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감이 있다는 말에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친해지기 전에는 이름을 불리고 싶지 않다는 것일까? 그것도 나름 합당한 이유이기에 마리는 더이상 말을 가져다 붙이지 않았다.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냐, 그게 편하다면 그걸로 괜찮아.”
그것과 마찬가지로 존댓말이 편하다면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불편하게 할 이유도 없었고. 몇 없는 또래였으니까 서로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리오라고 불러달라고 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으나 이내 뒤에 붙은 그린우드 양이라는 말에 조금 낯빛이 흐려진다.
“음, 알겠어. 리오. 그런데 나는 마리라고 불러줄 수 있을까? 그린우드라고 불리면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각나서….”
살짝 바닥으로 향한 시선이 깜빡깜빡였다가 다시금 쥬데카를 바라본다. 쥬데카, 그러고보니 제 친구랑 이름이 비슷하네. 쥬드라는 이름은 흔하니까 종종 볼 수 있는 이름이지만서도. 마리는 기억이 오래되어 쥬드가 애칭이 아니라 이름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 오랜 기간을 생각하면 헷갈리는 것도 당연할 만큼 시간이었으니.
"그래. 그래. 잘했어. 잘했어. 혹시나 몸에 상처라도 생기면 차후 실험에 변수가 생길 수 있으니 최대한 문제없이. 알고 있지?"
모니터에 비치는 것은 진한 갈색 콧수염이 상당히 인상적인 누군가의 실루엣이었다. 목소리로 보아 중년 남성인 것은 분명해 보엿지만 그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허나 그 실루엣의 주인공이 자신의 콧수염을 손으로 만지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게 보이고 있었다. 그 중년 사내의 실루엣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가디언즈의 멤버들이었다.
"그럼 어떻게 이송하면 좋을까요? 조금 시간은 걸리겠지만 차량으로..."
"차량으로 이송하는 것은 시간이 너무 걸리잖아. 번거롭게 왔다갔다 해야하고. 그곳에 조만간에 블러디 레드를 보낼테니까 그때까지 대기하고 있어."
"블러디 레드. 그 이송 열차 말입니까? 확실히 그 열차라면 빠르게 이송이 가능하긴 합니다만... 너무 과한 것 아닙니까?"
블러디 레드.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진 알 수 없었지만 말투로 보아 심상치 않은 것임은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단순히 사람을 이송하는 것으로 쓰기에는 조금 애매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허나 별 상관없다는 듯 실루엣의 주인공은 껄껄 웃기 시작했다.
"물론 조금 오버하는 감은 있지. 허나 냄새를 맡은 파리들을 이참에 한번 정리해둘까 싶어서 말이야."
"파리라고 하면?"
"내 실험체를 빼돌리려고 하는 고약한 파리들이지. 안 나타난다면 그것으로도 상관없지만 나타나서 실험체를 빼돌리는 시도라도 한다면 말이야. 앞으로도 계속 그럴게 뻔하잖아? 그러니까 혹시나 나타날지도 모르는 그런 파리들을 일망타진 해둘 필요아기 있다는 거지. 케헬헬"
참으로 특이한 웃음소리를 내뱉으며 실루엣의 주인공은 어깨를 들썩였다. 이어 웃음소리가 조금 줄어들었고 실루엣의 주인공은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실험체를 이송함과 동시에 차후에 이것저것 귀찮게 할지도 모르는 테러리스트들을 쓸어버린다. 이것이야말로 이 천재의 천재적 발상이지. 자. 그럼 블러디 레드를 보낼 때까지 실험체들이 다치지 않게, 그리고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잊지 마렴. 알겠지?"
기분 나쁘내고 물으니 단박에 대답이 돌아오길래, 그러냐고만 했다. 이해해서 하는 말인지 그냥 하는 말인지- 아니, 아무래도 상관없다. 태클만 걸지 않는다면 서로 언성 높일 일은 없었다. 지금이 그랬고, 잔잔한 밤공기는 여전히 평화로울 수 있었다.
