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게 잘 하네. 그는 머리속으로 그런 감상을 남기고 있었다. 역시 그냥 소시민같은 느낌은 아니란 말이지. 그러나 지금은 딱히 뭘 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그는 얌전하게 치료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을 뿐이었다.
"만약의 이야기니까요."
하지만 그런 도시가 있다면 어쨌든 이곳보단 낫겠지. 친절이라는게 기본 베이스로 장착되어 있는 곳이 정말로 있을진 몰라도. 길가다 사람이 다치거나 하는것따윈 놀랄거리도 안 되는 이곳보다는 훨씬 나을것이다. 이내 치료가 끝나고 건네주는 소독약과 붕대를 다시 구급상자에 봉인한 그는 그것을 또 어디론가로 슥 넣고 하품을 했다.
"산책하는김에 겸사겸사죠. 아무나 다 해주는것도 아니고요. 뭔가 다쳤다는데 딱 봐도 수상한 사람도 있고요."
당신의 말에 긍정하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있단 말이지, 근처에 가면 안될거 같은 분위기를 뿜뿜하고 있는 녀석들이. 물론 그는 그 상황에서 당당하게 다가가는 타입이었으나 말이 길어질게 뻔하므로 굳이 대꾸하진 않은뒤 벽에서 등을 뗐다.
"그렇게치면 누님도 같은 입장이지 않은가 싶은데,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신가?"
그렇게 말하기는 했으나 그는 대답을 원하는건 아닌지 별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큰길쪽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있었다.
친절한 사람이 오히려 등쳐먹히는 시대인 만큼 걱정이 앞섰는데 그나마 이런 말을 하는 걸 보아하니 사리분별이 안 될 수준은 아닌 것 같아 안심이다. 애당초 잘 알지도 못 하는 사람을 두고 무슨 안심이네 걱정 같은 걸 되뇌며 유난인가 싶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게 안면을 튼 상대가 어느날 불상사에 휘말려 있는 꼴을 보는 건 사양이었던 까닭이다. 다만 양장의 눈에는 이 남자가 여전히 퍽 무모하고, 다소 의뭉스럽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 시간에 이런 장소에서 누군들 그렇게 비춰지지 않겠느냐만은.
"믿는 구석이 있어 보이나요?"
그러나 지금은 심문이 어울리는 타이밍이 아니고, 때문에 양장은 무던히 웃으며 그렇게만 답을 달아 두었다. 확실한 대답을 바라지도 않는 사람에게 상세 정보를 먼저 털어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럴 필요성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어차피 그는 죽기 직전까지 사방팔방을 쏘다니며 일할 예정이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이 남자와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마주치게 될 테다. 제대로 된 자기 소개는 그 때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게 한낮 햇볕 아래 평화로운 순찰 중의 재회가 될 지, 아니면 상상하고 싶지 않은 나쁜 상황에서의 재회가 될 지는 지금으로선 모르는 일이지만.
"골목 끝나는 곳 까지만 같이 갈까요? 혼자보단 둘이 나으니까요."
모르기 때문에 지금은 지금으로 충분할 것이다. 양장은 발걸음을 돌린다. 골목 어딘가에서 고요히 울리는 고양이들의 야옹 야옹 소리를 뒤로 한 채.
[인터뷰①] 사이코 범죄자? 허당 도둑? 상반된 별명의 ‘핑키(Pinky)’. 그녀는 누구인가?
“그 사람 범죄자 맞아요? 아니, 맞긴 하지만…… 도둑질하는 걸 봤는데 글쎄 허점투성이더라니까요. 도둑질을 꽤 오래 했다는 글을 인터넷에서 봤었는데 옆집 벽을 줄로 타고 올라가다 발이 미끄러져서 떨어지질 않나, 자물쇠 부순다고 뭔 무기로 두들기다가 안되니까 은밀 행동도 집어치우고 동네 떠나가라 쾅쾅 내려치질 않나……경찰차 소리가 들리는데도 오기가 생겼는지 계속 내려치다가 잡히더라니까요. 반나절도 채 안 돼서 탈출했다고 들었긴 하지만.” - 범행 목격자, A.
“아, 걔요? 등교를 잘 안 하긴 했는데 그거 때문에 더 기억에 남기도 하고, 머리카락 색부터가 눈에 띄잖아요. 근데 워낙 결석을 많이 해서 어떤 애인지는 잘...... 그래도 애가 이쁘장하니 생기고 성격도 괜찮아서 올 때마다 잘 녹아들었어요. 나중에 가선 좀 노는 애들하고 어울릴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애들이 피하더라고요. 그 애들 중 몇 명이 맞았댔나, 걔네들이랑 나란히 멍 주렁주렁 달고 등교했었나? 그러기도 해서 싸웠나 싶었죠.” - 고등학교 동창, B.
“엄청 조용했는데 그 여자애가 핑키라고요? 정말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만 하다 갔어요.” - 아르바이트 동기, C.
