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인첨공을 나오고 1년 뒤에 은지까지 인첨공을 빠져나왔다. 사실 성인이 되어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모든 일이 마무리 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홀가분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대학생이 되었고, 은지는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카페를 차렸다.
" 오늘 하루도 고생했어. "
지금은 겨울방학이라 나도 학교를 가지 않기 때문에 매일 은지의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물론 나는 커피를 내린다던가 하는 일은 잘 못하기 때문에 주문을 받는다던지 자리 정리를 한다던지의 일을 하고 있다. 카페가 문을 닫고서 다가오는 은지에게 웃으며 얘기한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포스기로 다가갔다.
" 오늘은 그래도 무난했네. 그치? "
손님이 너무 많았던 것도 아니고 진상 고객님들도 많이 오지 않은 날이다. 근처에 미모의 카페 사장님이라고 소문이 나서 빠르게 단골손님들도 많아진터라 장사를 하는데 그렇게까지 무리는 없는 것 같아 다행이다.
" 나도 방학인데 어디 짧게 놀러갔다올까? "
포스기를 조작해서 오늘 하루 수입을 정산한다. 판매량과 판매금액을 대조해서 빠진 부분이 없는지도 확인하는데, 초반엔 여러번 실수 했었지만 익숙해진 지금은 그런 실수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어차피 같이 사는 입장에서 돈은 주지 않아도 된다고 한사코 얘기했는데도 은지는 꿋꿋이 주고 있다. 최저시급으로 쳐서 받고 있기는 하지만 어차피 내가 다시 생활비로 쓰기 때문에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다. 은지가 청소를 하는동안 빠르게 정산을 마친 나는 창고로 향하며 말했다.
" 어디로 갈까? 가고싶은 곳 있어? "
인첨공에 있을때는 도시 안에서만 있었어야했으니 답답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가고싶은 곳으로 갈 수 있고 먹어보고 싶은 것도 자유롭게 먹을 수 있다. 창고 문을 열고선 안에 재고가 얼마나 있는지 체크한다.
" 맞다, 친구들이 여자 소개 좀 해달라고 하던데? "
학교에 다니면서 평범하게 친구들도 사귈 수 있었고 몇번 카페에 오기도 했었다. 놀러왔던 친구들은 은지의 외모에 한번 놀라고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두번 놀랐다. 재고는 전부 기억하고 있는터라 오늘 사용한만큼 빼서 적어두고는 창고를 나왔다.
" 요즘 동호회 같은거 나가잖아. 아는 사람은 좀 생겼어? "
무슨 동호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은지도 평범하게 친구도 사귀고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내가 먼저 넌지시 말을 꺼내본 것이었다.
카페도 운영하고 있으니 가게를 오래 비우는 것은 좋지 않다. 끽해야 3~4일 정도만 있다올수 있겠지. 동거를 시작하면서 같이 있는 시간은 더 늘어난 것 같지만 무언가 추억을 쌓을 기회는 더 적어진 것 같아서 아쉬울 따름이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은지가 알아차렸을지도 모르지. 커피머신 청소도 마무리해가며 은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파스타 나쁘지 않네. 가볍게 먹는게 좋으니까. "
파스타가 가볍다.. 라고 말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조리 자체는 간단하니까. 커피머신은 제대로 청소하려면 꽤나 구석구석 닦아야했다. 그래도 행주를 들고 보이지 않는 곳까지 깨끗하게 닦아내고서는 청소를 마무리한다. 이 정도면 청소는 대충 끝난게 아닐까.
" 오늘도 꽤 많이 벌었다. "
역시 입소문이 많이 나서 그런지 하루 매출이 날이 갈수록 오르고 있었다. 나 같아도 예쁜 점장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오고 싶어질테니까. 카운터 안쪽에 있는 의자에 앉은 나는 핸드폰을 잠깐 보았다. 친구들한테 연락이 온 것이 있나 확인했는데 오늘은 핸드폰이 조용했다. 다들 일찍 자러간걸까.
은지의 말에 밝은 웃음으로 바라본 나는 신난다는듯이 커피머신을 더 열심히 닦았다. 커피머신을 다 닦고서 의자에 앉아서 은지가 청소를 마무리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으니 어느새 은지도 청소를 다 끝낸 모양이었다. 문단속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가, 은지가 문을 잠그고 돌아오면 일어나서 살짝 손을 잡아본다.
" 드디어 하루가 끝났네. "
카페 마감을 하고서도 뒷정리까지 해야하니 벌써 늦은 저녁이었다. 지금 저녁 먹고, 대충 집안일 좀 하면 바로 잘 시간이다. 뭔가 더 하고싶지만 내일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서 카페를 열어야하니까 그럴 수가 없는게 가장 아쉬웠다. 집으로 들어가는 계단으로 향하다가 나는 은지를 바라보고 말했다.