허공을 보고 있는 레레시아의 얼굴 옆으로 따끔한 시선이 느껴져온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마리가 그녀를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서로 얼굴 안 보게 하려고 옆에 앉으라고 했는데, 저렇게 앉을 줄은 몰랐지. 그래도 얼굴을 아예 돌린다거나 하진 않아서 옆얼굴의 미미한 표정 변화 정도는 마리에게 다 보였을 것이다. 그다지 극적인 변화는 없었겠지만.
"잘 모르겠다."
마리의 시선을 받으며 마리의 얘기를 쭉 들은 끝에, 레레시아가 꺼낸 말은 그랬다. 잘 모르겠다. 그녀는 처음부터 세븐스였으며, 일부러 말투와 행동을 바꾸면서 그로 하여금 남들이 어떻게 느낄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모르고 속아도 그만이고, 알면서 모르는 척 해도 그만이다. 그녀가 원치 않는 거리만 지켜준다면.
"나는 아니지만, 라라는 너랑 비슷한, 가까운 생각을 하고 있어서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기도 해. 라라도 사람을 사람으로 보려 하지 세븐스냐 아니냐로 구분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라라 만의 생각이야. 지극히 개인적인 가치관."
지극히 개인적이며 사적인 생각. 그렇기 때문에 라라시아는 그녀 이외의 사람에게 그 생각을 꺼내거나 심지어 가족인 레레시아에게조차 동조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평소에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거,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아무래도 좋으니까 신경 안 쓰거든. 그런 나한테 그런거 물으면 곤란하지. 정 궁금하면 직접 부딪히는 수 밖에 없어. 아니면 지금까지처럼 지켜보는 걸로 만족하는 것도 방법이라면 방법이겠네."
나라면 현상유지 할 거야. 짧게 덧붙이고 다리를 풀어 반대로 꼰다. 한 팔을 벤치 등받이에 걸쳐 늘어지려는 몸을 받치고, 그 팔에 머리를 적당히 기대며 그리고, 라고 말한다.
"이름 부르다 혀 꼬이지 말고. 레시라고 불러. 요전에 훈련실에서도 그러라고 해줬잖아."
첫 인사를 나눌 때의 얘기다. 레레시아는 언제 누구와 통성명을 하더라도 늘 그렇게 말해왔으니, 마리에게도 분명 그렇게 말한 걸로 기억했다. 레시- 라고 불러- 라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는 널 모르는 듯했다. 너는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내쉬면서도, 마음 한 켠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을까. 아니면 네가 그녀의 기억에 자리잡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어쩐지 전혀, 아픔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아야 할 목 뒤가 쓰라렸다. 타는 듯한 통증, 저절로 인상이 쓰일 것만 같은 그 통증에 그는 살짝 고갤 돌리고 모자를 쓰며 표정을 가렸다. 좀 나아지길 바라면서.
"네, 고마워요. 벌써 꽤 오래... 이렇게 말을 해왔거든요."
그래도 나름 편하게 대하기 위해서, 그녀에게는 최소한 딱딱한 말투는 피하기로 너는 결정했다. 그녀가 그걸 알아채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너는 그렇게 생각하며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조금씩 가라앉는 듯한 작열통에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 너는 그녀의 표정이 조금이지만 달라지는 걸 눈치챈다. 뭔가, 말실수를.
"아, 아...! 미안해요, 그.. 아니 마리, 정말로 미안해요. 그런 줄은 몰랐어요."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너는 안일했다며 스스로를 다그쳤다, 조금 가라앉는가 싶었던 통증이 다시금 되살아나듯, 너는 본능적으로 네 목 뒤쪽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전혀 나아지지 않았지만 자극을 주다 보면 나아지는 일도 있었으니까. 너는 정말 미안하다며 거듭 그녀에게 사과했다. 그녀의 가정사에 관해서도 전혀 모른다니, 그녀는 전혀 네가 누군지 모르겠지 의도치 않았지만 그렇게 만들어버린 상황에 너는 가슴이 아팠다.
"마리, 뭐라도 좀... 마실래요?"
분위기를 좀 바꾸기 위해서 너는 서투르게 음료를 권했다, 그게 아니라면 뭔가 씹을 거리라도 있으면 좀 기분이 가라앉지 않을까 싶어서.
