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질 것 같은 기분에, 결국 휘청거리듯 뒷걸음질 치다가 널려있던 의자에 주저 앉았다. 급격히 몰려오는 피로감에 손바닥으로 눈을 꾹 누른다. 애원하다시피 매달렸지만, 그래서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는 말에는 허탈감만이 몰려왔다.
나는 뭘 바라는걸까. 사람 관계라는 것은 한번 틀어지면 애원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진심으로 대하려고 애썼다. 그 결과가 이것인가.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애초부터 친근함을 느끼지 말고 적당히 지냈어야 했는가. 그런 생각이 들게하는 지금의 순간 순간이, 즐거웠던 추억을 으깨고 있는 것만 같아서 매우 괴롭다.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다.
"모르겠다."
결국, 고민해봤자 나는 나에게는 아무런 해결책이 없음을.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함을 다시금 알게되었을 뿐이다. 소중하다고 생각하던 녀석들을 모두 잃고, 거기까지의 과정도, 기억하겠다고 맹세한 것도 망각한체 혼자만 한번 더 삶을 받은 녀석의 본질이라는 것은 그런 법이다. 그런 치사한 녀석이 조금 우쭐거리며 행복해지려니까 천벌이라도 받은걸까.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마른 웃음이 흘러나왔다.
피곤함과 허탈감에 자리로 무너지는 시윤을 무기질한 눈으로 바라본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비밀에 너무 다가가게 되면 다치는 법이고, 겨우 이정도의 감정적 격양으로 끝난다면 우리 모두에게 좋은 교훈이 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유하는 팔짱을 끼고 주저앉은 상대를 바라보고, 발 끝으로 탁탁 바닥을 치면서 기다린다. 분명 유하는 시윤에게 제안을 했었기 때문이다.
" 그래? "
짐짓 차가운 대답을 한 뒤에는 다시 피식 웃었다.
" 너무 신경쓰지마 윤윤. 나도 인간관계 다 쳐내고 레어에 들어가서 잠만 자겠다는 소리도 아니구~ 윤윤도 기껏 얻어낸 새로운 삶이니까 앗 이상한 사람이다! 하고 다른 사람이랑 놀면 된다고 생각해. 헌터는 언제 죽을지 모르니깐 말이야. "
"너는 확실히 드래곤이구나. 인간에 대해서는 조금도 몰라. 아마도, 속으론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군."
상대는 끝까지 무기질적인 모양새다. 이제는 그것을 지적하는 것도 지쳐선 조용히, 피곤한 감정을 담아 얘기했다. 드래곤이란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존재다. 자신의 비밀과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곧바로 관계의 절단을 시도하는 것이, 그리고 상대가 그걸 이해할거라 믿는 것이. 몹시도 오만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속으론 내가 속았다며 더 난폭하게 굴지 않음에, 이걸로 자신의 본성에 접근하는 나와의 관계를 정리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네가 말하는 인간 관계라는건 결국 가식과 바보연기의 일환인거냐. 사람간의 관계를, 너무 얕보지 마라."
그러나 그런식으로는 결국, 나 외에 사람들과도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관계란 그런 법이니까. 오래지내고 친해질수록 상대를 이해하게 된다. 나는 조금 눈치가 좋았을 뿐. 그 결과가 이것이라면, 그녀는 애초부터 인간관계를 그리 원치 않아하는 것이다. 혹은 자신에 대해 모른체 해줄 꼭두각시를 원하거나.
"....이후론...."
잠깐 말을 멈춘다. 더 비난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진 않았다. 지금이라면 그녀도 내심으로 어떻게 생각할진 몰라도, 들어주는 시늉은 해줄지도 모르지. 나는 서운한 감정을 시원하게 쏟아 그녀의 마음에 아마도 조금의 상처를 주어 후련해지고, 그녀도 그걸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걸로 아마 모든게 적당히 끝냔거다.
그러나 나는 결국 끝까지 그럴 수 없었다. 힘 없이, 그러나 가능한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려 미소짓고는.
"즐거웠던 추억을 모욕하지만 말렴. 나는 널 좋아했어. 진심이야."
그냥 끝까지 얼간이가 되기로 했다. 좋아했던 그녀와의 추억이나 관계를 스스로 짓뭉개어 완결내는 것보단, 자신이 좀 더 광대가 되는 길을 골랐다. '지켜주지 않으면 네 본성을 누군가에게 말하겠다' 같은, 좀 더 설득력이 있고 합리적인 협박 문구를 알고 있으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