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은 코로리의 말에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말에 입맞추는 상상을 해버린 탓이다. 이게 바로 신성모독인가. 그러면서도 렌은 맞잡은 손을 더 끌어당기며 가까이 붙었다. 만약 단 둘이 있는 공간이었다면, 교내가 아니었다면 렌은 코로리의 입술을 충동적으로 훔쳤을지도 모르겠다.
대신 약속하자면서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모습에 렌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쑥쓰러움을 타며 그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걸었다. 입꼬리에 잔잔한 미소가 걸린다. 처음 만난 봄날이 지나 이제는 겨울이었다. 뭔가 감회가 새로운 느낌이다. 아마 그 때부터 무언가가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운명이라거나 사랑이라거나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이거나. 어쨌든 이전과는 달라졌다.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 없이.
“시간이랑 싸워서 시간이 시간을 내어주지 않으면 어떡해요.”
렌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코로리가 시간과 싸운 탓에 시간이 움직이지 않는 상상을 했다가 이내 흘러보낸다.
렌은 뜬금없이 코로리가 나빴으면 큰일 났을 거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면서 나쁜 코로리를 한 번 상상해보았다. 하지만 으음, 생각해보아도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너무 부끄럽게 해버렸나 봐ー! 렌 씨가 꼭꼭 숨고 싶어서 조그마해지면 어떡해. 코로리는 비록 인간계에 내려온지는 3년 뿐이고 연애라고는, 사랑이라고는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꿈 속에서 보아하니 인간들이 입맞춤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짓궂다고 말하고, 앓는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흔드는 렌을 보면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해버리기에는 자신도 아직 많이 부끄러워서, 안 한다기보다는 못 한다고 하는게 옳았지만!
"렌 씨가 아니라고 하면 나도 아니니까ー"
렌이 끌어당기면 끌어당기는대로, 가까이 붙으면 붙는대로 사이를 좁힌다. 코로리는 꼭 쥐고 있는 렌의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보려고 했다. 안 할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혹여 토라지지 말라는 듯이 부드러웠다.
"그러면 시간의 신님 악몽 꾸게 할 거야."
손가락을 걸어주면 렌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꼭 걸었다. 손가락 중에서 제일 작은 손가락들이 만날 뿐인데 왜 이렇게 간지러운지 신기하다. 코로리는 장난기 섞어 시간의 신님에게 악몽 꾸게하겠다고 말 했지만, 렌 씨랑 못 만나게 하면 진짜루 악몽 꾸게 해버릴 거야?! 시계바늘이 다 도망가는 꿈 꾸게 할거라구!
"나빴으면… 렌 씨 데리구 신계로 가버렸겠지이."
렌에게 이렇게 말해버리는게 부끄러웠다. 민망했다. 닿아서 부끄럽고 하는 것과는 결이 달랐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멋진 모습만 보이고 싶고,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은게 당연하다. 그러니 이런 무서운 말같은 것 하고 싶지 않았는데, 렌이 물어보는데 답하지 않을 수도 없다. 코로리는 빨갛게 숙인 고개를 여전히 들지 못하고 조그만 목소리로 웅얼거린다. 신계라는 말을 입 밖으로 냈지만 바로 옆, 가까이 있는 렌도 겨우 알아들을 목소리 크기라 상관없을 것 같다.
하고 부정하기는 하지만 차마 하겠다는 말은 못하고 또 지금 학교고 어쩌고 구구절절하게 변명하기도 영 멋있지 않은 것 같아서 렌은 눈썹을 축 늘어뜨린다. 여전히 볼이 불그레한 것은 추위 때문 만은 아니리라.
코로리가 시간의 신에게 악몽을 준다는 말에 렌은 작게 웃으면서 손가락을 건 손을 작게 흔들었다가 떼어냈다. 코로리의 손은 자신의 손에 비해 조그마했는데, 그런 손으로 잠을 재우고 꿈을 빚는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가기 싫다고 울었으면서.”
렌이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 걷다보니 어느새 차양이 드리워진 길은 학교 구석진 외부 비상계단 쪽 출입구에 다달았다. 춥기 때문인지 아니면 급식소와 반대 방향인 외진 정원 쪽이기 때문인지 주변에 돌아다니는 학생들은 없고 눈만 소복하게 차양 위와 비상 계단 난간과 아직 초록빛을 띠는 침엽수 위와 마른 잔디들 위에 내려앉을 뿐이었다.
차가운 공기에 코로리가 추울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눈 앞에 보이는 풍경이 아름다워서 욕심껏 그 자리에 멈춰서 버렸다. 코로리와 함께 눈 내리는 풍경을 더 보고싶었다.
렌은 왜인지 모르게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는 코로리의 정수리를 손가락으로 톡도독 두드렸다. 이 앞에 눈들을 보라는 의미이기도 했고, 그게 아니라면 나 좀 봐주세요, 하는 의미이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면, 싫은 게 아니라면 해도 괜찮다고 생각해버린다. 그래서 코로리는 생각한 그대로를 바로 말해버렸다! 그 다음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곱씹고 새빨갛게 익어버렸다. 해명을, 설명을 해야하는데 더워ー 핑핑 돌아ー! 부끄러움에 져버린 머리가 여름철 녹아내린 아이스크림 같았다. 건들면 흐물텅 녹아내려서 제대로 있질 못하는데 코로리 머릿속이 지금 그랬다.
"지, 지금 하겠다는 건 아냐! 하기 싫은 것도 아니구, 그, 그ー 부끄러우니까ー 나는 렌 씨가 싫어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니구나, 하구 알게 된게 기뻐서ー"
굿나잇이랑 똑같은데 왜 이렇게 부끄러ー! 굿나잇, 하고 뺨에 쪽 입 맞추는 것은 할 수 있다. 그런데 입술에 쪽 입 맞추는 건 왜 이렇게 부끄러운지 모르겠다. 설명을 하겠다고 이것저것 말하는데 말하면 말할수록 점점 더 논지가 흐트러지고 문장도 깔끔하지 못하게 변해간다. 때문에 코로리는 이윽고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말을 하지 않는 편이 조금 더 나을 것 같았다. 새빨간 얼굴을 진정시키는데도, 엉성한 설명에게도. 시야가 발 끝으로 가득차서 다른 풍경을 비추질 못한다.
"…. 렌 씨도 짖궂어."
울었다는 이야기를 해버리니, 렌을 흘끗 쳐다보았다가 늦게 입을 연다. 첫만남이 그런 식이었던게 지금도 여전히 부끄러운데, 부끄러운 이유 중 하나를 콕 집어버리니 계속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첫 눈에 반했을 지도 모른다던 렌의 두번째 고백을 기억하지만 못나기만 했던 것 같단 생각은 떨칠 수 없다. 가기 싫다고 울었던 때와 지금은 전혀 다른데, 억울하지만 다르다고 설명도 못한다. 렌이 정수리를 톡톡 두드리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부끄러운 와중에도 무슨 일이냐고 묻듯이 , 렌의 손을 꼭 잡고서 렌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