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기도 멈추고 라인을 기다리고 있던 요조라, 어찌나 폰에 집중했던지, 뒤에서 마히루가 살금대며 들어오는 것도 몰랐다. 지금 갈까요, 라는 의외의 대답에 요조라가 어쩌지, 하고 고민하고 있으니, 몰래 들어온 마히루가 툭 끼어든다.
"요 꼬맹이들, 한밤중에 어딜 나가려고?" "으히익!?"
어지간한 걸론 놀라지 않는 요조라였지만, 아직 마히루에겐 당해내려면 멀었는지, 흠칫, 이 아니라 완전 깜짝 놀라며 얼결에 폰을 놓친다. 그 틈을 노려 요조라의 폰을 낚아챈 마히루는 가늘게 뜬 눈으로 요조라를 바라보고, 요조라는 시선을 피하며 머뭇댄다. 남매의 머릿속에 각자 무슨 생각이 오갔는지 모르겠지만, 곧 마히루가 요조라에게 폰을 돌려주며 말한다.
"내일 오후에 가면 어때. 필요하면 데려다 줄 테니까." "알았어... 일단, 물어보고..."
왠일로 순순히 대답한 요조라는 조용히 키패드 위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지금은 너무 늦었으니까] [이따 오후에요] [점심 지나서]
라인 하나하나, 마히루가 감시한 건 아니지만, 요조라가 심히 찔렸다는 건 사실 아닌 사실이었다. 일단 그렇게 보내놓고 그림을 마저 마무리 짓고 있었다. 라인은 라인이고, 공모전은 공모전이었으니 말이다.
나갈 준비는 다 끝마쳤는데 답장은 오후쯤에 가자는 얘기가 나왔다. 하긴 너무 늦은 시간이라 나가기 애매하긴 했지. 그래도 넣어둔 물건들은 내일 오후에 가져가면 되니까 다시 방 한구석에 조심히 내려놓고 답장을 보낸다.
[그럼 이따 오후에 봐요] [도시락 싸줄테니까 이따 같이 먹을래요?]
점심 지나서라는 말에 눈길이 가서 도시락을 싸갈 생각을 해본다. 집에 있는 재료는 ... 엄청 많은 것은 아니지만 얼마전에 장을 봐서 적당한 수준으로 있었고 그래서 호화스럽게는 안되겠지만 둘이서 충분히 먹을만큼은 만들 수 있었다. 아니면 사먹는게 좋으려나.
[바쁠테니까 이따 보기전에 연락해요.]
공모전이라던가, 그런게 있다고 들었기에 나랑 연락하는 것보단 그림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메세지를 보내놓고 핸드폰을 내려놓는다. 아, 일하기 싫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다. 밤하늘이 밝아오자 나는 방을 나와서 바로 부엌으로 향했다. 잠을 안자서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하루 정도는 버틸 수 있다. 앞치마를 두르고서 여러가지 음식을 만든다. 샌드위치랑 치킨 샐러드, 오니기리 등으로 알차게 구성한 도시락은 만드는데도 얼마 안걸리니까. 가볍게 먹을 수 있는거라 어디 앉아서 먹기도 편한 것들이었다. 도시락 준비를 끝내고 잠깐 눈을 붙인 나는 한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서 나갈 준비를 했다.
[바닷가에서 볼까요?]
메세지를 보내놓고 평소 입는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마지막으로 어젯밤에 챙겨둔 선물들을 한 손에 들고서 바닷가로 향했다. 마츠리 이후 첫 데이트라고 생각하니 조금 떨리면서도 설레는듯 했다.
굳이 점심 지나서, 라고 말한 건 뭔가 챙길 수고를 덜게 하려는 생각이었는데, 코세이로부터 온 답장에 도시락이라는 말이 들어있자 그만 혹해버린다. 연인이 직접 만든 도시락에 혹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라인 너머로 눈을 반짝거리던 요조라는 이내 마히루에게 들킬새라 표정 관리를 하고 얼른 답장을 보낸다.
[도시락 먹을래요] [응 이따 봐요]
귀여운 고양이가 반짝거리는 눈빛을 보내는 이모티콘을 덧붙이곤 마저 그림에 집중한다. 이따 오후에 나가려면 새벽 중에 그림을 완성하고, 오전에 제출해야 시간을 맞출 수 있을 터. 폰을 내려놓은 요조라는 묘한 의욕으로 눈을 빛내며 그림을 순조롭게 완성해갔다.
