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결국, 이야기를 해 줬다는 건 충분히 좋게 받아들일 만하다고 생각하면서 너는 웃었다. 어쨌든, 신뢰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었으니까.
"네, 제가 확실히 하지 않았으니, 그 부분은 감수할 생각입니다."
그가 어떻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었다. 돌고 돌아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의심한다고 해도, 직접 말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결국 심증은 심증일 뿐, 그게 네 능력이 비효율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오히려 이런 태도가 신뢰를 떨어트리고,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지만 지금 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의 싸늘한 표정을 보니 조금 씁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마찬가지로 네 상황 역시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까 역시, 어쩔 수 없었다.
"괜찮습니다. 비밀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는 법이니까요."
물론 침묵 끝에 그가 미소를 띄우며, 물론 환한 미소는 아니었지만서도 미소와 함께 신경쓰지 말라는 듯 이야기하자 너 역시 옅게 웃으며 이야기한다. 씁쓸함은 남았지만.
"그게... 죄송하다는 말을 의식적으로 하지 않으려다 보니..."
어쩌다 보니 변명하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불편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대화를 통해서 봤을 때, 그는 이 말도 큰 의미를 두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가? 잘은 모르겠다.
당신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자 "그런가." 하고 시선을 살짝 옆으로 빗긴다. 말 뜻은 이해했지만 나름 기대하고 있던 건지 눈알이 또륵 굴러가는게 보인다. 그러다가도 금세 당신이 물어오자 그녀는 다시 눈을 마주치며 이렇게 대답한다.
"부작용은 없었다. 하지만 그 모조 보검은 엔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구조였다. 그래서 엔은 모조 보검을 삼켜서 엔과 같도록 만들었다."
엔의 모조 보검은 단순히 힘을 해방시키는 물건일 뿐 아니라, 고기가 붙어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있는 하나의 유기물이 되었을 것이다. 삼켰다는건 분명 그런 의미겠지. 그녀를 알고있는 당신이라면 그 뜻을 금방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해도 보검의 원래 기능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겠지만.
"지금은 그것을 기준으로 엔에게 여러가지를 시켜보고 있다."
이정도라면 답이 되었을까. 마치 그렇게 말하듯 그녀는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무한한 신용이 느껴진다고 해야할지. 그런 그녀가 당신의 말에 "임무?" 하고 되물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 하지만 엔은 준비 되어있다."
그저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말한 순간 그녀의 주위를 감고있는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다. 느슨했던 공기가 경직된 듯 한.
"엔은 대장이 원할때 움직일 수 있도록 항상 준비하고 있다."
훈련이었다고는 했지만 명령에 아스텔도 주저없이 공격했던 그녀였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당신이 그럼 여기서 그 힘을 보여봐라- 라고 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보검을 불러낼 기세다.
부모님을 잃고 난 뒤 구출된 이후에도 꽤나 오랜 시간을 멍하니 보냈던 것 같다. 현실을 부정하기도 하고 저 스스로를 자책하기도하고. 그래도 시간은 마음의 상처를 낫게 해주었지만서도 여전히 마리에게 있어서 인생은 회색빛이었다. 레지스탕스 언니들과 아저씨들은 그게 내가 또래를 만나지 못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지만서도. 사실은 그런 게 아닐지도 모르는데.
"그랬으면 좋겠다."
초면에 생각보다 좀 무거운 이야기를 한 것 같았다. 쥬데카의 미소를 보면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쥬데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다음에 봐."
마리는 빈 깡통을 쓰레기통에 버린 뒤 총총총 휴게실을 나갔다. 나가려다 한 번 뒤를 돌아 쥬데카를 바라봤다가 이내 다시 걸음을 옮겼을 것이었다.
"그 에스티아도 분석하지 못한 물건이야. 솔직히 나도 어떻게 만들었는진 모르겠어. 그 비법을 아는 이는 오직 하나. U.P.G의 총장. 그 사람 뿐이야."