" 오늘은 조금만 늦게 잘까? "
학교에 다닐때는 학교에 가야해서 일찍 자고 방학때는 카페 때문에 일찍 자니까 쌓이는 아쉬움을 달리 해소할 방법이 없었기에 결국 나는 은지의 눈치를 살짝 보며 말했다.
문단속을 마치면 늦은 저녁일 겁니다. 집이 가까이 있으니까 조금 느지막하게 문을 닫는 편이려나요. 그래도 밤이라고 불리는 것보다는 늦은 저녁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시간대일 겁니다.
"그렇네요.. 하루하루 지내는 건 좀 보람있어요" 라고 말을 하는 은지는 내일 아침에도 일찍 일어날까.. 고민해보기도 합니다. 조금 느지막히 열어도 괜찮지 않을까.. 사실 준비하는 것을 조금 보이는 것도 나쁜 건 아니니까요. 라고 생각하던 찰나에. 정현이 조금 늦게라는 말을 하자 고개를 갸웃하는 척 합니다
"조금 늦게요?" 그것도 괜찮지요? 라는 말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하는 은지입니다. 계단으로 향할 때. 은지는 정현의 팔짱을 낍니다. 살짝 기대듯이 무게중심을 살짝 이동시키네요.
"올라가요" 올라가는 건 튼튼하지만 돌은 아니고 철제에 가까운 계단이라 통통거리는 가벼운 소리가 날지도 모르겠네요.
인첨공에 있을때보다 일하는데에는 더 큰 보람을 느낀다. 거기서는 음지에서 일하고 있었으니 돈은 훨씬 많이 벌어도 위험하고 언제든지 죽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지금 은지의 모습이 예전보다 더욱 마음에 든다. 은지 본인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 이렇게 조용한 일상이 마음에 들어. "
어두운 과거와 비교하면 지금은 너무 눈부셔서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할 정도니까 말이다. 조금 늦게 자자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은지를 보고 안될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괜찮다는 말에 나는 활짝 웃었다. 사실 늦게 잔다고 뭔가를 더 하는건 아니지만. 팔짱을 끼며 기대오는 은지의 볼에 살짝 입맞춤을 해준 나는 계단을 오르며 말했다.
" 이렇게 사니까 꼭 신혼부부 같다. 그치? "
사실 주변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닼 철제 계단을 올라가서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넓은 오피스텔 같은 내부가 보인다. 방이 세개에 거실이 하나, 화장실이 두개인 구조다. 하나는 같이 자는 방, 하나는 은지가 개인적으로 쓰는 곳, 하나는 내 개인 공간인데 내가 쓰는 곳은 손님방으로도 사용하기 때문에 따로 침대가 하나 더 있다.
부끄러워하는 은지를 귀엽다는듯이 바라본 나는 집에 들어가서 은지가 씻으러 들어가자 내 방으로 향했다. 인첨공에 있을때부터 가지고 있던 취미를 아직 버리지 못했기에 방 안에는 오실로스코프나 파워서플라이 같은 온갖 기기가 가득했다. 어질러진 것들을 대강 치우고 기기들을 정리하니 은지가 나오는 소리가 들렸고, 나도 갈아입을 옷을 챙겨서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 피곤해 ... "
은지가 더 피곤하겠지만 인첨공때부터 불규칙적인 생활패턴을 갖고 있어서 그런지 지금도 잠을 제대로 들지 못하는 날이 많았고, 그것은 만성피로라는 증상으로 되돌아왔다. 따뜻한 물로 몸을 씻어내며 피로를 조금이나마 풀어주고서 샤워를 끝마친다.
" 배고파~ "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니 뭔가 마음이 놓이는 느낌이라 헤실헤실한 표정으로 은지에게 다가가 꼭 끌어안는다. 항상 느끼는거지만 은지를 안아주는게 가장 좋다.
샤워를 끝마치고 나오니 좋은 냄새가 나서 부엌으로 향했다. 내가 씻는동안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라 뒤에서 끌어안는다. 약간 덜 마른 머리에선 좋은 향기가 나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파묻고선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쉰다.
" 나는 적당히 넣어줘. "
치즈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너무 많이 넣으면 다 먹기도 전에 굳어버려서 맛이 없어졌다. 뭐든 적당한게 좋지. 은지를 뒤에서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가 하면서 장난을 치다가 끌어안고 있던 손을 풀고서 식탁에 식기를 세팅한다.
