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진행되어 가는 와중에 동공은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정신 사나운 꼬릿소리도 멈췄다. 조용한 방 안에 숨소리와 물이나 쥬스를 마시는 소리를 빼면 모든 이야기가 윤시윤의 것이었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이야기는 아닌가. 숨기고 싶어하고, 하필이면 정신적으로 위축된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며 꼭 해야 하는 이야기. 여러가지 가능한 수를 생각 해 봤었고, 개중에 심리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타인과의 관계를 맺으려는 시도는 예상 안에는 있었다. 그 과정이 예상과는 달라서 몸에 힘이 들어가는 부분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상정 내의 이야기임을 감안하면, 그렇게까지 흥분할 이야기도 아니라고 생각은 하지만...
"상대방이 누구고 뭘 어떻게 얼마나 한건데? 그리고, 앞으로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
배신당했다는 얼굴로 인연을 장난으로 여긴 것은 너라며 쥬스를 얼굴에 끼얹을 수도 있었으며, 상처를 받았다고 울어버리는 수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이 이야기로 넘어 오는 우회선일 뿐이어서, 스스로도 잘 모르는 감정을 꾹 삼키고 상대방에게 본론으로 들어가길 권유했다.
왜 내가 큰 잘못(바람)을 저지른 남편이 아내에게 혼나는 듯한 처지가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몸과, 한치의 떨림 없이 서슬 퍼런 눈으로 따져오는 상대를 마주하면 그런 의문은 자연스럽게 본능적으로 들어가는 법이다. 남자 아이란 이토록 안타까운 생물이란 말인가.
"상대는......라임이다."
흘끔 하고 상대의 눈치를 살피며 고민하다가, 한숨을 내쉬곤 첫번째 질문에 대답한다. 본래 이런 예민하고 개인적인 문제의 상대를 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정말 원치 않지만. 지금 이렇게 말해놓고선 '말할 수 없다' 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분위기다. 라임에게도 내가 유하를 좋아한다던가, 깊은 얘기는 했었으니까. 이해 해주겠지....제발 해줘.
"어떻게 하고 싶은진 화해...하러 갔을 때 복잡한 교환 끝에 어느정도 정해졌다. 라임이는 자기를 조금 가볍게 대해줬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뭐,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엔, 그냥 뭐, 서로 장난치고 챙겨주는. 사이가 좋은. 그런 느낌이겠지. 적어도 난 그리 생각한다."
다음 대답은 비교적 수월하게 한다. 라임도 보건데 그 때의 기억을 꽤 부끄럽게 여기고 있으며, 나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되 너무 무거운 관계가 이어지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고 얘기했다. 그게 나에겐 결국 거리를 벌리자는 의미라고 생각했으나,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그녀는 성격상 연달아 이어지는 무거운 고민을 견딜 수 없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건 꽤나 힘든 교환 끝에 서로의 도달점은 정해졌고, 연애라던가 무거운 이야기 없이 서로 꽤나 가볍고 친근하게 어울리는 관계.....가 될 것이다. 아마도. 라임이는 어쩐지 확신하기 어렵다.
"그리고.....뭘 어떻게 얼마 했냐는......음............"
식은땀 한줄기가 흐른다. 무엇이지, 내가 직접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리 말하기 힘든 것이냐. 눈 앞의 무시무시한 용에게 잡아먹힐 것 같은 분위기에 시선을 한번 흘끔 피했다가, 슬쩍 상대를 올려보며 조심스레 답한다.
"....상대쪽에서 기습적으로 한 싸늘한 입맞춤 한 번이랑. 사과하러 갔을 때, 절교할 뻔 했다가 극적으로 화해한 직후에 침대로 힘에 이끌려서 마주 누워 껴안은.......정도......이상한 짓은 안했다. 맹세코."
같은 특별반에 성인이면 아는 사람이 둘 밖에 없긴 하지만, 라임 언니였다니. 동공이 살짝 흔들렸으나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으며, 아마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뒤에 있을 것이다. 그걸 위해서라면 지금은 참아야겠지.
"음."
그렇다면 그 일은 그저 분위기에 휩쓸려 일어난 실수이고 자신에게 집중하겠다는 뜻인지, 아니면 또 다른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기 위해 생각을 가다듬던 와중에 들어버린 말에 입을 떡 벌리고 상대를 바라본다. 뭐지? 도발인가? 이를 으득 물고는 비어버린 쥬스 컵을 윤시윤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
"키스하고 고백하고 차이고 화해하고 나서 침대에 같이 누워?! 그게 라임 언니를 가볍게 대하고 장난치고 챙겨주는 사이 좋은 사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