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만히 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다. 이미 몇 번이나 읽은 로봇 만화책, 꼬질꼬질하게 낡고 손상된 물건이었지만, 왠지 이것이 가장 좋았다. 영혼에 파악 하고 와닿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치만, 뭐, 오늘도 달이 예쁘구만... 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옆에 누군가 다가왔다.
[우리 야옹이구만.]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책을 옆에 놓고 벽에 몸을 기댔다. [이몸은 개조 받았으니까, 밤에 자지 않는다구.] 가볍게 농담조로 내뱉었지만, 그 말은 곧 진실이렸다. 나는 천천히 마주친 마리의 차림을 훑어보았다. 슬리퍼에 잠옷이라... 자다 깨서 온 건가? 흐음. 문득 제이슨은 목 말라... 라고 하는 소리를 조금 들었던 것을 생각해냈다.
자판기의 버튼을 툭툭 눌러서, 주스를 뽑아다 그녀에게 건넨다. [자.] 보랏빛 동공은 어둠 속에서 스산하게 빛났다.
그가 너를 들어올렸을 때처럼, 한 손으로 너를 내려놓는다. 두 발이 땅에 닿으니 확실히 안정되는 느낌에 너는 너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아무리 안전하다고 해도 두 발이 땅에 맞닿은 채 서 있는 것보다는 안정감을 주지 못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조금 구겨진 옷을 툭툭 두드려 편다.
"아닙니다, 좀처럼 경험하기는 어려운 일이니까요... 윽!"
기분이 상했다기보다는 놀랐다, 사실 곱씹어보면 기분이 상할만도 하지만 지금은 그 정도로 곱씹을 만한 여유가 없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등에 부딪히는 묵직한 그의 손바닥에 짧은 호흡을 내뱉게 되기도 했고... 등뿐만 아니라 전신이 찌릿찌릿한 감각에 눈물이 고일 것만 같았다, 진짜 고이진 않았지만.
"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집을 찾았으니까요. 유능하시군요."
아파라, 손이 닿는 데까지 뻗어 등을 문지르면서 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상냥하시군요, 제이슨 씨."
그러니까... 꽤 재밌었습니다, 라고 덧붙이면서 살짝 미소를 지어본다. 그의 표정은 거의 변하지 않았기에 감정을 읽어내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그가 무미건조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아니었다. 아이에게 해줬던 행동이나, 지금 자신에게 장난...이랄까 짖궂게 구는 걸 생각해보면. 저 얼굴이 잘 움직였다면 좀 더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많았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문제없으려나.
"저기, 갑작스러웠을 텐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딘가 다녀오는 중이셨죠... 혹시 다른 용건이 있었다거나 그랬던 건 아니십니까?"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내가 말했다. 그런가, 상냥인가... 뭐어 그런가. 이런 딱딱한 몸에도 따뜻한 마음씨가 녹아 있단 뜻일테니까, 나쁘지 않은 일이겠지.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후후, 하고 웃었다. 이어서 그가 어디 용건이 있던게 아니냐... 하던 말에, 나는 쇼핑백에서 뭔가를 꺼내 보여줬다.
...사이보그 전사 실버 봄버와 싸워라! 가디언즈 V!의 한정판 DVD들을.
[오늘은 말이다, 이걸 사려고 기다리고 있었지. 이건 딱 500장밖에 안 파는 거였고, 이건 일주일동안밖에 안 팔아서 빨리 안 사면 동나는거였고. 이거 때문에 난 새벽동안 기다리기도 했고, 사람이랑 말싸움하기도 했지. 그치만 얻었다구... 이것이야말로 정의! 내가 얻어낸 에덴의 과실!]
반짝반짝 빛나는 듯한 모습의 나는, 그야말로 기쁨에 젖어 있었다... 오오, 얼마나 멋진 일인가!
물론 제 생각일 뿐입니다만. 너는 그렇게 덧붙이고는 그가 멋쩍은 듯 웃는 소리에 따라서 미소지었다. 결국은 그도 따뜻한... 적어도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존재인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그가 쇼핑백에서 한정판 DVD를 꺼냈다, 가디언즈 V...