" 마실건 뭐 마실래? "
원래부터 좋아했던 콜라가 한가득 들어있고 물과 주스도 같이 있었다. 콜라는 대부분 내 것이지만 자주 마시지는 못한다. 그래도 파스타니까 마시게 해주지 않을까 싶지만 은지가 마실 것도 골라야하니까 냉장고 안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은지가 마실 것을 고르면 내 것도 같이 골라 식탁에 올려놓고 파스타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 잘 먹겠습니다! "
그리고 파스타가 나오면 은지가 세팅해주는걸 기다렸다가 포크에 돌돌 말아서 한입 먹는다. 항상 느끼는거지만 은지 요리 실력은 상당하다. 맛이 없던적이 없으니까.
"오빠도 참..." 고개를 파묻자 조금 움찔합니다. 그래도 괜찮으니까요. 달콤한 것 같으면서도 옅은 향입니다. 적당히라는 말에 적당히 넣습니다. 이정도면.. 괜찮겠다 싶을 때까지 넣고 은지의 몫의 치즈도 적당합니다. 오븐에 넣고 시간을 조절한 다음 사랑한다라던가의 말에 저도요. 라고 조금 수줍은 듯 말하는 것 같습니다.
"으음.. 오늘은 조금 느지막히니까. 탄산도 괜찮겠네요." 먹고 운동하고 잔다거나 하면 물을 선호하겠지만. 그렇다고 에이드를 만들자니 그건 품이 드니까요. 대신 은지는 제로콜라를 먹을 것 같네요. 그건... 정현에게도 암묵적인 허락이겠지요? 사실 그렇게까지 막 쪼지는 않겠지만..
여기서 더 맛있어지면 더 맛있어졌음을 표현할 수식어가 부족해지니까 안되는데. 그래도 누군가가 이렇게 맛있는 밥을 해준다는건 행복한 일이다. 예전에는 그냥 편의점에서 사다가 먹는 일이 많았으니까.
" 그땐 따로 살기도 했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
온갖 더러운 의뢰는 다 맡아서 했으니까 자연스럽게 시간대가 밤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저녁 늦게 돌아다니는 일이 흔했기에 은지에게는 늦게 들어오는 사실이 그렇게까지 위험하다고 생각이 들지는 않나보다. 사실 나도 은지가 밤늦게 들어온다고해도 위험할꺼란 생각은 안한다. 지금이야 평범하게 살고 있지만 인첨공에서 그녀의 이명을 생각하면야 ...
" 설거지는 내가 할께. "
은지가 밥을 다 먹자 그녀의 그릇과 식기를 챙겨서 싱크대에 넣어두고서 식탁을 정리한다. 컵도 치우고 식탁도 닦으면서 뒷마무리를 하고선 데리러 가냐는 물음에 잠깐 고민을 한다. 데리러 오면 좋겠지만 다음날도 카페를 열어야하는 은지니까 괜히 피곤하면 어쩌지 싶었다.
" 데리러 와주면 나야 좋지만 ... 피곤하지 않겠어? "
고무장갑을 손에 끼고 뜨거운 물을 받는다. 기름기가 있는 설거지니까 뜨거운 물로 해야지 기름기가 대부분 없어진다. 식기들을 뜨거운 물로 한번 헹구고 세제로 닦은 다음 뜨거운 물에 한번 더 헹구고 차가운 물로 마무리한다. 둘이서 먹은거라 설거지는 금방 끝났고 거실 소파에 가서 앉은 나는 옆자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은지는 밤에는 의뢰를 처리하고 낮에는 학교를 열심히 다녔으니 지금보다 잠을 더 못잤겠지. 난 학교 생활을 대충대충한 편이라서 지금 대학 생활을 하는게 처음엔 리듬도 안맞아서 힘들었다. 지금은 적응해서 괜찮아졌지만 ...
" 쉬는 날엔 또 집안일 같은거 해야하니까. "
그래도 내가 방학일땐 카페가 한가할때 내가 집에 올라와서 청소를 해놓고 분리수거도 해놓는 편이지만 학기중일땐 그게 힘들어서 휴일에 일이 많은 편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어쨌든 내가 방학이니까 괜찮으려나. 은지가 데리러 오면 집에 가는 길에도 짧게나마 데이트를 할 수 있으니까 좋긴 하다.
" 그럼 끝나갈때쯤 연락할께? "
날이 추워서 밖에 오래 있지는 못하겠지만 ... 손이라도 잡고 걸을 수 있는게 좋다. 생각해보면 나랑 은지가 사귀기 시작한 것도 눈 내리는 겨울이었으니까 ... 겨울은 좀 느낌이 다르다. 은지가 무릎에 누우면 웃으면서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준다. 여전히 긴 머리는 관리가 잘 되어서 엉키는 곳 하나 없이 부드러웠다.
" 은지는 지금 행복해? "
예전과는 다른 낯선 삶이지만 나는 행복하다. 하지만 가끔은 그녀가 나랑은 다르게 행복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에 불안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