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는 끝,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고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짧지만 잠시 동안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의 휴식, 새로운 일상을 위한 활력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그 휴식이 많이 달콤했다면 일상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감각을 되찾는 것이 어려울 때도 있다. 평화로운 세상이라면 그다지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은 아닐 텐데 지금은 평화와는 먼 세상에서 그녀를 포함한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평화에 잠시 젖었던 몸은 자칫 잘못하면 제자리를 찾지 못하게 될 터였다.
"아이고~"
아지트로 돌아온 그녀의 모습은 얼핏 봐도 심상치는 않았다. 걸음걸이야 보통 때와 그다지 다르지는 않았지만 옷이 지저분하게 이곳 저곳 찢어진 데다가, 핏자국까지 묻어 있는 걸 보면 어디서 한바탕 하고 왔구나 하고 넘어갈...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녀는 몸이 자동으로 고쳐지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오히려 OS를 사용하다가 부상을 입으면 부상이 더 심해지기도 했다) 염치 불구하고 잰걸음으로 의무실로 향했다. 거기엔 항상 누가 있었던가?
흰 커튼을 사이에 둔 여러 개의 침대. 붕대와 연고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으며 알약들도 드문드문 보입니다. 전형적인 의무실의 모습 한 편에는 그런 외관과 영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이 많습니다. 싸하게 남는 약냄새가 아닌 달콤한 과자의 냄새가 납니다. 왜 여기 있는지 모를 오븐과 커다란 냉장고가 눈에 띕니다. 베이커리와 의무실이 뒤섞인 듯한 공간에서 천천히 코코아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야 알았습니다만, 저희 로직 봄에는 저 말고도 힐러가 두 명이나 더 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의무실을 제 마음대로 갈아엎은 것이 조금 걱정이었습니다만, 다시 새삼 생각해보면 그 둘을 딱히 여기서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 괜찮을 것 같습니다.
홀짝, 따끈한 코코아를 한 모금 머금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어 흘러나온 목소리는 몇 번 들어본 적 있는 사람의 것입니다. 붉은 머리카락이 먼저 떠오르는 아가씨입니다. 저는 코코아를 꿀꺽 삼키며 입술을 핥고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들어오세요."
의무실은 고요합니다. 방음이 잘 되는 것도 아니니(이건 아마 건물 자체의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크게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잘 들려서 좋습니다. 어차피 치료는 간결하게 끝날 테니 툴을 움직여서 서랍 속에 쿠키 상자를 꺼내둡니다.
원래의 평화로운 세상이었다면 테온의 나이를 듣자마자 아연실색하며 "어린아이는 이런 위험한 일에 뛰어들면 안돼!" 라며 훈계해야하겠으나, 그들이 살고있는 이곳은 이미 반쯤 망해버린 세상. 그녀는 '어리구나.' 라는 생각만 할뿐 그의 나이를 듣고도 별 다른 생각이 없어보였다. 있다면 '아들뻘이네.' 라고 생각했으려나.
"아줌마는 36살. 누나보다는 이모가 어울리겠는걸."
꽤 오래 살았지? 이런 세상에서. 그녀는 이런 세상에서 13년을 살아남았다면 꽤 생명력 강하지 않냐는듯 물었다. 그녀는 아련하게 말을 이었다.
역시 의무실 안에는 누가 있었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바깥에서 다쳐 올 때마다 신세를 지게 되는 사람. 자신이 꽤 큰 편이기도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그 사람은 자그마했다. 외관으로 사람을 가늠하는 건 그다지 믿음직하지 않다는 걸 여기서 좀 깨닫게 되는 거 같기도 하고. 어쨌든 노크에 화답하는 목소리는 의무실에 들어오는 걸 허락했다. 그럼 들어가야지.
"실례함다~"
말꼬리를 늘이며 문을 열어젖힌 그녀는 웃는 낯으로 마주치게 될 상대의 얼굴을 마주했다. 얼굴에 난 상처와 이젠 굳어서 거칠한 핏자국이 그 표정과 괴리를 일으키지만 그다지 신경쓰이지는 않는 것 같다. 아니면 모르고 있거나.
"이야, 일거리를 들고 온 거 같아서 조금 죄송한데, 그래도 몸이 알아서 낫지는 않잖슴까?"
자연치유라는 건 한계가 있다더라, 뭐... OS에 따라선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웃으면서 의무실을 한번 스윽 둘러보았다. 분명 사람들을 치료하는 공간인데 뭐랄까, 개인의 방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럼 지금 그녀는 집주인의 허락을 받고 집에 들어온 게 되는 걸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별 생각이 없는지 그녀는 웃는 낯을 유지하며 서 있었다.
아도니아 린, 붉은 머리카락이 눈에 띄는 건장한 사람입니다. 평균보다도 훨씬 작은 저로써는 서서나 앉아서나 올려다 봐야 할 정도로 키가 크고, 건강한 모습입니다. 옷이 넝마가 되는 과정 속에 있고, 상처와 흐르다 멈춘 피가 없었더라면 어디서 격한 운동을 하고 온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만, 그랬다면 의무실에 올 리가 없었겠죠. 제가 있는 자리 근처에 있는 의자를 향해 손짓합니다.
"일단 편하게 앉으세요."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걸어갑니다. 툴을 움직여서 아도니아 씨에게 안내한 의자 앞 테이블에 쿠키 상자를 놓습니다. 냉장고를 열어 여기저기를 손짓하며 확인하다, 스탠다드하게 흰 우유를 꺼내듭니다. 꿀을 조금 섞어드리는 게 좋을까요?
편하게 앉으라, 근처에 있는 의자를 향해 손짓하는 시우의 모습에 그녀는 의자를 잠시 쳐다보았다. 음, 앉아도 괜찮으려나. 옷도 더럽고 피비린내도 배지 않을까. 그런 고민을 하기는 한 건지 금방 자리에 앉아버렸지만. "감삼다." 하는 말과 함께 털썩, 하고 의자에 체중이 실리는 소리가 의무실에 감돈다. 원래 의무실이란 곳은 그다지 즐거운 장소는 아닐 터다. 애초에 멀쩡한 상태로 오는 건 흔한 경우가 아니고... 그렇다면 주로 다쳐서 오게 될텐데 상처를 치료하는 건 즐겁지 않지. 안 그래도 아픈 상처에 또 타는 듯한 통증을 견뎌야만 빨리 낫는다니 고통을 몰아서 받는 것도 아니고.
"아 감삼다~ 마침 허기가 좀 진 참이었슴다."
뭐랄까, 손이 아니라 툴이 쿠키 상자를 가져다 놓는 걸 보고 있자니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것 같다. 저건 촉감을 느낄 수 있을까? 어쨌든 뭔가에 닿았다는 감각이 있으니까 저렇게 잘 다루게 되는 거겠지. OS란 건 신기하구나~ 라면서 새삼스래 되뇌이던 그녀는 쿠키라도 먹겠냐는 말에 웃으면서 감사를 표했다. 그러고 보니까 간식도 만들어 줬던가. 취미려나~
"직접 구우셨슴까?"
우유를 꺼내는 건 보지 못한 채, 알코올에 손을 닦아낸 그녀는 쿠키 하나를 집어들어 보다가 한 입 베어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