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 그가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말은 이렇게 해도 그럴 생각까지야 없지만. 돌림자 쓴다는 얘기는 제 쪽에서 먼저 한 거고, 이름 자체에 큰 유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애초에 이름이 있어도 그다지 불리질 않았는데 의미가 있기나 할까. 그는 깔끔하게 비워진 엔의 접시를 보고선 저도 남은 것들을 대충 끌어모아 처리해버렸다. 엔이 먹는 것만큼 빠르지는 않아도 마시는 것과 엇비슷한 정도는 되었다.
여승우는 제 말투의 의미전달력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이전보다 비속하게 바뀌어 가는 걸 알면서도 고칠 생각이 없다. 그러니 때로 의미전달에 실패하더라도 알아듣지 못한 남을 탓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한쪽 입술을 픽 끌어올렸다. 눈썹 끌어올리며 짓는 표정이 썩 짓궂은 감이 있었다.
"재주 좋네. 그런 건 어디서 배웠냐?"
그러다 금세 고민하는 기색을 되었다. 음, 어쩐지 기분이 묘한 느낌이다. 나쁘지는 않은데 이게 정확히 어떤 감각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것이 저보다 어린 누군가를―정신적인 면에서― 어여쁘게 여기는 심리라는 걸 그는 몰랐다. 기분 나쁜 느낌은 아니니까 몰라도 상관 없겠지. 그는 대충 무시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좋은 TMI나 이 작품 맨 처음으로 스페셜 스킬의 이름이 나온 아스텔의 경우. 컷씬이 만약 나왔다고 한다면 살짝 몸을 왼쪽으로 비튼 상태에서 눈을 감고 있고 왼손으로 검집을 잡고 있고 오른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데 이제 검을 뽑는 중의 자세라서 오른손과 뽑힌 검이 얼굴의 일부를 가리고 있어서 감고 있는 눈과 닫혀있는 입만 얼굴에서 보이는 그런 컷씬이 될 것 같네요. 당연히 검에는 녹색 빛이 반짝이고 있고. 대충 그런 느낌?
수심 한 점 생기지 않을 환한 날이다. 지난밤 시원하게 내린 비가 열기를 식히고, 무더위가 정점을 찍는 여름 중반을 넘겨 그늘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서늘하다. 하늘은 맑고 내리쬐는 햇살이 따사롭다. 저마다의 일로 바깥을 나서는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을 흘리게끔 하는, 아름다운 늦여름의 정경.
그런 세상은 모르는 자리가 있다. 동떨어진 곳, 벽은 어두운 회색이고 천장에는 전등이, 바닥에는 침구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방. 공간은 넓지만 든 것은 하나 없이 휑했다. 온통 칙칙하고 건조한 빛으로 칠해진 공간이 살풍경스럽다. 공간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널찍한 방은 통일성조차 없었다. 한 가운데에 놓인 티 테이블은 자못 생뚱맞게 보일 정도였고, 찻상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테이블 위에는 차 한 잔 놓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문제쯤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그 앞에 나란히 앉은 사람이 둘이다. 그중 남푸른 빛 머리의 소녀가 픽 웃었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었을까, 아직은 어린 티가 더욱 많이 남은 얼굴이 실소하듯 가벼이 샐그러진다. 맞은편에는 그보다 작은, 아직 소아라 일러도 될 나이의 남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마주보는 남자아이의 차림새는 괴상했다. 꼭 그가 이 공간에 속하는 이질물임을 증명하는 것처럼. 바깥은 여름이건만 손목까지 틈 없이 덮는 장갑을 끼고 신발은 발목 위에 닿는 긴 것을 신은 채였다. 쾌적하지만 아직은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목 끝까지 오는 긴 옷을 겹겹이 껴입고, 숨결조차 감추려는 양 마스크를 써 눈만 보이는 얼굴이다.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삐죽삐죽 잘려 엉망이었는데, 모자가 조금 들려 있다는 걸 깨달은 그가 후드를 깊이 당겨 누르자 이제는 머리카락 한 올 함부로 내보이지 않게끔 단단히 잠근 차림이 되었다. 사람을 쪄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냉방을 돌리고는 있었지만, 계절에 맞는 평범한 옷을 입은 소녀를 배려하기 위함인지 강도가 그리 세지는 않았다. 열이 오를 만한 옷차림에 땀을 흘리면서도 그는 발간 얼굴로 즐거이 웃으며 조잘거리기만 했다. 한껏 신이 나 다리를 동동거리면서도 얌전하려 노력하는지 행동이 과하지 않았다. 괴상한 방, 음침한 구석. 장소에 반해 이야기 주제는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들이었다.
다만 대화의 양상이 이상했다. 소녀가 한 마디를 하면 남자아이가 매번 되묻는 것이다. 어절 하나마다 말을 자르는 대화방식은 그다지 일반적인 경우는 아닐 테다.
