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법령 전에 태어났기에 아주 조금이지만 평범한 기억이 남아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채 크기도 전의 매우 짧은. 이제는 흐릿해져버린 단편적인 기억이죠. 그렇기에 그녀는 이해한다고 다시 한번 말한뒤 아무거나 괜찮다는 당신의 말을 따라 무난한 가게들의 리스트를 머리속에 나열하고 있었습니다.
"응?"
그러나 다만.. 이라고 말끝을 흐리는 당신을 보며 그녀는 잠시 발걸음을 멈춰 기다렸습니다. 일체 재촉하지 않고 너무 부담스럽지 않게 살짝 시선을 비껴서 당신을 보고 있었죠. 그리고 이내 당신이 말해준 내용에 미소를 지으며 그러면 살짝 담백하게 가볼까? 하고 윙크했습니다.
"못 먹는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조금은 편하게 대해준걸까~? 이거 기쁜걸."
신뢰가 생겼단거지~? 그녀는 괜스레 더 기쁘다는듯 말했습니다. 뻔뻔한 말이네요
"후, 후흐.. 흐큽."
그러나 지나가던 말 정도의 농담에 크게 대답해버린 당신의 반응에 그녀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아보았습니다만.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는 그러면 언제나 구해준단거네~? 하고 믿고 있겠다며 미소지었습니다. 믿어? 니가? "응? 아닌데. 민폐 끼쳐도 괜찮아. 동료인걸." '말은 잘하네, 정말'
그치? 그녀는 윙크를 지어보이곤 한 가게로 당신을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이 가게는.. 볶음밥이 메인메뉴인 가벼운 느낌의 중/양식 퓨전집인거 같네요.
이스마엘은 우애를 대단하고 존경스럽노라 표현했다. 짧은 식견에 좋지 않은 머리를 가졌지만 쌍둥이의 행동에서 타이밍이 맞는 점도 그렇고, 서로 할 말을 꿰뚫는 것도 그렇고. 모두 그만큼의 신뢰관계가 쌓였음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우애에 감춰진 이면을 알기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지만, 적어도 모른다고 해서 무례하게 굴지는 않았다. 농담을 반 스푼 얹어보자면 무례하게 굴었다가 머리카락이 아닌 머리 뿌리와 작별을 고해야 할 테니까. 다행스럽게도 히히 웃는 소리가 들리자 장난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화를 내지도 않았고, 얌전히 안도했다. 이스마엘은 자신의 모발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머리가 보들보들하다니, 그런 칭찬은 처음 들어봅니다."
부끄러운지 오토튠 섞인 목소리에서 쑥스러움이 묻어 나온다. 이제 사람들과 교류하며 머리에 대한 정보도 많이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이스마엘은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 페이스 재머 너머로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머리카락 관리는 어떻게 하는 걸까? 평소대로 비누로 박박 감아버리면 되나? 샴푸도 아닌 비누라는 글러먹은 생각이었지마는.
"예! 괜찮습니다!"
늘어지는 달콤한 말투와 달리 이스마엘의 말투는 어딘가 각이 져있고, 활기찼다. 더군다나 짧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이미 머리를 차지한지 오래였다. 어차피 머리는 다시 자라고, 이 글러먹은 생각에 연장선을 더하자면 비누를 조금 덜 써도 될 것이다. 머리도 빨리 마를지도 모른다! 지금 머리가 덜렁덜렁 잘린 곳이 가벼움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이대로 싹둑 잘라버리면, 이스마엘은 신세계를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머리카락이 움직이는 느낌이 든다. 오래 기르고 땋아 무게가 있는지라 흔들리는 느낌이 여실하게 느껴졌다. 이스마엘은 그런 당신의 행동에도 곧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노이즈가 미처 가리지 못한 너머로 드러나는 건, 목덜미를 덮은 타이즈와 목걸이로 추정되는 끈의 시발점이다. 공격하기 딱 좋은 위치와 마침 시도한 공격. 차가운 공기가 스미는 것 같다 생각하던 이스마엘은 갑자기 들이닥친 당신의 장난에 꼿꼿하게 세웠던 허리를 훨씬 더 꼿꼿하게 세우고 어깨를 크게 웅크렸다.
"히잉이?!"
괴상한 소리. 명백한 장난에 완벽하게 당해버렸다. 뭐라 말할 수도 없이 타격감이 컸던 건지, 이스마엘이 말을 하려 입을 벌릴 때마다 잠깐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났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려다 멈칫하는 몸짓도 있었다. 당해버렸으나 달리 변명할 거리를 찾지 못한 사람의 전형적인 행동이었다. 더군다나 말할 틈이 없어지자 바로 머리카락의 기장에 대해 설명하니 뭐라 대꾸할 타이밍도 놓쳤다. 안타까운 희생양의 말로다.