“나쁜 사람인가요? 우리 애가 납치당할 뻔한 적이 있었는데 구해줬었거든요. 저한테 귀를 막고 떫은 표정으로 한 손으로 애를 데려다줬던 거 보면 그냥 애 우는소리가 싫었던 것일까요? ……어쨌든 구해준 건 사실이에요.” - 핑키에게 도움을 받은 시민, D.
. . .
(유리창 안쪽에서 광분하며 험악하게 얼굴을 구긴 사내의 사진)
“뭐? 핑키? 지금 핑키라고 했냐? 그 미친 핑크 안개?! (“그렇게까지 말은 안 했-”) 망할 녀어어어어언—!!!!!!!!! 보고있냐?!! 야이 ****!!! **!!”
- ‘■■동 일대 보석상 절도 사건’의 공범, N.
. .
(다음 단락, 어째서인지 찢어져있다)
. . .
(멀리서 뒤돌아보는 연분홍색 머리카락 여성의 사진)
“어? 내 인터뷰? 좋아. 자료조사비나 인터뷰료 같은 거 줘? 아 없어? 없으면 주지 마. (감흥없는 표정) 줘도 시원찮을 것 같네. 근데 물어볼 거 있으면 빨리해주지 않을래…? (고개를 휙휙 돌리며 주위를 살핀다) 곧 경찰이 올 것 같아. 오기 전에 몇 군데 털었거든. 오늘 치 안 해도 쫓길 테지만 아무튼. (주절주절 본인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래서 사실 그건 가짜였거든. 뭐? 아, 질문? 뭔데? 근데 잠깐만, 이것만 들어봐 봐.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는데 나 그거 금고 푼 거 아니었어. 턴 건 맞지만 암호 풀고 그런거~ 다 무기로 쾅쾅! 해버린 거야! 뭐? 다 알고있다고?! 에이씽… 쪽팔리게. ……나 갈래. (확 일어서는 모습을 보고 다급히 붙잡으려는 인터뷰어의 목소리가 무색하게도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다)”
동그랗게 내려 묶은 머리를 감싸는 남색 캡 모자, 얇은 후드집업에 반바지, 운동화, 검은 마스크, 간식들이 담긴 검은 비닐 봉지. 일(도둑질을 일이라 할 수 있다면) 할 때와는 달리 집 앞 마실 나온 차림새를 한 핑키는 집 앞이 아니라 꽤 멀리 떨어진 마을에 와있다. 삼 주 전쯤인가에 이 동네 은행을 털다가 멀리서 본 여자가 눈에 든 까닭이었다.
복식도 독특했고, 대충 봐도 안단 말이지. 이 정도까지 좀도둑 생활 좀 했으면. 까득, 까득. 입안에 문 딸기 소다맛 사탕을 씹어대며 느긋이 생각한다.
핑키는 편안한 차림으로 주민 행세를 하며 자료 수집을 이어나갔다. 밝은 웃음, 맑은 목소리, 어딘가 푼수적인 면모를 보이며 주민들의 경계를 푼다. 제가 최근에 이 동네에 왔는데, 라고 서두를 떼며.
독특한 옷을 입은 여자분이 있더라고요, 체구가 작고 전통적인 옷 같던데.
누구냐 직접적으로 묻지 않으며 대답을 유도한다. 답에 주거지 정보가 포함되지 않았다면 한번 더 물을 것이다. 정말요? 어디 집 아가씨인데요?
핑키는 주민과의 질답들을 되새기며 걸음을 옮긴다. 그들이 알려준 정보를 따라(알려주지 않았다면 감을 따라) 점점 주거지의 근처로. 심심한 손으로 비닐 봉지를 붕붕 휘두르며 타겟 위치와 마을 구조, 도주 경로를 구상하는 가운데 툭 하고 봉지에서 간식들이 하나 둘 튕겨져나갔다. 데구르르. 몇개는 상당히 길게 굴러간다. 아, 정말! 봉지로 장난치지 말걸! 한숨을 푹 쉬며 일일이 간식을 줍는데 시야에 저 멀리 간 간식들이 보인다. 헨젤과 그레텔마냥 사탕, 초콜릿, 젤리 등을 주우며 점점 앞으로 나아가다 보이는 자그마한 발에 멈칫하고, 줍던 손을 거두어 발의 주인이 누구인지 보기 위해 고개를 든다.
"그런 사람 본 적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근데 이 동네에 새로 오셨다고요? 독특하시네요..."
"아, 그 여자애? 몰라요, 어린애인지 좀 더 나이 먹었는지. 어디 사는지도 짐작 안 가구. 외출하면 눈에 띌 텐데도 그렇게 자주 안 보이던데요."
"내 생각하는 사람이 맞다면 저쪽 거리 자주 돌아다니는 것 같수다. 이 근방에 워낙 이상한 놈팽이들이 많이 싸댕겨서, 여자 혼자 산책하긴 어려워 보이던데."
