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 한때 전뇌도시의 클랜들 사이에서 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솔로임에도 클랜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쳐죽이고 보는 극악의 인물. 물론 소문이 그렇듯 부풀려진게 많았고 드라이도 악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언제나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고 항상 다른이들과 충돌해왔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머저리 뿐. 드라이는 항상 그렇게 생각했다. 클랜들을 적으로 돌리다보니 목숨이 위험한적도 많았지만 그 어느때도 태도를 고칠 생각따윈 하지 않았다. 일부에서 고고한 사람이라고 여겨지기도 했지만.. 결국은 적은 점점 불어났고 이번 싸움은 상당히 힘들었다. 세개의 클랜이 연합해 드라이를 노렸고 그야말로 죽음 직전에 몰린것이다. 그런 사이에도 터트리고 또 터트려서 적을 전멸시킨게 대단했지만, 이미 상처 투성이에 움직일 생각도 들지 않는다.
"아.. 다 귀찮네."
이제 됐다. 이미 드라이에게 미련따윈 없었다. 일찍이 모든걸 잃은 주제에 지금까지 살아있던건 그저 이 세상에 대한 분노를 주변에 표출하기 위해서일뿐. 생에 미련따윈 없으니까.
그런 드라이의 앞에 나타난게 밉살스러운 남성만 아니었다면, 아마 이 자리에어 죽었겠지.
"오 여기 사람이 버려져있네?" "뭐야 이 새x.. 는."
그는 당당하게 드라이를 주워가려 했으나 드라이는 그것을 전력을 다해 저항했다. 남자도 포기했는지 돌아가고, 다시 죽음을 기다리려는 시간.. 은 이어지지 못한다. 남자는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항상 찾아왔다. 먹을걸 들고, 비오는날엔 우산을 들고, 옷가지를 들고. 귀찮아 죽겠는데, 그런 마음이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진다. 끈질긴 목숨은 끊어지지도 않고 생을 이어가고 있었다.
"정말 죽고싶다면 아무것도 먹으려하지 않겠지."
그의 말에 드라이는 말문이 막혔다. 그 말대로다. 먹는다는건 살고싶다는 증거니까. 어느샌가 드라이는 남자에게 흥미가 생겼고 이 녀석이라면 어울려도 나쁘지 않을거라 생각해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아버린 그 다음날.
"야 이거봐, 개쩌는 푸딩임. 지금 우리 클랜에 들어오면 공짜로 두개야."
웃음이 나올 정도의 거래조건. 드라이는 그 맛있는 푸딩에 낚여 로직 봄에 합류했다. 그에게서 푸딩 만드는법도 배우고 점점 늘어나는 클랜원들을 몰래 돕기도하고. 아직 명확한 목적이 생긴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를 따라간다면 무언가 알 수 있지 않을까.
어느샌가 축제의 마지막날이 되었다. 모두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즐긴 축제. 전뇌도시의 축제가 뜨거운것은 그저 축제가 언제 열릴지 몰라서만은 아니다. 이 축제가 마지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딱히 안전권에 있는것이 아니다. 그것을 말은 안해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광경이 펼쳐진다. 마지막날, 사람들은 거리를 매웠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이들도. 친구와 밤새도록 술을 마시는 이들도 있었다.
전뇌도시는 얼마나 유지되는건가, 디스포가 전뇌도시마저 돌파하는거 아닐까. 이 광경은 부러져가는 촛대위나 마찬가지. 그럼에도 이벤트는 진행된다.
[원하는 사람에게 사탕을 받아옵시다!]
조금은 추상적인 문구. 마지막날의 이벤트치고는 신기했지만 뭐 참가방법 자체는 간단했다. 인류가 망하기전의 할로윈과 비슷한 느낌인거겠지.
// >>0 앵커로 자유행동과 비슷한 느낌으로 진행해주시면 됩니다. <누구에게> 부분이 중요하므로 그외의 묘사는 자유.
원하는 사람에게 사탕을 받아오라. 축제의 마지막 날, 그 마지막 이벤트의 내용은 이러했다. 이 문구를 보자마자 미나의 피가 차갑게 식어버렸다. 원하는 사람에게 사탕을 받아오라고? 안광없이 탁한 눈동자가 갈 곳을 잃은 듯 허공만을 응시했다.