"네, 부탁드립니다. 금방 익숙해질 것 같기도 하니."
망설임은 없었다. 짧다고 해도, 거슬리지 않는다면 괜찮다. 이것보다 더 짧아진다 한들 머리카락은 자란다. 돌아오는 것은 언제라도 버릴 준비를 해야 한다. 돌아오지 않는 것을 맞이하고자 기다릴 수는 없으니. 이스마엘은 얌전히, 머리를 자르기 편하게끔 자세를 고쳤다.
자신을 향한 그녀의 미소에 윙크까지, 좀체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그런 능란한 말과 행동에 그는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는지 가볍게 자신의 뺨을 두드렸다. 지금까진 잘하고 있는 것 같으니 이대로만 가자, 라는 느낌이었을까.
"......?"
뭔가 우스꽝스러운 말이라도 했나? 생각해보지만 방금 조금 크게 대답한 게 전부였다. 그럼 그것 때문인가? 그는 조금 얼굴이 뜨거워지는 감각에 고갤 푹 숙이고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이어지는 말에는 그다지 대답을 할 만한 텀은 없었기에,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뒤 고갤 들었다.
"그건, 네, 알겠습니다."
기억해 두겠다는 듯 말하면서, 그녀가 이끄는 대로 가게에 들어섰다. 여긴... 퓨전요리 식당인 모양, 확실히 퓨전요리는 호불호가 덜 갈릴만한 요리들을 많이 준비하는 걸로 알았다. 이건 역시 배려겠지. 가게에 들어서서는 안을 한번 스윽 훑어본다.
//크윽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읍니다...죄송합니다 멜피주...! 이따가 정오 즈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그저 얌전한 요조숙녀지만 손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그 이미지가 와장창 깨어지는 사람. 레레시아는 그랬다. 늘 웃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예상 밖의 행동으로 주변을 시끄럽게 혹은 상대를 당황케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 순진무구한 금빛 눈동자를 샐쭉하게 뜨며 당한 상대를 되려 침묵하게 만드는 못된 재주였다. 지금도 아마 뒤를 돌아보았다면 뻔뻔하디 뻔뻔한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히히!"
짧은 웃음소리는 장난에 당한 신입 씨의 요란한 반응 덕분에 좀 더 활기찼다. 달리 말하자면- 만족스러운 웃음이었달까. 그래놓고 곧장 머리에 대해 설명한 건 아무리 봐도 대꾸가 나오지 못 하게 함이 분명해보인다. 필시 이런 행태에 익숙한 것이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레레시아는 머리에 대해 말을 하고 신입 씨의 대답을 기다렸다. 허공에 가위를 찰칵찰칵 움직여대며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 기울이고 있다가 다른 의견이 없이 부탁한다는 대답이 돌아오자 챡! 소리나게 가위를 편다.
"좋-아. 그럼 시작한다아."
시작한다 해놓고 머리다발을 또 스윽 들어올리는게 같은 장난을 칠 것 같았지만, 다행히? 장난은 없었고 능숙한 가위질로 머리다발을 잘라나가기 시작했다.
찰칵찰칵찰칵.. 서걱서걱...
이미 잘린 부분이 싹둑 잘렸던 것에 비해 남은 반은 조금씩 제법 신중하게 길이를 맞추며 잘라져갔다. 긴 다발이 점점 떨어질수록 머리가 점점 가벼워짐이 느껴지고, 마침내 끝부분을 똑 잘라 다발이 떨어지자 털 깎은 양의 기분이 이런 걸까! 싶지 않았을까. 레레시아에겐 이제부터가 손질의 시작이었지만.
잘라낸 머리다발을 들고 감탄을 터뜨린 레레시아는 곧 한 켠에 조심히 내려놓고 라라시아로부터 빗을 받았다. 그 와중에 말을 또 주고받는데, 대체 라라는 왜 가위와 빗을 가지고 다닐까? 언제든 레레의 머리를 잘라버리려고? 히익. 레레시아는 더더욱 머리 손질에 장난을 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으럼 이제, 에- 각 잡는다아?"
과정 하나하나를 알려주며 진행하는 건 버릇일지 배려일지. 잘은 몰라도 그렇게 말한 후에 손끝으로 머리의 위치를 조금 조정하고서 잘린 끝을 일자로 만들기 위해 또 열심히 가위질을 한다. 차각차각 가위질 소리 사이로 사각사각 간지러운 소리가 제법 분주하게 울렸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