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가." 그녀는 당신에게 그렇게 말한다. 확실히 넓은 공간이다. 그치만 자신이 서있으면 방해가 되지 않을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당신은 그녀를 지나치며 걸어가지만, 그녀의 시선은 당신에게 줄곧 고정되어 당신의 움직임을 따랐다.
"엔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모조 보검에 대해서다."
그러고는 당신의 물음에 답하는데, 표정으로 도드라지게 나타나진 않지만 제 나름대로 고민중인 눈치다.
"보검은 엔의 힘을 늘려주는 것 외에도 엔에게 장착 시키는 것도 가능해 보이지만, 엔은 아직 그것을 이해하지 못 한 것 같다."
한 때는 자판기 사용법도 익히지 못해서 안을 찢어 열어젖히려 했던 그녀다. 레플리카 보검은 따지자면 일종의 기계장치이고, 그녀의 세븐스는 그런 기계조차 먹어 살아있게 만드는 것에 특화되어 있으니. 게다가 옛적부터, 능력 활용이 용이하다- 라는 이유로 지금의 최대한 가벼운 복장을 갖추고 있던 그녀였기에.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당연할지도. 당신이라면 그런 일련의 에피소드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인간이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된 것은 아닐까. 인간이기 때문에 서로를 배척하고, 인간이기 때문에 감정에 휘둘리며, 인간이기 때문에 이 순간까지 오게 된 것은 아닐까. 앞으로 보여줄 행보도, 앞으로 행해야 할 일도 인간으로 기인되며 오만으로 비롯된다면. 이스마엘은 그 끝에 반드시 희망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는 불완전하되 완벽한 존재이기에.
"그렇지요. 방심하기 때문에 인간인 존재와 싸우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고도 생각합니다."
문득 그때 보았던 사진이 떠올랐다. 보검을 가진 세븐스가 사람을 얼음조각으로 만들었다며 보여주었던 그 사진. 레지스탕스를 압살할 힘을 가졌으나 오만, 혹은 마지막 자비를 보이듯 보아는 자만 압살하는 그 모습. 그런 존재를 상대하기 때문에 이스마엘은 스스로를 가장 경계해야만 했다.
"인간이 인간답지 못하게 되는 건 한 순간입니다."
이스마엘은 노이즈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떻게 받아들일지, 누구를 대상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는 모두 당신이 판단할 일이다. 어느 쪽이 인간의 선을 넘게 될지는.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라지만 끝내 양쪽 다 인간이 아니게 될 가능성도 적지 않으니. 이스마엘은 더 이상 이 이야기에 답하지 않겠다는 듯 화제를 돌린다. 아마 분위기가 인간에 대한 토론으로 흐르는 것이 지금 상황에서 적절치 못함을 깨달은 것 같다.
"글쎄요."
이스마엘은 작은 웃음을 흘렸다. 기계음 때문에 자조적인 웃음인지, 진짜 웃음인지는 알 수 없다.
"스스로가 정한다거나, 신이라고 대답하기엔 진부하군요. 예. 그렇습니다.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아니었다고 해도, 보검을 가진 세븐스라도 자격은 있노라 얘기할 겁니다. 이스마엘은 덧붙이며 다시금 보폭을 맞추듯 고개를 잠깐 아래로 내렸다. 잠시 뭔가 떨어진 것 같으나 이스마엘은 가볍게 훑고 털어내듯 했다. 그제야 군번줄을 발견했는지 손을 들어 쥔다. 작은 역사를 손에 거머쥐었으나 감히 다시금 옷깃 너머에 숨겨 넣지는 않는다. 당신의 질문에 생각할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이스마엘은 이상이라는 별을 좇게 만든 열정의 불씨의 자취를 하나하나 밟아간다. 그때의 자그마한 순간을 삶을 바꾼 선택이라 할 수 있다면, 그럴 것이다. 다른 과거를 떠올리자 군번줄을 거머쥔 손이 천천히 움직인다. 그래, 모든 것이 기적이었다. 이스마엘은 조용히 달라붙는 재질의 옷을, 목까지 덮는 그 옷의 너머로 군번줄을 숨겼다.
"있었습니다. 아마 다시는 없을 순간이지 않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점차 발걸음이 느려진다. 의무실이 보였기 때문이고, 이스마엘은 노이즈 너머에서 한쪽 눈을 감은 채 당신을 흘끔 바라보았다. 의무실 앞에 도착했을 때, 이스마엘은 문을 열기 전 가볍게 노크했다.
안 그래도 죽죽 늘어지는 말투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느라 더 길게 늘어난다. 그러던가 말던가. 레레시아는 천천히 상체를 뒤로 젖혔다. 땋은 머리가 먼저 바닥에 닿고 점점 낮게 내려가 정수리가 바닥에 닿는다. 완벽한 아치형으로 몸을 제낀 채로 팔짱을 끼고 허공을 응시한다. 금빛의 눈이 두어번 깜빡거리고, 다시 천천히 상체가 올라와 몸을 일으켰다. 흠. 고개가 옆으로 비뚝 기울어지더니 그대로 엔을 돌아보았다.