그녀는 집에 돌아와 15년 전 에단과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사탕을 받고 싶은 사람은 당신 뿐인데, 지금 당신은 어디에도 없잖아. 이미 옛적에 매말라버린 눈물이 다시 흐르려는건지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미나는 왼손을 들어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굉장히 쓸쓸해보였다.
그러다 미나는 무슨 마음을 먹은건지 자리에서 일어나 클랜의 본거지로 향했다. 매우 우울한 상태였지만 예의 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0 내일이 불안하기에, 오늘에 열중하는 도시의 축제도 결국 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달콤한 장식은 끝내고, 곧 다시 오븐에 들어가게 되겠죠. 서글픈 일입니다만, 어쩔 수 없습니다. 천천히 걷습니다. 흰 가운의 옷자락이 펄럭거립니다. 사람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언제나, 대체로, 바라든 바라지 않든, 주는 입장이었기에 이런 건 새삼스럽습니다.
고민을 했습니다. 누구에게 받아야 할까?
알케스? 루온? 다른 클랜원이나.. 거기까지 흐르던 사고가 멈춥니다. 그 말고 제게 사탕을 줄 사람이 있을까요. 글쎄요. 번호를 교환한 건 이벤트가 주는 열기에 영향을 받았던 것입니다. 자주 가는 가게가 있습니다만, 대화를 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과거의 인연도 이제는 의미가 없습니다.
무작정 걷기 시작하다가 누군가와 마주쳤습니다. 기묘하게 익숙한 사람입니다.
"..저, 안녕하세요."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넵니다. 무언가, 천천히 말을 고릅니다.
"축제도 끝이 나는 것 같네요. 즐겁게 즐기셨나요? 그러면 좋겠어요. 그런데, 마지막 이벤트.. 때문에 그런데요." "사탕, 주실래요?"
>>0 벌써 축제의 마지막 날이 됐다, 시간 참 빠르지. 왜 즐거운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는 걸까, 왜 그렇게 느끼게끔 만들어진 걸까나. 고통은 그렇게 길게 흐르면서.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웃었다. 그래도 치열하기 그지 없는 삶에 잠시 동안의 휴식이 되어준 즐거운 축제였으니 후회는 없으...려나? 거리가 가득 찬 전뇌도시의 모습은 꽤 낯설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었구나 싶었다. 모두가 가장 무방비한 시간, 그런 시간을 틈타 공격이 시작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지금만큼은 마지막 날이라는 이유로 솟아나는 감정이 그런 걱정을 집어삼키고 있는 것 같다.
"사탕이라~"
마지막 날의 이벤트는 사탕 받아오기, 원하는 사람이라... 뭐랄까 추상적인 문구인 만큼 여러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 같은 문구에 그녀는 눈을 또륵, 하고 굴렸다. 그러고 보니 할로윈이라는 게 있었더랬지, 그런 기분이라도 내라는 의미일까 어떤 걸까. 그런 생각을 해 봤자 답이 나올 리 만무하다. 그보다 중요한 건 누구에게 가서 사탕을 받아오냐는 건데... 뭔가 무난하게 떠오르는 이름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떠올랐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탕이 어디서 갑자기 뿅 하고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또...뭔가 한 사람에게만 사탕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몰리면 꼭 인기투표 하는 거 같지 않을까. 이런 건 결국 주고 받는 게 최고 아닐까 생각하면서 그녀는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있으려나? 축제의 마지막 날이니까, 내일부터 원래대로 돌아갈 걸 생각하며 원래의 생활 패턴을 회복하려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원래 생활이라는 게 있다면 말이지만.
"~♪"
휘파람 소리가 퍼진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누구였으려나. 듣기를 바랐던 사람은 있다. 그리고 휘파람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알아챘으리라 생각한다. 그녀는 저만치서 발견한 인영을 향해 경쾌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인영은 선명해졌고, 마침내 그녀의 앞에는 렌이 서 있었다. 의아해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녀 역시 사탕을 받을 사람을 찾아 돌아다녔으려나~
>>0 늘 생각하지만 사회성과 사교성은 전혀 다르다는 건, 자신을 볼때마다 느끼는 사실이다. 즉 지금 류구 렌은 이성의 번호를 땄던 날보다는 아니였지만 꽤 곤란한 상황에 놓여있는 상태였다. 축제의 마지막 날이었다.