"굉장히 부지런하시네요, 많이 좋아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요."
오늘 사온 DVD를 사기까지의 이야기를 해주는 그가 기뻐하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새벅부터, 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 저 상품들을 사기 위해서 노력을 쏟았다는 건, 그만큼 소중히 여긴다는 거겠지. 한정판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상당한 노력이라고 생각하면서 DVD, 만화책 등을 빌려줄 수도 있다는 그의 말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들어보기만 했지 찾아서 본 적은 없기에."
모처럼 친목을 다질 기회다. 평소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매체도 아니고, 새로운 것에 입문한다고 생각하면 좋겠지.
첫사랑을 하는 나이가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는듯한 당신을 살짝 내려다본다. 본인도 꽤나 사회와 동떨어지게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까지 무지한건 아니였던 걸까. 아이마냥 자신을 바라보던 마리의 시선을 깔끔히 무시하곤 살짝 미소짓는다.
“호응이 없으면 예술가는 일을 못해. 아쉽네, 어떤 사람인지도 못 듣고.”
당신이 말이 흐릿해져가는걸 묵묵히 듣고만 있다. 침묵은 무언의 긍정이라니, 아마 그는 당신의 사상을 존중한다는 암묵적인 뜻을 하고 가만 있는 것일거다. 비능력자 중 세븐스를 좋아해주는 사람은 멍청이들 뿐 아닐까. 남들 하는 대로 가축 보듯 대하면 피해가 없을 것을 굳이 문제 만들고. 하지만 그런 이들 덕에 반항 세력도 생긴다는것은 그도 잘 안다. 자신이 비능력자로 태어날수 있었다면, 누릴것 다 누리고 피해는 최대한 피해갔을 것이다. 그것이 비겁할지언정.
“난 비능력자를 혐오해.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도 이해는 할지언정 용납은 못해.”
작게 말하고선 당신이 눈을 접어 웃는것을 그저 바라본다. 이것은 요전에 당신이 공격하던 대원들을 막아섰던 것에 대한 무언의 답일까. 앞머리를 고정하던 핀은 임무 중 빠졌던 것인지, 얼굴을 살짝 덮어 음영을 준다. 때문에 생기 없이 고요한 노란색 눈.
“회고해 본다면 지금 행복한 걸수도. 하지만 그런 거라면 차라리 지금도 불행한게 좋겠네.”
미래는 지금보다도 더 밝았으면 한다고 말에 섞어 당신에게 줘본다. 반쯤은 자신이 나중에 불행해도 괜찮다는 말로 들릴지도. 양 쪽 다 진심으로 한 말이다. 저녁은 대충 본부에서 먹여도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아이들을 이끄는 마리의 뒤를 살포시 따라간다.
“둘 다 아니기도 하고 맞기도 해. 마음에 쏙 드는 이름으로 불려본 적이 없어서야.”
당신의 질문에 차분히 답하는게 마치 별것 아닌 일로 치부하는 듯 하다. 이어서 부가적인 설명을 해주려는 듯, 뭔갈 덧붙인다.
“어릴적부터 파랑을 뜻하는 단어들로만 불려왔어. 그것 아님 실험체 번호나 실험의 이름. 당연히 전자가 더 좋잖아?”
이런 말을 하는 투는 정말 당연한 사실을 전하는 듯 하다. 조금은 가벼운 어조로 흥얼거리듯, 자신의 답안을 갈무리한다.
“다른 사람들 창의력 보는 꼴도 꽤 재밌고 말야.”
여기 애들은 다 못 배웠는지, 창의력 있게 불러주지도 않지만. 배운 놈 타령을 하는게 겉맞지 않겠지만서도. 그런 무례한 생각이 뇌리를 짧게 스치지만 티는 내지 않는다.