쉽사리 분석할 순 없을 거라고 로벨리아는 딱 잘라 이야기했다. 자신이 아는 것은 그 보검을 만들기 위해서 정말로 많은 연구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보검 때문에 많은 피가 흘렀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 그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진 않으면서 그녀는 쓰린 속을 꿀꺽 집어삼켰다.
아무튼 엔과 같도록 만들었다는 말에 로벨리아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능력에 대해서는 이것저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그것에 대한 옳고 그름은 자신이 판단할 사안은 아니었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유용한 느낌이라면 그것으로도 상관없었다. 어쨌든 레프리카니까 조금 더 다른 방향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던 거였고. 문제는 그것이 정말로 유용하냐였다.
"서두르지 마. 아스텔이라면 모를까. 너희들은 아직 단체로 움직일 필요가 있어. 벌써부터 임무를 혼자서 보내거나 하진 않아."
딱히 그녀를 못 믿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보검이 있는 이상 그 힘은 어지간한 세븐스보다 훨씬 강화되었을테니까. 허나 제 0 특수부대는 팀이었다. 아직은 팀으로서 함께 움직이는 것이 조금 더 중요했다. 각자의 연계 및 능력 활용, 그리고 판단력 등등. 모든 것이 검증이 안된 이 상황 속에서 그녀만 혼자서 보낼 수는 없었다. 물론 그녀도 혼자 보내달라는 의미는 아니었겠지만.
"무엇보다 한동안 아스텔은 별개로 움직이게 될 거야. 자신감이 넘치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무리해서 너무 앞서가진 않도록."
아주 가볍게 이야기를 하나 그것은 꾸짖음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무리하지 말라는 정도의 말이었으니까.
모처럼 그녀가 당신의 말뜻을 그대로 이해했다. 아마도 에스티아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에델바이스의 개발 총괄인 그녀는 무엇이든 뚝딱 만들고 도움이 되는 설비들을 제공해준다. 이를테면 지하의 훈련장 같은 것들 말이다. '대단한 인간임에 틀림이 없다.' 기계를 잘 모르는 걸 넘어 일단 입에 넣어보고 생각하려고 하는 엔의 안에서, 에스티아는 그런 존재로 남아있었다.
"엔은 숙지했다."
"대장의 명령을 기다리겠다." 그렇게 말하자 경계를 허물듯, 순간 곤두섰던 주변의 공기 또한 가라앉는다. 당신의 속깊은 생각은 잘 모르긴 몰라도, 팀으로 움직이는게 중요하다는 것을 그녀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테다. 그러고보면 생각나는 것도 하나 있다.
처음에는 5퍼센트가 고작. 3년을 연구해서 만들어낸 것이 바로 지금의 30% 정도를 구현하는 보검이었다. 그렇다면 100%는 대체 얼마나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지. 하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일단은 1/3의 힘 정도라도 사용할 수 있으니 그것이라도 보급하자.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다른 요소로도 충분히 채울 수 있을 거라고 로벨리아는 생각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이번 첫 미션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최고의 무대가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무리시킬 생각은 없었지만.
한편 아스텔의 이름이 엔의 입에서 나오자 로벨리아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아스텔처럼 되고 싶다라. 그 말에 바로 대답을 하진 못하나 이내 로벨리아는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아스텔이 그 말을 들으면 절대로 자신처럼 되면 안된다고 이야기를 하겠지."
물론 자세한 것은 언급하지 않았으나 그녀의 목소리엔 확신이 담겨있었다. 아스텔은 강했다. 허나 그 강함의 뒤에는 뭐가 있는가. 아니. 애초에 왜 그런 실력이 있는가. 그 사실은 그녀의 입에서 마음대로 이야기할 사안이 아니었다. 당연히 자신은 알고 있었다. 지금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단지 그것을 남에게 쉽게 이야기할 수 없었기에 말을 하지 않는 것 뿐.
"그리고 나 역시 그 생각엔 동의해. 아스텔처럼 되면 안돼. 너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해. 물론 강해지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강해지는 것도 여러 종류가 있으니 말이야."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아스텔에겐 미안한 이야기였으나 그녀는 대원들 중 그 누구도 아스텔처럼 되지 않기를 바랬다. 진심으로 진지하게, 마음을 다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