당신은 물어물어 찾아가려 했지만 대략적인 위치 정보만 들었을 뿐, 정확히 어느 집인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그녀에 대해 아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어 보이는 탓이었다. 이쪽 동네는 부자들이 산다기엔 다소 초라했다. 골목마다 뵈는 건 인생 포기한 듯한 불량배들이요, 그저 하루하루 살아 있을 뿐인 백수들. 그런 거리에 몸집 작은 젊은 여자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를테면... 당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이라거나 말이다.
"...주워요, 마저."
그 자리에 다소곳이 멈춰 선, 검은 나막신 신은 버선발. 시선을 위로 올리면 통 넓은 일본풍 바지-하카마라 하던가-에 한복처럼 보이는 저고리를 걸친 여성이 당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녀가 작게 목소리를 내며 당신을 기다려 주는 것은 섣불리 걷다가 주변에 떨어진 간식을 밟을까봐- 같으나, 그것이 당신을 배려한 것인지 혹은 그저 밟았다가 신이 더러워질까 염려해서인지는 모른다.
끙, 내 성능좋은 후각이 퇴화하기 시작했나. 가도 가도 추레한 골목길에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입맛만 다실 참이었다. 저놈들 주머니 뒤질 바엔 근처 편의점을 터는 게 낫겠다 싶었다. 분명 귀해 보였는데-. 부잣집 한번 잘 털면 대박 치는 거라 여기서 물러나긴 아쉬워 마을 탐색을 지속했던 것이 행운을 불러왔던 걸까. 자신의 실수로 마주친 여자, 아니 여자아이? 동그랗게 떠진 다홍색 눈이 의뭉스러운 흑안을 마주하며 스쳐간 찰나의 기억을 되새겼다.
정답! 속으로 럭키를 외친 핑키는 자신의 위로 떨어진 목소리에 아, 그래, 잠깐만요 하고 잽싸게 주운 뒤 몸을 일으켰다. 일어서니 올려다보던 시선이 이제 내려가 인형 같은 조막만 한 머리통이 눈에 들어왔다. 어려 보이고, 위험해 보인다. 그런데도 여길 돌아다니는 건 집이 근처인가? 마스크와 모자로 인해 유일하게 보이는 눈을 접어 웃었다. 다홍색 눈동자가 숨겨졌다.
“우와-,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아 참, 이거 먹을래요? 안 떨어진 거예요!”
살가운 목소리를 내며 손을 내밀었다. 손 안에는 사탕처럼 포장지에 감싸인 초콜릿 뭉치들. 핑키는 다양한 제스처를 취하며 재잘재잘 떠들어댄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좀 얘기할까요. 나 지금 심심해서. 단 거는 좋아해요? 옷이 특이하고 이쁘네요, 맞춤옷? 등등등……. 마지막에는 결국 본론이 나오기 마련이고. “근데 여기 살아요? 어려 보이는데, 혼자 돌아다니기에는 위험해 보여서.” 난 정말 순수한 걱정만을 하고 있어, 라는 듯한 무해한 눈웃음을 꾸며내는 것이었다.
“오면서 봤거든요. 불량배들이 엄-청 많던데!”
데려다줄까요? 까지 나오려 근질근질한 입술을 꾹 문 것은 마스크 속에 감춰져서 다행이었다.
이 맛있는 걸 거절한다구? 표정으로 말하듯 눈이 크게 뜨였다가 이내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렇지, 배고프지 않으면 맛있는 것도 맛있다고 느껴지지 않지. 제멋대로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아쉬운 듯 초콜릿 뭉치들을 다시 비닐 종이에 넣었다.
돕기 어렵다는 말에 눈썹을 팔자로 휘며, “괴로울 정도의 심심함도 있다구요-”라고 울상을 짓는 듯 하다가 “지금은 아니지만.”하고 맹랑한 표정을 짓는다. 다만 간결한 말투로 거절을 하여 단호한 구석이 있다 생각했으나 제 재잘거림의 꼬박꼬박 대답해준 것은 의외였다. 대답해 주지 않았어도 혼잣말은 그녀의 특기었으니 아랑곳 않고 중얼댔을 테지만.
그래서 단순히 말수가 적고 단호하다 생각했던 여자아이가 길거리에 살지 않는다고 답했을 땐 눈을 끔뻑끔뻑하며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엉뚱한 면이 있네. 핑키는 정정하려다 그럴 필요까지는 느끼지 않아 “으응? 그렇구나아... 가끔, 그렇지, 길거리에 살 것 같지는 않지, 응.”하고 허허실실 웃어넘겼다.
“아무래도 시대가 시대이니 치안이 괜찮은 곳 찾기가 쉽지는 않겠지만요. 여기도 많더라구요. 조심해요. 이제 갈 거예요? 데려다줄까요?”
다시금 눈을 반짝이며 물어오는 핑키, 수락한다면 데려다주며 경로를 알고, 거절한다면 몽유가 가는 방향을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돌린다.
/ 내일 평일(ㅠㅠ)이라 일찍 일어나야해서 이제 가야되네요 ㅜㅜ 막레로 주시거나 좀 더 이을 거리가 있다면 퇴근 후 짬짬히 잇도록 할게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