"곤란하네-"
원하는 사람에게 사탕을 받아오라는 이벤트에 렌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혼잣말을 웅얼거린다. 이벤트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은 두말할 것 없이 부모님이었고 자신의 부모님이라면 딸의 부탁에 거리낌없이 사탕을 한가득 안겨주실 게 분명했지만 일단 최후의 선택지로 보류하기로 했다. 그 뒤에 떠오르는 건, 친구들. 그리고..
"....아!"
돌고 돌아서 도달한 결론은 역시 로직 봄 사람들이었다. 대신 이야기를 해본 사람이 적다는 게 문제였지만. 차라리 일방적으로 건네주는거라면 전혀 문제가 없을텐데. 사회성이 없는 사람에게는 너무 어려운 이벤트라고- 렌은 터벅터벅 걸음을 걷다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사람을 발견하자마자 반갑게 웃음을 지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축제 기간 동안, 이벤트란 이벤트는 다 참여했지만 이번 이벤트는 이해가 잘 안갔다. 원하는 사람한테 사탕을 받아오라는 말은 뭘 뜻하는 걸까. 받아온다의 기준이 뭐지. 지나다니는 아무나한테 달라고 해도 되는 걸까. 그런데 그렇게 하면 사탕가게 주인한테 사탕을 사도 받아오는데 해당하는 걸까. 솔직히 평소에 사탕을 가지고 다닐 사람이 없을 거 같은데. 사실 이런 것보다 어려운 건 '원하는 사람'이라는 단어였다.
"원하는 사람..."
마치 자유행동을 허락 받았을 때처럼 곤란한 부분이었다. 보통 원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가족이나 친구 같은 친밀한 사이를 말할텐데 가족에게는 당연히 받으러 갈 수 없었고, 친구... 친구는 로직 봄 클랜원 뿐이다. ...우리 친구 맞겠지? 생각해보면 아직 친구라고 확답을 들은 사람들은 없는 거 같기도 하고. 만화나 책을 보면 오늘부터 우린 친구다. 하는 대사로 친구가 되던데. 목적이었던 사탕과 점점 멀어지는 생각을 하다 휴게실로 다다른 로드는 간식을 담아두는 트레이를 발견했다. 아, 맞다! 뭔가 생각난 듯 자기의 방에 있는 냉장고에서 푸딩을 꺼내서 평소라면 가지 않을 의무실로 가서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시우 씨! 그동안 간식 챙겨준 게 고마워서 저도 만들었었는데 까먹고 있었네요. 아, 다른 분들한테도 나눠줘야하는데..."
1인분이라고 하기엔 크기가 큰 푸딩을 내밀다가 답지 않게 눈치를 보더니 공손하게 손을 내밀었다.
>>106 축제의 끝무렵입니다. 최근 며칠 꽤 한가한 곳이긴 합니다만, 축제는 필연적으로 소란을 몰고오는 곳인 만큼 마냥 안심하기도 힘듭니다. 거기다 사실, 이곳의 의무실은 제 전용 공간이라는 느낌도 강하다보니 편하게 있게 됩니다. 오븐도 여기에 있을 정도니까요. 소독약 같은 것도 필요 없는 덕에 의무실 하면 으레 생각날 그런 냄새보다는, 단내가 주로 풍기는 곳입니다. 최근 툴을 얻은 뒤로는 케어도 쉬워져서 좋습니다. 옷은, 좀, 부끄럽지만요. 익숙해져 가는 중입니다. 그렇게 있던 중 누군가 들어왔습니다. 축제의 열기에 휩쓸려 다친 분일까요? 읽고 있던 책을 내려두고 보니 생기 넘치는 분홍색이 눈에 띕니다.
"어라? 로드씨? 무슨 일이세요?"
