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이 이렇게 나올 것은 상정하지 못 했는지 미간을 좁힌 체 조금은 떨떠름한 어투로 이야기를 한다. 이런 쪽으로 분위기가 흘러 가는 것은 원하지 않던 일이기 때문에 유하는 슬그머니 자신의 어깨 위에 얹은 손을 보다가 상대방을 빤히 응시했고, 흥분 상태가 소요되기 까지를 기다렸다.
"그러면 이걸로 네가 나를 자기 전에 부른 용무는 다 끝난거야?"
검지로 테이블을 탁 탁 두드리며 질문을 한다. 조금 더 건설적인 대화를 위해서는 주제를 바꿀 필요를 절실하게 느낀다.
"뭐랄까, 흠, 그래 알려줘서 고마워. 잘 했어. 이런건 힘들긴 해도 일이 터지기 전에 접근하는게 좋지."
긴급 냉각 장치라도 돈 것 마냥 차분해진 그녀에, 이번엔 내가 떨떠름한 어조로 고개를 끄덕인다. 본래부터 그녀에게 화낼 생각이었던 것은 아니다. 일방적으로 분노를 받다보니 조금 욱했을 뿐.
".....일단은 그렇지. "
미묘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해야 할 얘기는 끝났고, 뜨거운 분위기도 식었지만. 이건 이거대로 뭐랄까, 분위기가 묘하다. 이대로 해산하고 싶은 느낌은 아니다. 감정적으로 폭발하던 애가 강하게 나갔다고 갑자기 저렇게 침착해지니까, 소화가 덜 된 느낌이라고 해야되나....
다만 다행인건, 상대도 비슷한 의도인지 테이블을 두드리며 묘하게 고민하는 기색이다. 요컨데 대화가 끝났다고 곧장 나갈 생각은 없어보이는 것이다. 나는 피로와 안도가 섞인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윤시윤은 과자를 요구하는 말에 대답 대신 테이블에서 과자 한봉지를 꺼내왔다. 그것은 윤시윤이 결코 스스로 사먹을 것 같지 않은, 마치 하유하를 위해 구매해둔 것 같은 느낌의 과자였다.
"자."
유하를 위해 구매했음이 분명한 과자를 그는 생색도 내지 않고 덤덤하게 내어주고 나선, 팔에 턱을 괸다. 당신을 빤히 지켜보면서 무언가 고민하던 윤시윤은 입을 열었다.
"아까는 나도 욱해서 소리를 질러 미안해. 솔직히 네가 그 정도로 화낼줄은 예상하지 못해서 당황한 것도 있고."
그는 솔직하게 사과하더니, 좋은 생각이 났다는듯 검지 손가락을 하나 펴보였다.
".....사과의 의미로, 이렇게 하자.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네가 원하는걸 뭐든 하나 들어줄게. 대신, 그걸로 만족한다면 나는 네가 몹시 화난 이유를 직접 듣고 싶어. 이런건 넘겨짚기 추론으로는 좋지 않으니까."
그는 역시나 윤시윤이었다. 상냥하고 부드럽게, 그는 당신에게 백지 수표를 주고 질문권을 얻기를 제안했다. 아마도 그것으로 방금전 당신이 급하게 냉각시키느라 마저 해소되지 못할 감정의 응어리를 풀길 바라는 것이리라. 거기에는 또한, 당신의 솔직한 감정을 듣고 싶노라는 의견을 그는 능글 맞게 제의 해오고 있었다.
유하는 자신의 앞에 내어진 과자를 보고 빠르게 손을 뻗었다. 엄청나게 두꺼운 감자칩. 사실상 웨지감자지잠 바삭하다는 부분에서 달랐다. 봉지를 뜯어 빠르게 하나를 입에 집어넣는다.
"흠.........."
과자를 아직 입에 물고 있던 유하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 듯이 보였다. 백지수표는 준다면 받겠다. 좋은 것을 마다할 정도로 무식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걸 지금 사용하고 나서, 화난 이유를 밝혀야 한다면 거기에는 제약이 걸린다. 지금 당장은 딱히 바라는게 없었고, 딸기 케이크의 딸기는 마지막에 먹는게 취향이었으니까.
"그러면 이건 어때, 원하는걸 뭐든 하나 들어준다는 소원권은 가져가서 내가 내킬때 쓰고 화가 난 이유는 지금 들려줄게."
"사실, 냉정하게 생각 했을 때 화를 낼 이유는 없었지. 원인을 제공해서 너의 정신을 나약하게 만든건 나고, 나는 너와 떨어지기를 바랐고, 그 사이에 네가 다른 사람을 만나서 뭘 하던 간에는 너의 자유고 네가 연인이 생겨서 나에게 흥미를 잃는다면 더 좋게 풀렸을 테니 최초의 내 의도와 부합하니까."
말을 하다 보니 오갈 데 없는 짜증이 셈솟길래 과자를 한 웅큼 크게 짚어 입에 털어넣었다.
"그렇지만 말이야. 누구 하나의 마음이 완전히 굳혀지기 전 까지만 연인이라고 부르지 않는 단계의 관계에서 돌이켜 보면 역시 싫어. 나는 네가 전생 한 이후 살아온 그 몸으로 가진 모든 의미 있는 것들이 나와 연관되었으면 한다는 욕심이 있어. 그것 뿐이야."
우왓, 하고 속으로 잠깐 놀랐다. 내가 제대로 들은게 맞나? 뇌가 잠깐 정지했다가, 뒤늦게 해독반이 열심히 일한다. 음, 맞는 것 같다. 어느 의미론 저게 그냥 '좋아합니다' 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고, 집착적이고, 따라서 부끄러운 얘기라는 것은 알까. 거기까지 생각이 돌았을 때, 나는 한번 웃었다.
"푸, 하하..."
상대가 민망과 수치심, 혹은 분노로 치솟기전에 웃은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그 때 고양이에게 질투하는 날 보고 네가 웃었지? 사람이 예상과는 벗어나서 안할 것 같은 짓을 하고, 그게 좋은 방향이라면 웃음이 나온다고 했지. 알 것 같네."
그 때와는 역전된 입장에 즐거운듯 미소를 짓는다. 나는 그녀를 계속 바라본체 웃다가, 어느 순간 넌지시 찔러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