게임이 시작하기 전까지의 짧은 시간, 그는 잠시간의 회고로 빠져든다. 멜피의 말은 통감할 수 있는 유의 것이다. 성애적인 열애 전반에서부터 가장 근본적인 친애, 그런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 그 엇비슷한 감정이라면 그도 바란 적 있었다. 최소한의 믿음을. 부디 나를 혐오하지만은 않아줬으면 하는, 소소하고 하찮은 바람 따위를 말이다. 결말은 말해 무엇할까. 그는 결과를 직감하면서도 믿지 않던 자를 믿고자 나아갔고, 그 우행의 대가로 얼굴을 가른 상흔을 얻었다.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바란다는 행위는 그런 것이다. 어리석은 짓임을 알면서도 쉽사리 멈출 수 없는, 망념과도 같은 불길에 몸 던지게끔 하는 충동.
"그래, 씨*. 존* 개같이 해 보라고. ……이거 응원이야."
상념은 자연스레 끝이 난다. 게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인지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가상의 적을 향해 총구가 돌아간다. 아직까지는 초반부라 그런지 이야기할 짬이 많이 남는다. 스테이지가 전환되는 동안, 그가 잠시 눈 돌려 멜피를 바라보며 눈웃음을 슬쩍 짓는다.
"난 멀리 보는 거 못해. 일단 가까이에 있는 *새*들부터 조진다."
아, 말하자마자 다시 게임 시작이다. 사각에서부터 불쑥 튀어나온 적 하나를 향해 방아쇠를 당겨 치워버린다. 결국은 장난감이다 이건가, 컨트롤러로부터 나는 딸깍 소리는 얼핏 경박하니 거슬린다. 하지만 진지한 몰입을 막아 가벼운 놀이라는 기분이 살아서 오히려 좋다. "그래서 오늘은 로봇 존* 깨부수고 왔잖아." 그와 동시에 게임은 어느새 중반부의 끝자락에 접어들어들었다. 난이도가 올라간 게임에 열중하느라 그는 한동안은 말이 없었다.
실력이 제법 나쁘지 않았지만 그래도 고수들의 구간으로 넘어가기엔 아직 무리였나 보다. 에이, *. 게임오버 화면을 바라보던 그가 작게 욕지거리를 뱉었다. 그것도 잠깐이다. 그는 곧장 멜피를 돌아보며 싱글거렸다. 935점이면 압승이지. 기분이 좋다는 티가 역력하게 드러나는 투로 말하는데, 우쭐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꼴이 참 단순하다고나 할까. 팔짱 끼고 으스대는 어깨가 아주 하늘에 닿겠다.
제이슨이 뭔가 먹을 수 있다는 말에 마리는 이내 종이컵에 제이슨의 몫을 따라서 주었다. 무언가 혼자 먹는 것보다는 같이 먹는 것을 좋아했다. 새것을 뽑아주고 싶었지만 수중에는 돈이 없다. 잠옷만 달랑 입고 나왔는걸.
"키가 작다고 다 애인 건 아니거든요."
키 커서 좋겠네,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마리는 어쩔 수 없이 자라지 않는 몸에 유감이 많았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마리는 쓰다듬을 받으며 가만히 있다가 제이슨이 건네는 만화책을 받았다. 마리의 머리카락은 자고 일어나서 부스스하게 풀어져 있는 상태였는데 제이슨이 제멋대로 쓰다듬은 탓인지 이리저리 더 헝크러진 채였다.
"사이보그 전사 실버 봄버...?"
마리는 만화책의 제목을 읽어본다. 이내 제이슨의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만화책을 휘리릭 훑어본다.
"스승님은 나보고 내 사춘기는 소거당한 것 같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더더욱 또래나 같은 나이대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한다구. 그래서 이쪽으로 온 거기도 해요."
전에 있던 레지스탕스에서는 나이차이가 적어도 15에서 20살 넘게 났었는데다가 제 또래는 아무도 없었었다. 애정도 많이 받고 애취급도 많이 받고 그런 곳이었으나 이제 자신도 독립할 때가 된 것이었다. 사춘기를 누리기에는 사실 이 세상이 녹록치는 않다.
호응이 없어서 일을 못한다는 말이 얄밉게 들린다. 마리는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유루를 보다가 이내 캐내는 것은 포기한다.
"응, 나도 이해해요. 내 주변에도 유루처럼 생각하는 사람들 많았었고."
