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분들 중에 베테랑이 많아서 그랬겠죠, 처음이니만큼 최대한 신중하게 움직이기는 했지만 확신을 가지고 움직인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가 네 보폭에 맞추듯 조금 멈칫하는 걸 보곤, 이 사람도 상냥하구나. 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싱긋 웃었다. 에델바이스의 뜻이 이런 사람을 모으는 걸까, 아니면 이런 사람들이 모인 게 에델바이스인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너는 발걸음을 옮겼다.
"인간적이라... 조금 어렵네요, 어떤 게 인간적인 걸까요."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 모습이? 그게 자신의 부하라고 해도 장기말로 쓰다가 잃으면 잃는 대로 두는 모습이? 온전히 남을 위해 헌신한다는 게 비인간적인, 그러니까 인간 이상의 어떤 존재에게서 볼 수 있는 이상적인 모습이라면. 이기적인 모습은 반대로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너는 그에게 물음을 던지기도 하고, 너 스스로도 거듭 생각해본다.
"위대한 사람, 그 위대함이라는 건 누가 정하는 걸까요.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라고들 한다. 그럼 승리한 자는 자기 자신을 위대하다고 보는 건가? 그럴지도. 더 위대했기 때문에 승리했다. 패배한 쪽은 위대하지 못했다. 실상은 그렇게 단순하게 나눌 수 없을 텐데도, 너는 이분법에 가까운 사고를 하면서 조금씩 생각을 넓혀간다. 그 와중에 그가 고개를 돌리며 보여진 군번줄, 너는 군번줄을 보았지만 표정을 바꾸지는 않았다. 아마 스스로는 모르고 있으려나. 군번줄이 뜻하는 바를 알고 있었기에 너는 그리 짐작했다. 말해줘야 할까?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고쳐지지 않는 거겠죠, 당신의 말처럼 당당히 치부를 보일 수 있는 세상이라면, 치부라는 건 없을 테니."
말 그대로 이상향, 지금까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세상. 경험해보지 않은 걸 어떻게 긍정할 수 있을까. 그러나 네가 지금 몸담고 있는 혁명의 불씨도 그러했으니, 차별이라곤 없는 세상을 살아보지 못한 자신은 어떤 세상이 올바른지에 대해 항상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됐다. 단순히 뒤집는 건 올바른 게 아니겠지. 그래서 어쩌면 그 중간에 서 있는 이 곳에 네가 도착했을지도 모른다.
"이스마엘 씨는 단단한 심지를 지니고 계시는군요. 그런 세상이 온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미 한 번 꺾은 뜻이기에 새롭게 세워지는 뜻이라고 해도 부실하기 짝이 없을 자신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됐다. 그 역시 한번 생각을 바꿨을까. 아니면 그저...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뜻을 쥐고서, 어떻게 하면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한 방법만을 다르게 찾아 걷고 있는 걸까. 어느 쪽이든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글쎄요, 저는 꿈을 꿀만한 자격은 없어서요."
그저 그의 꿈을 듣고 감탄할 뿐, 언젠가 끝이 난다면- 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죄인에게는 그에 걸맞은 처벌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앞으로도 별일 없을 일만 있었으면. 현실을 알기 때문에 너무 과한 바람인가 싶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상을 바라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특히 이 이상이 사기와 직결된다면 더욱. 이스마엘은 스스로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들 그만큼의 관록이 있다는 것이겠죠. 존경스럽습니다."
적어도 레지스탕스가 세븐스를 위함을 깨닫기 전까지는, 이렇게까지 각자 생사를 넘나들고 살았음을 몰랐다. 이스마엘이 아는 레지스탕스는 국가를 전복시키기 위한 반란분자라는 지극히 편협한 정보뿐이었기 때문이다. 맞춘 보폭에서 더 커지거나 작아지지 않고 평탄한 걸음이 이어졌다.
"리오 씨가 떠올리는 인간적인 범위가 있다면 그것 또한 정답일 겁니다. 다만 저는, 더 최악의 수를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간이라 보고 있습니다. 저였으면 기차에 태웠을 적 바로 죽여놓았을 텐데."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수단이 인간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의 패를 잃어도 이길 수 있다는 오만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너질 여지가 있다는 뜻도 된다. 이스마엘은 그 모습마저 사랑했다. 아직 머리는 갱생할 여지가 있다. 이상향에 조건 미달이란 없다. 이스마엘은 기계음 치고는 제법 나긋한 어조로 덧붙였다.
"우리는 역경을 넘었습니다. 그렇게 마주한 것이 아이들이었고,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희망과 목표를 가진 겁니다. 만약 우리가 역경을 넘었는데, 막상 아이들이 전부 죽어있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그 아이들도 가디언즈처럼 블러디 레드의 동력원이 됐다면? 희망과 목표가 동시에 무너지는 겁니다. 분노가 끓기도 하겠지만 살아있는 건 아무도 없고 무기질적인 AI만 목적지로 가기 위해 구동하는 곳에서 무엇에 화를 풀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인간적이라는 겁니다. 이스마엘이 덧붙이고 한 문장은 목 너머로 삼킨다. 더없이 사랑스럽지요. 역시 이스마엘은 살아가며 인간이라는 존재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글쎄요, 인간의 눈으로 정하되 인간이 아닌 눈으로 정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결국 기록하는 사람이라는 건 달라지지 않지만……."
역사를 정하는 것은 승리자라고들 하지만 패배자도 기록된다. 결국 기준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단순한 승패와 더불어 인간임을 배제하는 시선이겠지. 이스마엘은 아직 자신의 가슴팍에서 자그마한 역사가 보폭에 따라 움직임을 모르는 것 같았다.
"지당히 옳은 말씀입니다."
드러내지 않기에 고쳐지지 않는다. 이스마엘도 잘 아는 일이다. 이스마엘 또한 드러내지 않은 점이 많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 이스마엘 자체가 존재하는 사람인지 조차. 그렇기에 이상향을 꿈꿨다. 심지가 굳다는 말을 들으니 쑥스럽기라도 했는지 이스마엘은 얌전히 뒷짐을 졌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외람된 말이지만 자격 없는 사람은 없노라 생각합니다."
자신 또한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완전해지지 못한다 한들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그렇다면 불완전한 사람도 같이 나아갈 것이고, 완전한 사람도 그 사이에 섞일 수 있다. 이미 나아간 이상 물러나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지극히 이상적이고 허무맹랑한 생각이었으나, 이것이 이스마엘의 신념이었다.
"누구에게나 나은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었을 뿐입니다. 리오 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자격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해야만 했던 선택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감히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