예상대로, 아니, 예정대로 그림을 완성하고나니 어느새 창 밖이 환하다. 벌써 아침이야?! 라며 시간을 확인하니 제법 이른 시간이라 준비할 시간은 충분하다. 요조라는 요조라대로 외출 준비를 하고, 완성된 그림의 제출은 마히루에게 맡기려는데 대뜸 마히루가 뭘 내민다.
차가운 기운이 풀풀 흐르는 레몬에이드가 가득 담긴 텀블러를 챙겨주는 마히루의 정성에 요조라는 왠일이냔 눈으로 바라보다가 딱밤을 맞을 뻔 한다. 용케 그걸 피하고, 때마침 날아온 코세이의 연락에 답장을 한다.
[저번에, 갔던 거기서 봐요]
저번이라 함은 풍경이 인상적이었던 그 음식점 너머의 바닷가를 뜻했다. 거기, 제법 멀어서 사람들이 어지간하면 잘 오지 않는 곳이었으니까, 둘이 있어도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장소 지정을 마치자 늦을새라 서둘러 집을 나선다.
버스도 늦지 않게 제때 오고, 오늘따라 발걸음이 가볍다고 생각하며 그 바닷가 근처에 다다랐을 쯤, 먼저 도착한 듯한 코세이를 발견하곤 종종걸음으로 가까이 다가간다. 자꾸만 헤실거리려는 표정을 괜히 꾹꾹 눌러 잡으며, 평소 같은 표정으로 코세이를 보며 말을 건다.
"늦어서, 미안해요... 조금, 일이, 있어서..."
타닥타닥 서두르는 걸음으로 다가온 요조라는 여름날에 걸맞는 차림을 하고 있었다. 무릎까지 오는 진한 푸른색 반팔 원피스에 잘 벗겨지지 않는 하얀 샌들, 이것저것 챙겨 담은 작은 가방과 텀블러 캐리어를 양손에 들고 잘 빗은 듯한 검은 머리카락이 등 뒤에서 찰랑인다. 새하얀 얼굴에 화장기는 없었지만, 묘하게 전보다 다크서클이 줄어 그럭저럭 볼만하지 않았을까. 더위 탓인지 볼도 발그레하니 생기가 감돌고 있었으니 말이다.
렌은 코로리가 믿는다며 제 의견을 피력하는 것에 작게 웃었다. 들어올린 코로리는 제 생각보다 더 가벼워서ㅡ누군가를 빠트리려고 들어올린 건 남자들 밖에 없다. 그것도 들쳐업은 것에 가깝지만ㅡ 신기하기도 하고 작은 소동물 같기도 했다. 코로리의 귀엽다는 말에 조금 부끄럼을 타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예쁘다느니 귀엽다느니 영 와닿지는 않지만 그래도 좋게 봐주는 게 아닌가. 그런데 제가 멋있어 보이진 않는 걸까 생각해보낟. 역시 아무래도 코세이의 쌍둥이이다보니 코세이같이 잘생기고 멋진 사람만 보다보면 제가 별로처럼 보일 수도 있고....
튜브에 내려지자 이제 다시 기운을 차렸는지 아니면 방금의 복수를 하려는 건지 물을 끼얹는 걸 피하지 않고 맞아준다. 푸르르 고개를 털면서 조금 억울한 듯 물방울을 머리카락 끝에서 뚝뚝 떨어트린다.
"앗, 저는 안 빠트렸는데."
그렇게 억울하지는 않은 듯 가벼운 목소리이다. 튜브를 끌어당기면서 조금더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맑고 깨끗한 파도가 발목을 적시던 것을 종아리를 허벅지를 철썩철썩 밀어낸다. 튜브도 바닷물에 점점 떠오른다. 파도에 출렁출렁하면서 튜브가 오르락 내리락하는데 코로리의 허리쯤 오는 것에 렌이 묻는다.
"튜브 있으면 어디까지 들어갈 수 있어요?"
차가운 물에 몸이 갑자기 들어가면 심장이 놀랄 수도 있으니 바닷물을 손으로 떠서 코로리의 어깨나 등이나 이런 곳에 살며시 끼얹으려 한다. 이미 렌은 축축한 상태이니 준비 완료겠지만.
렌 씨 부끄럼쟁이! 코로리는 손가락을 접었다. 렌이 부끄러워했던 말들이 무엇이었고, 하지 않은 말들이 무엇이 있는지 세는 중이다. 칭찬을 할 때마다 부끄러워했던 것 같아서 이내 손가락 접는 것이 의미없다는 걸 깨달았다. 렌이 안 부끄러워하고 저는 그런 사람이라며 환히 웃을 수 있는 칭찬이 무엇이 있으려나 싶지만, 렌에게 물어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코로리는 손가락 접었던 것을 다시 활짝 폈다.
