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가족이라는 단어가 싫다. 이유 모르게 버려진 채 길에서 구걸하던 내가 지켜줄 사람조차 없어 머리에 칼자국이 새겨졌을 때. 으슥한 골목에서 죽을 뻔한 꼬맹이의 목에 박힐 칼날을 당신의 손에 박아 막아주었을 때. 그리고, 그런 당신을 배신하곤 주머니를 노리던 내게 당장의 돈보다 미래의 집을 얻을 방법을 알려주겠다던 당신이다. 입을 떼어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려 하더라도 목 밑에 남은 원망과 증오가 그 단어를 완성하질 못했다. 그런데도 당신은 오늘도 내가 당신의 가족이라 말한다. 제자라는 단어에 얼마나의 가치가 있기에 오늘도 내게 감정을 투자하는지 모르겠다. 누구보다 계산을 좋아하는 당신이 왜 내게 가치를 느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당신의 그 말을 믿는다. 내게 존재하는 가치가 얼마이든, 당신이라면 내 가치를 더더욱 믿어주었을테니. 안목 나쁜 내 눈 대신 당신을 믿기로 했다.
나는 손으로 골치가 아픈듯 얼굴을 짚곤, 순수한 감상을 말했다. 치료랑 뒷정리만 하면 때려도 오케입니다! 라니. 의념 이전에 인간적으로 오케이가 아닌 것 같은데. 이 아가씨도 어딘가 나사가 빠져있는건 확실하다. 나쁜애라고는 안하겠다만.
"아저씨는 요리 재주는 없는데 말이야."
요리 같은 사치스러운걸 익힐 시간과 여유는 아마 없었을거다. 여기 애들이 전생의 내가 먹었을법한 보급품이나 서바이벌식을 즐길 것 같지도 않고. 그렇지만 다 한다는데 나 혼자 '못하겠소' 하고 빠지는 것도 어른스럽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요리라도 알려달라고 해야되나. 유하......는 글렀다. 요리를 알 것 같진 않군. 오현이 자기 말로는 요리용으로 라이터를 들고 다닌다 그랬으니, 나중에 기회가 되면 물어보기나 할까.
"재주가 없으시면 사오시면 됩니다." 돈으로 해결하시거나. 요리실력을 키우시거나요. 라는 말을 하는 지한이네요. 너 너무 무사안일주의한 게 아니니? 라고 해도. 못하는 음식을 억지로 시키는 것보다는 낫지 않냐는 논리이군요. 그러다가 사용법이라던가. 라는 것에 잠깐 침묵합니다.
"어.. 그건.." 나노머신을 작동하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믿는 지한입니다. 그야.. 설정상 최근이니까 그런 게 아닐까? 작동한다면 자신의 나노머신도 작동시켜서 이렇게 한다라던가 같은 걸 보여줍니다. 너 오늘부터 운운한 주제에 그런 게 생각날 만한 그런 게 하나도 없네.. 참으로 철두철미하군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그 정체조차 알 수 없는, 까맣게 물들 진주가 눈에 들어오는 귀걸이. 순백의 진주가 소지자에게 행운을 불러온다면 검은 진주는 소지자를 위험에 빠트린다고 한다. 대신 그 대가로 저주에서 소지자를 지켜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 고급 아이템 ▶ 검은 진주의 축복 - 소지자의 행운이 감소하는 대신 E등급 이하의 저주에 한해서 강력한 저항 능력을 추가한다. 단, 정신계 저주가 아닌 육체에 적용되는 저주의 경우 50% 감소한 효율만큼 효과를 막아낼 수 있다. ▶ 진주의 저주 - 극히 미미한 확률로 아군에게 발동된다. 거대한 불운을 몰고 온다. "어디 갔지..."
점괘를 본다고, 조금이라도 행운을 올려볼 요량으로 잠깐 빼서 책상 위에 올려둔 귀걸이가 어디로 굴러떨어졌는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는다. 예쁘진 않아도 비싸게 주고 산 건데.
그렇게 책상 사이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퍽 하고 누군가와 부딪혔다. 아니, 부딪혔다기보다는 마주 오는 사람을 거의 머리로 들이받았다.
"앗."
슥 올려다보니 처음 보는 얼굴이다. 아마도 이번에 들어온 편입생 중 한 명이겠지.
"미안."
성의 없는 사과를 건네고선, 다시 허리를 숙여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데에 집중했다. 땅바닥만 바라보고 느릿느릿 걷는 꼴이 꼭 딱정벌레를 닮지 않았을까.
왠지 모르게 익숙한것도, 그리고 전혀 처음 듣는것도 뒤죽박죽 섞인 혼란스러운 수업 과정을 나름대로 공부하던 때였다. 눈이 침침하고 허리가 뻐근한게 나가서 바람이나 쐴까 하고 일어나던 차, 누군가 머리로 퍽 하고 등을 들이받는 것이 아닌가. 힘이 풀려있을 때 갑작스러운 충격에 앞으로 엎어질뻔한걸 간신히 멈추곤, 등을 문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어린 놈이...."
어린 놈이 들이받아놓곤 사과도 안해? 어? 유교 정신 몰라? 長幼有序 모르냐고!! 그렇게 인상을 찡그리며 어른으로써 인생의 교훈 한마디 진하게 해주려는 찰나, 여전히 바닥에 고개를 들이밀곤 더듬거리는 모습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쫑긋 쫑긋 거리는 귀를 보건데 하프인가. 귀 대신 뿔을 달고 있는 녀석은 한명 아는데. 이 교실은 하프도 나름 있구나. 하프가 평범한 인간들과 같이 급우 생활을 즐기고 있는 모습은 여전히 낯설면서도, 뭐. 죄 없는 아이가 차별에 휘말리는 것보단 낫지 않나 싶다.
"사과는 좀 더 성의 있게 해야지. 욘석아."
그런 생각 하는 사이에 잔소리를 퍼부을 생각은 어느샌가 없어져서, 나는 쪼그려 앉아 시선을 맞추곤 덤덤히 얘기하곤 주변을 향해 같이 곁눈질하기 시작했다. 바닥을 더듬거리는게 토끼의 하프가 내가 모르는 바닥에 대한 집착 특성을 가지고 있는게 아닌 이상, 뭔가 잃어버려서 찾고 있는 것은 자명했으니까. 잃어버린 물건에 정신이 팔렸으면 애가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뭘 찾는데. 아저씨도 좀 도우마."
관찰이나 시력에 관한 스킬은 저 먼 전생에 두고 왔지만, 그래도 꼴에 저격수다. 나름 눈으로 뭔가를 찾는 것엔 나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