쥬데카는 생각보다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는 것에 어색함을 느끼는 사람들 중 한 명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서로 이름을 부르고 말을 편하게 놓고 하는 것을 쉽게 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지 않던가. 전에 있던 곳에서도 어린 자신에게도 존댓말을 해주던 이가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은 없었다.
자신의 말에 그런 줄 몰랐다며 안절부절 못하는 그의 모습에 마리는 눈을 깜빡였다.
“괜찮아.”
그 모습은 정말로 괜찮다는 것이었다. 부모님 그립기는 하지만 벌써 10년이나 지난 일이었고. 이런 사회가 문제였고 나쁜 것이었으니까.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마리는 이곳에 들어온 것이기도 했다. 자신이 죽어서 그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다면 죽음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마음이었다.
“응. 차가운 이온음료로. 안에 들어가서 마실래?”
안이라고 하면서 기지로 이어지는 비밀 통로를 가리켰다. 여전히 밖에서 무언가를 먹는 것은 불편하고 꺼려졌다. 기지 안은 안전하니까 괜찮지만서도.
“자판기 고장났더라.”
휴게실에서 봤던 자판기가 고장나있는 게 생각나서 이야기했다. 휴게실에서 뭔가 마시려면 여기서 사서 내려가는 게 맞았다.
입단한 이후 레레시아와 라라시아의 호의로 머리를 자를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여러 번 호의가 이어지곤 했다. 여벌의 옷을 지원해주기도 하고, 먹을 것을 지원하기도 했다. 금전적인 지원도 있었다. 이스마엘은 수중에 든 것이라곤 한 푼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호의가 한두 번 오가는 것은 괜찮지만 모 동방예의지국의 정을 넘어선 일이 계속 되니, 이스마엘은 도망치듯 산책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 처음 뵙겠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렇지만 도망 나온 곳에도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이스마엘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보는 사람이다. 누굴까? 지금까지 인사한 사람은 많았는데,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 이스마엘은 당당히 인사를 건넸다. 기계음 그 자체인 목소리가 이질적이다. 꼭 안드로이드 같다. 그렇지만 안드로이드에겐 없는 것이 이스마엘에겐 있었다. 활기차고 긍정적인 어조 말이다.
대화를 하는 듯, 혹은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듯,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레레시아는 선문답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원래' 모습으로 누군가와 얘기를 하는게 거진 2년 만이니 그럴 것이다. 늘 얼굴을 가리던 무언가가 없어진 것처럼- 조용히 반대쪽 손을 들어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부드럽지만 거친 장갑의 감촉이 얼굴 위를 지나갔다.
"그래."
그녀가 해준 말에 대해 그래보겠다는 나름대로 긍정적인 반응이 들렸지만 이번에도 짧게 중얼거릴 뿐이다. 레레시아의 말이 어찌되었든 마리의 생각은 결국 마리 본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니. 거기에 이견도 의견도 표할 자격은 없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대화를 이어나간다...
"...호기심은 적당해야 현명한데."
레레시아의 머리가 비스듬히 돌아가 샛노란 눈동자를 마리에게 꽂았다. 아까처럼 고개를 기울인 마리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눈동자는 아무런 감정 없이 비어있었다. 텅 빈 눈동자는 되려 섬찟하다.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잠시 가늘게 좁혔다가 원래대로 뜬다. 하- 한숨 같은 날숨을 내뱉은 입술이 움직였다.
"같은 팀원인 이상 필요한 교류는 할 거야. 도움을 요청하면 내가 가능한 선까진 들어줄거고 지금처럼 적당히 어울리는 것까진 그럴싸하게 해줄 수 있어. 막역한 사이가 될 정도로 친분을 쌓을 생각이 없는 것 뿐이야."
그런 거라며, 마리의 물음에서 교묘히 빗나간 대답을 돌려준 후 레레시아가 반문했다.
"넌 그런게 왜 궁금한데?"
왜 라고 물었으니 왜 라고 돌려주기- 까진 아니었지만. 어쩌면 보이지 않는 선 긋기를 하는 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