"렌 씨는 예쁘다, 귀엽다, 착하다, 멋있다, 대단하다, 사랑스럽다… 중에 어느게 좋아?"
한 손이 다 접혔다가 손가락 한개는 다시 펼쳐진다. 코로리는 손가락 다섯개 다 접었다가 하나가 다시 펼쳐지는 것을 보고 고민하다 칭찬 말하기를 멈추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더 말할 수 있어! 렌 씨 보면 생각나는 말 엄청 많으니까! 다만 단어 하나로 끝나지 않는 말들이라서, 단어 하나가 아닌 것들까지 말하고 있으면 손 두개로는 너무 모잘랐다. 그리고언제나 다시 반하고 있는 사람이라거나, 매일매일 눈 깜빡하는게 아쉬워서 계속 보고 싶은 사람이라는 둥의 말까지 해버리면 칭찬을 고르라는 것인지 고백을 고르라는 것인지 모르게 될 것도 같다.
"전부 렌 씨니까, 안 부끄러운 거 전부 고르면 돼."
예쁘다는 말이 제일 자주 나온 건 생김새를 뜻하는 칭찬이 아니기도 하고, 코로리가 신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잠의 신으로서 잠을 잘 자는 아이가 예뻐보였는데, 지금은 마음에 품고 마음에 들어서 그렇게 예뻐보인다.
"나도 안 빠트렸어."
눈 동글하게 뜨고서 시치미 떼듯이 말한다. 빠트리지는 않았지만 벌서 두번째 물세례 끼얹어놓고서! 코로리는 바닷물에 닿은 부분만 제하고서 뽀송했다. 물세례를 뒤집어쓰지도 않았고, 바닷물에 풍덩 빠지지도 않았으니 물 위로 나온 부분은 마냥 뽀송하다. 그래서 렌이 살짝씩 얹어주는 바닷물에 어깨나 등에 가디건이 젖어 달라붙으면 흠칫 놀랐다.
"튜브 씨 있으면 발 닿는데까지, 렌 씨가 손 잡아주면 렌 씨 있는 곳까지이."
아예 튜브 위에 올라앉아 둥둥 떠있는 상태가 되어도, 렌이 옆에 있다면야 딱히 물에 빠질까 무섭지는 않았다. 빠지더라도 안전할 것 같았으니까. 렌의 꿈 속에 들어갔을 때 느꼈던 느낌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연인 사이가 되고 달라진게 있다면 라인 메세지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라고 생각한다. 말투나 그런 것은 예전과 별로 달라진게 없는데 이모티콘이나 스티커가 같이 날아오는게 별거 아닌 것 같은데도 예전과는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나갈 준비를 끝마치고 그녀가 보내놓은 메세지를 확인하며 나는 저번에 만났던 바닷가로 향했다. 이번에도 가는 길에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우연을 기대해보지만 이번엔 약간 시간이 어긋났는지 만나지는 못했다.
아직도 낮은 더웠기에 버스에서 내려서 걸어오는 동안 그늘이 진 곳만 골라서 이동했고 저번엔 요조라와 함께 다녔던 길을 혼자서 걸어간다. 저번에 같이 밥을 먹었던 식당을 지나서 길을 따라 좀 더 걸어가자 저번의 그 해안가가 등장했다. 저번처럼 사람이 많이 없는 이곳에 요조라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지 보이지 않았고 나는 그늘을 찾아서 그녀를 기다렸다.
" 아니에요. 나도 방금 왔어요. 오늘도 예쁘네요. "
그리고 금방 그녀가 오는 것을 발견하고 나는 웃으면서 다가갔다. 평소와 다름없는 미소로 요조라를 맞이한 나는 언제나처럼 예쁘다는 말과 함께 그녀의 앞에 섰다. 흰색의 티셔츠 위에 밝은 하늘색의 긴팔 린넨 셔츠를 입고서 검은색의 5부 반바지와 샌들을 신고 왔는데, 요조라도 푸른색 원피스라 그런지 약간 커플룩의 느낌도 나는듯 했다.
" 아 맞다, 이거 선물이에요. "
마침 모자를 쓰고 오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나는 가방에서 저번에 봐두었던 머리띠를 가방에서 꺼냈다. 약간 두꺼운 느낌의 어떤 장식도 없는 하얀색의 머리띠를 그녀에게 보여준 나는 웃으면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