절로 궁금해집니다. 초재생능력을 가지고 있는 로드씨가 의무실에 올 일은 거의 없으니까요. 그나마도 재생으로 어쩔 수 없는 독 같은 것이 가능성 있습니다만, 실제로 어떨지는 모릅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큼지막한 푸딩을 내미셨습니다. 그러며 하는 말이.. 아하. 알 것 같습니다. 절로 나는 웃음으로 눈꼬리를 휘며 푸딩을 받아 챙깁니다.
"그럼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마침 축제니까, 축제 분위기에 맞춘 게 있습니다. 몇 개 만들지 않았습니다만.. 저는 냉장고를 열고 그 안에서 막대가 달린 빨간 사탕을 하나 꺼내듭니다. 안 쪽에 사과 하나가 통쨰로 들었고, 겉면이 붉은 설탕시럽 굳은 걸로 되어있는, 사과사탕입니다.
테온 Ev 10pt - 2 Lv up 수호 Ev 12pt - 3 Lv up 시우 Ev 12pt - 3 Lv up 류구 Ev 11pt - 2 Lv up 미나 Ev 11pt - 2 Lv up 린 Ev 10pt - 2 Lv up 현우 Ev 13pt - 3 Lv up, 1등보상 신규 Os 로드 Ev 12pt - 3 Lv up
사과가 통째로 들어간 새빨간 사탕을 아직도 막지 않고 들고 있었다. 아마 계속 보면서 감탄하고 있었던 듯 하다. 음식은 맛도 맛이지만 겉모양에서 반은 먹고 가는 경향이 있어서 이런 모양의 사탕을 좋아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먹어야 할지 고민하며 그냥 와작 개물려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교회에 대해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거 같은 테온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가족이란 보통 그런 느낌일까. 가족 같다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로드에게 가족들엔 미움도 애정도 가질 틈이 없었다.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거길 벗어난 이후엔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잘 들지도 않았다. 가족인데도 이렇게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건 매정한 일일까. 눈을 내리깔다 다시 테온을 쳐다보았다.
"네! 라면도 먹고, 노래대회도 참여했어요. 아, 테온 씨가 노래 부르는 것도 봤어요. 정말 잘 부르던데요? 가수인줄 알았어요."
축제는 끝,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고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짧지만 잠시 동안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의 휴식, 새로운 일상을 위한 활력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그 휴식이 많이 달콤했다면 일상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감각을 되찾는 것이 어려울 때도 있다. 평화로운 세상이라면 그다지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은 아닐 텐데 지금은 평화와는 먼 세상에서 그녀를 포함한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평화에 잠시 젖었던 몸은 자칫 잘못하면 제자리를 찾지 못하게 될 터였다.
"아이고~"
아지트로 돌아온 그녀의 모습은 얼핏 봐도 심상치는 않았다. 걸음걸이야 보통 때와 그다지 다르지는 않았지만 옷이 지저분하게 이곳 저곳 찢어진 데다가, 핏자국까지 묻어 있는 걸 보면 어디서 한바탕 하고 왔구나 하고 넘어갈...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녀는 몸이 자동으로 고쳐지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오히려 OS를 사용하다가 부상을 입으면 부상이 더 심해지기도 했다) 염치 불구하고 잰걸음으로 의무실로 향했다. 거기엔 항상 누가 있었던가?
흰 커튼을 사이에 둔 여러 개의 침대. 붕대와 연고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으며 알약들도 드문드문 보입니다. 전형적인 의무실의 모습 한 편에는 그런 외관과 영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이 많습니다. 싸하게 남는 약냄새가 아닌 달콤한 과자의 냄새가 납니다. 왜 여기 있는지 모를 오븐과 커다란 냉장고가 눈에 띕니다. 베이커리와 의무실이 뒤섞인 듯한 공간에서 천천히 코코아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야 알았습니다만, 저희 로직 봄에는 저 말고도 힐러가 두 명이나 더 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의무실을 제 마음대로 갈아엎은 것이 조금 걱정이었습니다만, 다시 새삼 생각해보면 그 둘을 딱히 여기서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 괜찮을 것 같습니다.
홀짝, 따끈한 코코아를 한 모금 머금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어 흘러나온 목소리는 몇 번 들어본 적 있는 사람의 것입니다. 붉은 머리카락이 먼저 떠오르는 아가씨입니다. 저는 코코아를 꿀꺽 삼키며 입술을 핥고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들어오세요."
