있었다. 길고 긴 얘기를 들으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을 리가 있나.
"너어 뭐 애들한테 얘기하는 건 좋은데- 혹시나- 만약에- 얘기가 너-무 멀리까지이 퍼질 거라곤 생각 안 해봤어-?"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 말은 결코 한 자리에만 머무르지 않고, 언제, 어디든, 흐름이 생기면 흘러간다. 그렇게 이 마을 밖으로 나가 타 지역의 가디언즈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런 가정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녀와 그가 속한 레지스탕스로서는.
"네가 말한 아는 사람의 범주에- 우리만 있는게 아닐텐데에. 게다가 그들은 우리보다 귀도 훨씬 더 많다구우?"
너무 비약적인 예상일지도 모르지만 이 세상은 꼭 부정적인 방향으로 잭팟이 터지곤 했다. 지금의 사소한 이야기거리가 후에 거대한 태풍을 몰고 올 지는 아무도 모른다. 레레시아는 아이스크림을 몇 입 더 먹고 흐응- 가볍게 목을 울렸다.
"네가 원래 살던 곳에선- 책을 못 샀겠지마안. 여기선 사고만 안 치면- 다 할 수 있어- 자유롭게 물건을 사고- 놀고- 먹고- 서점이라면 저어기 있으니까아. 가서 책 사지 그래애?"
저기라며 가리키는 곳은 대충이지만 그쪽으로 가면 분명 작은 서점이 나오긴 할 거다. 전에는 못 했어도 여기라면 할 수 있다고, 그렇게 알려주곤 남은 아이스크림을 입 안으로 쏙 던져 씹어삼킨다.
랄까 자고 일어나니 이셔의(하관을 제외한)얼굴이 공개되어 있어서 놀랐습니다... 후후 다갓님도 궁금하셨던 거죠? 아무도 다이스갓을 궁금하게 만들어서는 안돼...(헛소리 이셔 눈이 너무 예뻐요 저 긴 속눈썹 흰머리와 대비되는 짙은 피부색... 크아악 귀엽기도 한데 섹시함의 정석이기도 하고 복합적인 게 따로따로 치명타인데 합쳐지니까 으깨진 블러디 레드마냥 저도 으깨질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