"엔은- 상상력이라던가 모티브라던가- 떠올리기 힘든 타입 같으니까아."
생각의 폭이 너무 좁지- 몸풀기를 마치고 돌아선 레레시아는 배려라곤 전혀 없이 툭 말했다. 하기사 언제는 같잖은 배려 따위를 해줬던가. 레레시아의 그런 태도에 대해서 엔 역시 느낌으로나마 알고 있을 지도.
"머릿속으로 상상하기 어렵다며언 자꾸 써봐야- 감이라도 잡히지 않겠어-?"
전투에서도 이미지메이킹이 우선인 사람이 있고 경험이 곧 실력인 사람이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 어렵다면 자꾸 써보면 된다. 다행히도 여긴 좋은 훈련장이 있고 상대하기 좋은 사람도 많다. 그리고 레레시아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네가 원하면- 대련, 가볍게 해줄게에."
하다보면 가볍지 않게 될 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여긴 회복 세븐스가 돌고 있으니까. 여차하면 위에서 라라시아를 부르면 된다. 어떠냐며 말하고 허리에 찬 모조 보검을 만지작거린다. 레레시아의 모조 보검은 저번에 비해 좀 더 정교한 장식이 달린 벨트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Q.NMPC 중 현재 유일하게 보검을 해방한 아스텔의 무장은 그냥 장갑 뿐인가요? A.네. 아스텔의 검은 원래 평소에도 들고 다니는 그 검이고 아스텔은 자신의 무장을 철저하게 비행이 가능하고 특유의 고속 이동을 할 수 있도록 맞춘 녹색 장갑이 기본 베이스랍니다. 물론 어깨 쪽에 레이저를 쏘는 발사 장치가 있지만 딱 그 정도?.
나는 책에 있는 주인공을 잠시 바라보았다, 슬픔과 분노에 휩싸인 주인공은 기억도 잃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조직을 향한 끝없는 복수심만을 타올리게 했다. 뭐, 나도 복수심...이 있나? 지금 생각해보면, 정작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 앞에 나타나게 되면 어떻게 할 지도 감이 잘 안 온다.
이 만화의 주인공처럼 멋지게 싸우고, 예전 내 몸을 돌려받을 수 있을까. 뭐 그러면 좋긴 하겠지만, 제대로 될리가 있나.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뭔가 말이야- 내 머릿속에 그냥 내 이름은 제이슨. 이란게 있었어. 고향이나 그런건 하나도 생각이 안 났는데.]
턱을 괴며 담담히 말했다. 주스를 다 마신 게 신경쓰여서, 자판기에서 과자를 하나 뽑았다. [자.] 그녀에게 하나를 건네주고, 내 몫을 하나 더 뽑는다. 그리고 그대로 봉지와 함께 배어문다. 음- 바작바작.
당신이 자신에게 무언가 기대를 품고있는 듯한 낌새를 느끼고서 기분이 좋아졌는지 평소보다도 더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 그녀가 당신의 질문에 어떤 의도가 담겨있는지 알았다면 그런 자신만만한 답변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겠지. 그리고 잠시 후 당신이 되묻는 내용에, 그녀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게 되었다.
"네? 진심...이세요?"
그녀도 괴짜의 범주에 들어가는 편이긴 하지만, 설마 당신이 매점을 사달라고 할거라곤 예상하지 못 했던 것이다. 끽해야 매점에 있는 음식을 전부 터는 정도였겠지. 그녀의 웃는 얼굴은 깨지지 않았지만, 절대 당황의 정도가 낮아서 그런 것은 아니였다. 말 그대로 선 채로 굳어버린 느낌이랄까.
"...잠시만요, 지금 통장잔고가 얼마나 있는지 확인 좀 해보고.."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안 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녀는 버퍼링이 걸린 듯한 움직임으로 통장의 잔고를 확인하려 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개인통장에 매점을 인수하고, 인력을 고용하기까지 할 돈은 없을게 분명한데도.
당신은 여전히 배려 없는 말투를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익숙하게 느끼는 것처럼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당신의 그런 태도에 점진적으로 익숙해져 간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녀라는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으로- 당신이 얼마나 독기 어린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의 숨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순응하고 마는 것이다.
이번에도 그녀는 당신이 퍽 현명하다고 느끼기라도 하는지, 그 붉다란 눈동자를 허공에다 깜뻑거리며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이번 임무에는 당신도 보검을 활용한 장비를 갖추고 싸웠던 것도 같다. 당신의 말에 그녀는 문득 그런 기억이 스쳤다. '직접 겪는 것으로 이미지를 삼킨다.' 확실히 일리가 있다.
