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드물게 멋쩍은 느낌으로 뒷머리를 긁으며 솔직하게 사과한다. 상대는 매우 솔직하게 화내고 있다. 아마도 나라서 그런거겠지. 마음만 같아선 '실수해서 미안해, 다음에 얘기하자' 라고 하고 싶은 기분도 없진 않으나. 그래서야 상대 헛걸음만 시킨거고, 화에 기름만 끼얹을 것이다.
이럴 땐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가는게 좋다.
"지난번에 선물을 사러갈 때 얘기했던 일."
아마 길어질지도 모르는 얘기다. 나는 냉장고에서 차가운 물 한잔과, 유하가 좋아할만한 쥬스 한잔을 따른다.
테이블에 턱을 괴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숨기고 싶은, 즐겁지 않은 이야기지만 중요해서 넘겨짚을 수 없는 종류의 녀석으로 보인다. 꼬리는 신경써서 가만히 두려고 해도 바닥을 자꾸만 치고 있다. 규칙적으로 탁탁 거리는 소리가 그닥 넓지 않은 좁은 방 안을 울리고 있다.
"시작해 봐, 일단은 이야기가 끝날 때 까지는 아무런 말도 안 하고 들어줄게."
양 손으로 쥬스컵을 잡아 한 모금 마시며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빨리 이야기 하라는 시위이기도 하다.
탁탁탁 꼬리가 바닥을 치는 소리가 방에 울린다. 평소 같으면 정신 사나우니까 멈추라고 말할 법도 하지만. 왠지 모를 긴장과 초조함을 느끼는건 마찬가지니까, 이해하기로 했다.
"일단은....사실, 처음의 너와 나 처럼. 응석을 부리는 아이와 그걸 받아주는 어른의 관계로 친해진 소녀가 있다."
정말 장절한 서두지만, 일단 이걸 말하지 않으면 시작이 안된다. 라임의 나이는 20세라 소녀로 칭함이 정확한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으나 사소한건 넘어가기로 했다.
"....너와 거리가 멀어졌을 때, 그 애와 둘이서 의뢰를 갔다가 조난을 당했다."
차가운 설산에서, 눈폭풍이 휘몰아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좁은 토끼굴에 들어갔다고 덧붙인다.
"그 비좁은 곳에서, 음......그 애가 조금, 적극적으로 달라붙어와서 말이다."
조금 적극적으로 무엇을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될 것 이다. 그건 중요한 부분이 아니잖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떠올리면 이불을 발로 차고 싶어지는 기억을, 소중하다고 여기는 애 앞에서 말하는건 몹시 어려운 일이다.
"나도 호응하려고 했더니, 나에게 그런 것을 바란건 아니었다고. 나보고 연애하고 싶어서 잘 대해줬냐고 묻더라."
손으로 눈가를 짚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아니면, 담배를 한대 피우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속이 매우 초조하다. 그렇지만 그 모든 행위가 아마 나보다 더 속상할지도 모를, 입다물고 듣고 있는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함으로. 나는 침만을 꿀꺽 삼켜 답답한 속을 달래려 노력할 뿐이다. 이 다음은 정말 부끄러운 내용이다. 그러나, 이 것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반드시 오해와 실망이, 혹은 후회가 생길 것이다.
"아니라고 하려다가, 네가 떠올랐다. 아이와 어른의 관계로서 모른척 했다가, 일방적으로 거리를 두자고 절교를 당했던.....그 기분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때가 되어서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었던 비참함이. 교실에서 홀로 터트린 울음이 떠올랐다. 어른스럽게 굴어서 맺은 결과물이 그거라면, 이젠 그냥 꼬마가 되어 위안이라도 받고 싶었다."
전혀 어른스러운 심정도, 행위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게 내 솔직한 감정이었다. 어른스럽게 굴어서 그토록 비참해지고 슬프다면, 그냥 아이라고 인정해서라도 소중한 인연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에게 고백했었어. 아이 같아도 되니까 사귀어달라고. 그리곤 그녀는 수락했다. 나보고 이후론 일절 어른스럽게 굴지 않고 아이처럼 대하면 사귀어준다고 얘기하더라........결국, 그 조건에는 내가 동의하지 못해서 무산되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서먹해진거다."
거기서 만약 '네' 라고 말했다면, 지금과는 정말 많은게 바뀌었겠지. 나는 어른스러움을 관두고 라임의 연인이 되어서, 예쁨을 받았겠지. 그랬다면 아마 유하의 화해 신청도 받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응석부릴 대상을 찾은 아이에게, 상처를 용서할 아량은 없었을테니까. 나는 지금의 길을 골랐다. 흑역사를 쌓으면서도, 아슬아슬하게 성인으로서의 나를 지키기를 골랐다. 그게 현재 이 순간이다.
나는 찬물을 한모금 더 마신다. 어느새 잔은 비어버렸다.
".....일단 말해두자면, 차분해진 지금. 고백했다는 방금의 말과 달리 그녀와 사귀겠다는 강력한 연애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마 이건 상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때는 극한의 상황속에서, 나에게 실망했다는 그녀에게, 이미 소중한 관계를 잃어 패닉에 빠진 나는 어떠한 수단으로든 관계를 이어나가길 바래서 극단적인 수단을 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더 이상 울고 싶지 않을 정도로 몰려있었다. 그마저도 아슬아슬한 부분에서, 결국 스스로를 완전히 포기하지 못했지만."
이 얘기를 전부 들은 유하가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내 솔직한 심정은 그렇다. 나는 라임과 사귀어 남자친구가 되고 싶다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그랬다면, 이미 사귀었을 것이다. 유하와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부분에선 꽤나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변명할 수 없는, 해야하는 한마디 결론이 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얘기를 들었으면 짐작하듯이, 그녀를 좋아하거나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은 사실이다."
저기서 숨기면 찔리는게 있단 얘기지요!!! 의도적으로 숨겼는데 나중에 들키면 그 땐 무슨 말을 해도 설득할 수가 없지요!!!! 근데 라임이랑 유하가 남남도 아니고 안들킬리가 없잖아!!! 애초에 윤시윤씨는 그렇게 남을 속이는걸 매우 싫어하니까, 결국 윤시윤류 화법술 매우 솔직하게 빌기 밖에 없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