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현이 놀이터로 발걸음을 옮긴 것에, 무슨 특별한 목표가 있던것은 아니다. 그저 가고 싶었다, 라고 밖에 설명할수 없던 사고였다. 물론, 예전부터 그녀는 생각이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듯 자유분방하긴 했으나, 딱히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그 정글짐 위에 올라가, 잡생각을 떨쳐내고 싶었다, 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정글짐쪽을 보니, 왠지 낮설지만은 않은 머리색의 인물이 정글짐의 옆에 있다. 하얗게 보이는 옅은 금발. 어릴적의 그 골목대장 형씨가 생각나지만... 다르다. 그렇지만 왜일까, 옆에 서서 이야기를 걸고 싶은 것은.
"이상하죠? 이 정글짐만 이렇게 녹슨거."
그리고 그 정글짐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의 시작을 알린것은, 그 아이의 캐캐묵은 생각 때문일까.
그의 기억 속의 정글짐은 주기적으로 새로 칠해주기도 했기에 이렇게까지 녹슨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는데, 이젠 아이들에겐 별로 흥미가 없는 놀이기구인지 관리가 되지 않은듯 했다. 그럼 보통 철거하기 마련인데 어째서 녹슬게 내버려두는지, 철거하지 않을거라면 칠을 새로 해주는게 좋은게 아닌지하는 의문이 가득해지지만 어차피 답을 낼 수 없는 문제기에 그는 고개를 살짝 흔들어서 꼬리를 물고 가는 생각을 끊어버린다.
정글짐을 카메라 속에 담고나서 다시 가볼까, 하면서 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저 멀리서 한 여자가 다가오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체구는 작아보이지만 그 기세만큼은 당당해보이는 그 여자는 진성처럼 정글짐에 볼 일이 있는지 그가 서있는 방향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 보통은 위험하다고 철거하니까요. "
사실 위에서 놀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는 놀이기구이기에 요즘엔 없어져가는 추세인 정글짐을 이렇게까지 놔둔 이유를 진성 입장에서는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불과 몇개월 전까지만 있었던 영국에서도 이런 놀이기구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곧 다른 의문을 머릿속에 품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여자, 누구랑 많이 닮았는데?
" 그래도 철거하지 않고 남아있어서 다행이네요. 여기서 많이 놀았거든요. "
쓴웃음을 지으며 정글짐을 다시 바라본 그는 정글짐의 꼭대기를 바라본다. 항상 저기 누워있었던 여자아이와도 많이 놀았던 추억이 있는 장소다. 그리고 그와 다른 친구들도 이 주변에서 곧잘 놀곤 했으니 어린 시절의 기억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작은 체구의 그녀는 솜씨 좋게 정글짐을 타고 올라갔다. 꽤나 녹이 슬어있었지만 겉모습만 그렇지 아직 안쪽은 튼튼하게 버틸 수 있는만큼의 내구도는 남아있었나보다. 빠르게 정글짐의 꼭대기에 올라가는 여자를 바라보고 있던 진성은 그녀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요즘엔 그렇긴 하죠. 예전엔 여기가 친목 도모의 장이었는데 말이에요. "
아파트에 놀이터가 있기는 하지만 요즘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흥미가 가는 곳은 아니니까. 물론 아예 방치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기술의 발전은 아이들의 흥미를 다른 곳으로 끌어버렸기에 놀이터의 존재 의미가 조금은 퇴색 된게 아닌가, 하고 길고 긴 생각을 하던 진성은 다시금 들려온 그녀의 말소리에 음, 하는 소리와 함께 잠깐 생각을 해본다.
" 아무래도 많이 놀긴 했었죠. 어릴땐 거의 매일 같이 여기서 살았으니까요. 그렇게 정글짐에 누워있는 여자애랑도 친하게 지냈었죠. "
지금 생각해보면 행복한 기억이다. 일에 치여서 생활패턴은 지킬 수 조차 없는 지금과 비교하면 천국이나 다름 없는 기억.
정글짐에 올라가있던 여자를 보고 있던 진성의 눈이 살짝 커진다. 분명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의 표정은 왜 이 사람이 내 이름을 알고있지? 라는 생각에서부터 기원한다. 분명 방금의 대화에서 이름을 알려준 기억이 없었기에 놀란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던 그의 표정은 이내 약간 다른 방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 ... 주현이니? "
아까 처음 여자를 마주했을때 기억이 났던 조그마한 여자아이. 항상 이 정글짐의 위에서 놀고 있던 그 여자아이를 떠올렸던 진성은 지금 눈앞의 여자에게서 그 아이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연락이 끊어진지 오래라서 이 도시에 계속해서 살고 있을거란 생각을 안했기에 동일인물이라는 생각을 하진 않았는데.
" ㅇ,일단 우리 대화로 해결할까? "
저 표정은 분명 화가 났을때의 표정이다. 어릴때부터 알고 지냈기에 주현의 펀치에 맞는다면 정말 아플꺼라는 것도 그의 뇌리에 똑똑히 각인되어 있었고 정글짐에서 한 발자국씩 멀어지던 그는 어설픈 미소와 함께 말했다.
" 우리 지성인이잖아. 다 큰 어른이잖아. "
자연스럽게 경고등이 켜진 그의 뇌속은 이곳에서 도망가라는 신호를 강하게 보내고 있었지만 여기서 도망간다면 후일을 장담할 수 없었기에 그저 침을 꿀꺽 삼킬 수 밖엔 없었다.
쿵, 소리를 내며 한번에 바닥으로 착지하는 이주현. 우레탄 바닥에 그녀의 주먹자국이 선명하다. 살의가 느껴지는 표정. 맞았으면 정말로 병원에 실려가지 않았을까.
"사정, 사정, 그놈의 사정! 일단 맞고 시작하자고, 형씨!"
솔직히 말하자면, 그저 분풀이이다. 남겨졌다는 느낌에서 나온 서러움, 갈곳 없는 분노, 그것에 더해 너무 뻔뻔하게 추억을 회상하고 있다는 듯하면서 눈앞의 사람도 못 알아보던 친구의 엉덩이를 걷어차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5분 정도가 지났을까, 아니, 5번 정도 엉덩이를 걷어차려 시도했을까. 진성의 머리에 헤드락을 걸려 시도하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변명해보려고? 그래, 그 말이 납득이 가면 10대에서 멈출게 하지만 납득이 안 가면 바로 5배 증가인거야-?"
아직도 사나운 미소로 진성을 보고 있는 주현. 그야 그 사건으로 부터 10년이 지났다지만, 그 10년간 되새김질을 하며 계속 분노가 축적되기에는 충분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