"엔은 원한다."
2년동안 서로 마주쳤기에. 당신이 싸움에 있어서 다소 과격한 편이라는 것을 그녀는 안다. 당신도 그녀가 온순하기만 한 그릇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럼 바로 엔을 레시에게 대련시켜도 되나."
그렇기에 둘 사이에 가볍게라는 말의 본 의미는 자연히 잊혀진다. 어느새인가 그녀는 손 끝으로 땅을 짚어 자세를 낮추고서 동그랗게 뜬 눈동자로 당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당신이 그에 응하기만 한다면 바로 달려들 것만 같다. 마치 야생의 짐승이다.
2년. 짧지만 마냥 짧은 것도 아닌 기간이다. 그 기간 동안 에델바이스에 머무르며 만나고 봤던 엔이라는 사람은, 어찌 보면 레레시아가 생각하는 타인에 가장 이상적인 형태였다. 필요 이상의 말과 행동은 하지 않고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감정에 연연하지도 않는다. 임무 시에는 딱 임무만. 그 외에 지금처럼 마주쳐도 각자의 선을 지키며 대응한다. 아니. 그렇게 대해도 귀찮지 않은 사람이다. 엔이라는 사람은.
"진정해- 진정- 원한다면 얼마든지 어울려 주겠지만- 일단 시작 전에- 몇 개 정하고 시작하자아?"
그저 겨루기나 가늠하기 위한 대련이라면 바로 시작하겠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레레시아는 일단 이라며 달려들 듯한 엔을 잠시 저지한다. 아무리 그래도 말하는 건 잘 알아들으리라 생각하며.
"음- 그러니까아. 이건 모조 보검의 이미지를 위한 대련이니까- 시작부터 모조 보검을 사용할 것. 물론 나도 쓸 거야- 그리고 가능한- 전력을 다하는 걸로오. 극한까지 몰려보면 팟- 하고 떠오를 수도 있구우."
극한까지 몰려보면. 그건 어쩌면 경험담일지도 모른다. 피를 토할 정도로 절규한 끝에 얻어낸 단 하나의 가치 혹은 의미일지도.
"둘 중 하나가 쓰러지면 끝나는 거야- 자 그럼."
레레시아는 장갑을 벗어 던지고 맨손에 독액을 둘러 바닥에 뚝뚝 떨어뜨렸다. 푸른색이 선명한 독액이 바닥에 떨어지는 와중에 돌연 엔을 향해 달려든다. 그대로 몸으로 충돌이라도 하려는가 싶더니 엔과 거리가 매우 근접해지자 모조 모검을 해방해 무장을 갖춘다. 하얀 머리와 하얀 피부가 도드라지는 검은 독액의 갑옷을 두른 그녀는 세 개의 날이 달린 클로를 양 손에 생성하고서 엔의 오른쪽 어깨를 향해 휘두른다.
"즐겨보자구우."
클로는 번뜩이는 날도 위협적이었으나 날을 따라 흐르는 푸른 독액 역시 무시하기 어렵다. 약한 마비성 독액은 그리 치명적이진 않으나 인체에 직접적으로 닿거나 스칠 때마다 찌릿찌릿한 통증으로 하여금 반격과 대응에 딜레이가 걸리게 만들 것이다.
부러 과장되게 말하는 목소리가 우스우면서도, 대놓고 하는 아첨 듣는 기분은 꽤 괜찮다. 오, 이래서 사람들이 아부에 쉽게 넘어간다는 건가.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뒤로 하고 총을 제자리에 내려둔다. 그는 멜피의 제안에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가리킨 게임기 쪽으로 가 그 앞에 섰다.
"당연하지. 야, 씨*. 방금 개쩌는 생각 하나 났는데."
사람이 없으니 차례 기다리지 않고 자리 차지해도 좋으니 편하다. 그는 발판 위로 올라가 이리저리 팔방으로 뻗은 화살표들을 내려다보았다. 사실 이런 건 안 해봐서 자신은 없는데…… 뭐 언제는 그런 거 가려 가며 살았었나. 일단 하면 뭐라도 되는 법이다. 발로 바닥을 툭툭 치고 이것저것 살펴보다, 그는 플레이 보조를 위해 놓인 봉에 몸을 기대고 인상을 설핏 찌푸리며 진지한 표정을 한다.
"게임 하나당 1승으로 치고, 승패 총합해서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로 가야 존* 재밌지. 난 방금 저기서 1승 한 거고."
기껏 거창하게 한 제안이란 이거다. 하지만 그는 진지해 보였다. 피곤하다고 했을 때는 언제고 대가가 걸리니 승부욕이 번쩍 고개를 들어서는 눈까지 반짝거리는 것이다. 대답도 듣지 않고 그는 투입구에 돈을 집어넣었다. 화살표들이 쫙 깔리며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우선은 박자에 맞추어, 가볍게 한 발 떼어 밟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