마리가 있었던 이전 레지스탕스는 폐쇄적이고 조금은 과격한 이들이 많았던 곳이었다. 그래서 마리도 비세븐스를 혐오하는 이들을 많이 알았다. 그저 서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가는 것 뿐이다.
"아직 이뤄야 할 것들이 남았으니까."
그것들을 이루고 나면 그 다음의 사회는 더 구성원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길 바랐다. 본부로 다시금 되돌아가는 아이들을 따라 걸으면서 마리는 유루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유루는 실험실에 있었구나. 자신도 실험실에서 탈출했다는 이들을 본 적이 있었다.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었고. 막연히 끔찍하고 힘들었겠구나 생각할 뿐이었다. 자신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이름이라는 건 어떻게 불리느냐보다 누구에게 불리느냐가 중요하니까. 그 사람이 누군가를 어떻게 부르던지간에 그 사람이 그 누군가에게 의미있는 이가 되는 순간 그 호칭이 바로 이름이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본래 이름이라는 건 다른 이들이 짓고 다른 이들이 불러주는 것이니까. 마리의 말은 유루가 들은 호칭이 유루의 마음에 들지 않은 게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저 호칭을 이름으로 삼고 싶을 만큼 그 사람들이 유루에게 의미있지 않았는 것 아니냐는 그런 뜻이었다. 그래서 이름이라는 것은 본래 그 사람에게 의미있는 이들이 고심해서 지어주는 것이었다. 혹은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 그 자체로 특별해지거나. 제 이름이 저에게 그렇듯이.
"그럼 나는 당신을 리버(river)라고 부를래요. 내가 살던 곳엔 강이 하나 있었는데 그 강은 크고 푸르렀고 아름다우면서도 무서웠고 반짝이면서도 어두웠었는데 딱 당신 같아."
뭐어, 변덕스러웠다는 뜻이었다. 나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고심했던 이름이었다. 그 호칭이 자신만 부르는 것이라고 해도 누군가에게 이름을 붙인다는 건 꽤 고민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내 그들의 발걸음은 다시금 본부에 와 닿을 것이었다. 아마 아이들을 데리고 식당으로 갔을 것이고 생존자를 담당하는 이들이 그 아이들을 데려갔겠지.
"난데없이 벼락부자가 되었다면 무엇부터 할 거야?" 쥬데카: 갑자기 많은 돈이 생긴다면... 평소에 눈여겨봤던 물건부터 사지 않을까 싶습니다. 딱히 없지만요. 그게 아니라면 음, 하고싶은 일이 생각날 때까지 기다릴지도 모르겠네요. 불우이웃 돕기는... 돈으로 직접 지불하는 것보다는 다른 방법을 좀 써보고 싶습니다. 벼락부자라면 반대로 갑자기 빈털터리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제가 없을 때 망가지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 테니까요. 뭐어... 결국은 가정일 뿐입니다만. 하하...
"키가 그 정도밖에 안 돼?" 쥬데카: ......물론 그, 평균에는 못 미치지만 생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 식의 말씀은 삼가해주세요, 조금... 신경이 쓰이니가요. 저라고 해서 제 신장을 신경쓰지 않는 게 아니니 이 이야기는 그만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번 시험은 어땠어?" 쥬데카: 모르는 건 어떻게 해도 풀 수가 없었습니다. 공부야 할 수 있는만큼은 했다고 생각하지만 돌아보면 더 열심히 할 수도 있었겠죠, 결과는 어찌되든 상관없습니다. 좋든 나쁘든, 전부 제 행동의 결과니까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저는 뒤를 돌아보며 후회하고 싶지 않아요. 쉽지는 않지만.
>>650 물론 괜찮습니다 하하 이야 내가 이스마엘이랑 일상한다!(동네방네 자랑 그러면 상황은 어떻게 할까요? 이셔는 에델바이스에 얼마나 있었을까요... 쥬데카는 따끈따끈한 찐방같은 신입이에요(?) 이제 일주일 가량 됐나! 선관...은 비밀이 많으니 조금 어려우려나, 어느쪽이든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