"그래서 제나한테 책을 빌려줬는데─" "제나가 뭐야?" "사람 이름." "빌려주는 게 왜 싫어?" "그 애는 물건을 험하게 쓰거든. 지난번에도 책 빌려줬다가 끄트머리를 찢어놓고 돌려줬단 말이야." "찢어지는 거 왜 싫은데? 난 저거 찢어, 가끔. 재밌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가리키는 것은 방의 한쪽 구석, 칙칙하게 덧발라진 회색빛 벽지였다. 벽면은 상태가 엉망이었다. 넓은 면 하나가 다 해지고 떨어져 벽면 일부가 드러나 보였다. 그 짓을 한두 번 한 것이 아닌지 뜯어진 벽지를 덧댄 장수가 열 겹은 족히 넘어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본 소녀의 표정에 질린 빛이 떠올랐다. 그는 말을 고르려다 그만두었다. 무어라 설명을 해 줘야 하겠지만 귀찮다는 기색이다. 한창 예민할 나이에 자꾸만 귀찮게 구는 정상도 아닌 어린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기엔 피곤하기도 하고. 가끔 들러 이야기 정도는 나눠 주지만 그는 보모가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난 싫어. 사람은 각자 좋아하는 게 다 다르거든." "그렇구나. 승현이는 방 좋아해?" "……아니."
좋아할 수 있을 리가. 짤막하게 답한 소녀의 시선이 사방을 향했다. 방에는 입구 뿐이다. 그마저도 평상시엔 굳게 잠겨 있다. 창문이 없어 그 사실을 의식할라치면 매번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승현이 아무리 그래도 창문 하나조차 없는 것은 너무하지 않냐며 바꾸어 달라 부탁했을 때는 기각 당했고, 자신이 방문할 때마다 불편해서 싫다고 사정을 하니 그제야 알겠다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다만 여닫는 건 불가능할 거란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수긍했다. 이 녀석의 방에 직접 공사를 하는 건 불안하니 잠깐 다른 방에 빼놓은 다음에 창문을 만들 거라 하던데, 저건 다음주에 무슨 일 있는지 알기나 할지 모르겠다.
"나는 좋아. 여기에서 저기까지, 응."
그런 것도 모르고 남아는 활기차게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다. 영락없이 자기가 가진 물건을 자랑하는 투였다. 그와의 대화는 언제나 이랬다. 이야기는 늘 두서 없이 제 말만 하는 형식이고, 실 연령에 비해 수준이 심각하게 떨어진다. 상식은 전무하고 나이가 차 가면서도 그동안 제대로 된 대화 상대 하나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처음부터 말을 전혀 모르지는 않았다는 점과, 늦게나마 시작한 의사소통 능력이 점차 나아지고 있다는 게 다행일까. 저가 저것 만나는 일을 허락한 것도 그렇고, 그래도 사람이라고 완전히 짐승 키우듯 할 생각은 없었나 보지. …아니, 차라리 집에서 기르는 개가 저것보다는 더 호사를 누릴 거다. 그 생각을 하려니 승현은 문득 제 처지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놈 상대로 아는 척하는 게 뭐 좋다고 이러고 있담. "갈게." 기분이 영 나빠져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렇게 끝나야 했을 텐데, 내내 평온하게 흘러가던 분위기가 싸늘히 가라앉은 건 그때였다. 승현이 흠칫 걸음을 돌리려던 걸 멈추고 뒤를 돌았다. 시선이 아래로 향한다. 손끝, 아주 미미할 정도의 손짓. 장갑 낀 작은 손이 테이블 위를 짚은 제 손과 얼핏 닿아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인지 그것은 저조차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한순간 낮아진 목소리가 으르렁거린다.
"누굴 죽이려고……."
일갈하며 테이블 아래를 걷어차니 손이 떨어졌다. 아, 가뜩이나 나쁘던 기분이 더 상했다. 그는 무어라 더 쏘아붙이려 할 말을 찾았지만, 한소리 듣기가 무섭게 침울해진 얼굴을 보니 김이 새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이라도 제 심기를 거스른다면 '다음'이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알아챈 것이리라. 이상하게도 그 꼴을 보니 꼬여가던 심사가 풀어지는 듯했다.
"미안." "됐어. 화난 거 아니니까 신경쓰지 마."
저를 보며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우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건, 아량이다. 적선이라 해도 맞을 테다. 승현은 자신이 차버린 테이블을 다시 끌어와 돌려놓고, 그 위에 손 얹어 가벼이 몸을 숙인다.
"이건 비밀인데, 다음주에 널 잠깐 옮길 거야. 그때 나갔다 오자."
뭐, 그래 봤자 정원 흙이나 밟으면 다행이겠지만. 원래 일탈은 되든 말든 재밌는 것이라지 않나. 그는 드물게 실소가 아닌 얼굴로 다정하게 웃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