의무실은 고요합니다. 방음이 잘 되는 것도 아니니(이건 아마 건물 자체의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크게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잘 들려서 좋습니다. 어차피 치료는 간결하게 끝날 테니 툴을 움직여서 서랍 속에 쿠키 상자를 꺼내둡니다.
원래의 평화로운 세상이었다면 테온의 나이를 듣자마자 아연실색하며 "어린아이는 이런 위험한 일에 뛰어들면 안돼!" 라며 훈계해야하겠으나, 그들이 살고있는 이곳은 이미 반쯤 망해버린 세상. 그녀는 '어리구나.' 라는 생각만 할뿐 그의 나이를 듣고도 별 다른 생각이 없어보였다. 있다면 '아들뻘이네.' 라고 생각했으려나.
"아줌마는 36살. 누나보다는 이모가 어울리겠는걸."
꽤 오래 살았지? 이런 세상에서. 그녀는 이런 세상에서 13년을 살아남았다면 꽤 생명력 강하지 않냐는듯 물었다. 그녀는 아련하게 말을 이었다.
역시 의무실 안에는 누가 있었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바깥에서 다쳐 올 때마다 신세를 지게 되는 사람. 자신이 꽤 큰 편이기도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그 사람은 자그마했다. 외관으로 사람을 가늠하는 건 그다지 믿음직하지 않다는 걸 여기서 좀 깨닫게 되는 거 같기도 하고. 어쨌든 노크에 화답하는 목소리는 의무실에 들어오는 걸 허락했다. 그럼 들어가야지.
"실례함다~"
말꼬리를 늘이며 문을 열어젖힌 그녀는 웃는 낯으로 마주치게 될 상대의 얼굴을 마주했다. 얼굴에 난 상처와 이젠 굳어서 거칠한 핏자국이 그 표정과 괴리를 일으키지만 그다지 신경쓰이지는 않는 것 같다. 아니면 모르고 있거나.
"이야, 일거리를 들고 온 거 같아서 조금 죄송한데, 그래도 몸이 알아서 낫지는 않잖슴까?"
자연치유라는 건 한계가 있다더라, 뭐... OS에 따라선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웃으면서 의무실을 한번 스윽 둘러보았다. 분명 사람들을 치료하는 공간인데 뭐랄까, 개인의 방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럼 지금 그녀는 집주인의 허락을 받고 집에 들어온 게 되는 걸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별 생각이 없는지 그녀는 웃는 낯을 유지하며 서 있었다.
아도니아 린, 붉은 머리카락이 눈에 띄는 건장한 사람입니다. 평균보다도 훨씬 작은 저로써는 서서나 앉아서나 올려다 봐야 할 정도로 키가 크고, 건강한 모습입니다. 옷이 넝마가 되는 과정 속에 있고, 상처와 흐르다 멈춘 피가 없었더라면 어디서 격한 운동을 하고 온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만, 그랬다면 의무실에 올 리가 없었겠죠. 제가 있는 자리 근처에 있는 의자를 향해 손짓합니다.
"일단 편하게 앉으세요."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걸어갑니다. 툴을 움직여서 아도니아 씨에게 안내한 의자 앞 테이블에 쿠키 상자를 놓습니다. 냉장고를 열어 여기저기를 손짓하며 확인하다, 스탠다드하게 흰 우유를 꺼내듭니다. 꿀을 조금 섞어드리는 게 좋을까요?
편하게 앉으라, 근처에 있는 의자를 향해 손짓하는 시우의 모습에 그녀는 의자를 잠시 쳐다보았다. 음, 앉아도 괜찮으려나. 옷도 더럽고 피비린내도 배지 않을까. 그런 고민을 하기는 한 건지 금방 자리에 앉아버렸지만. "감삼다." 하는 말과 함께 털썩, 하고 의자에 체중이 실리는 소리가 의무실에 감돈다. 원래 의무실이란 곳은 그다지 즐거운 장소는 아닐 터다. 애초에 멀쩡한 상태로 오는 건 흔한 경우가 아니고... 그렇다면 주로 다쳐서 오게 될텐데 상처를 치료하는 건 즐겁지 않지. 안 그래도 아픈 상처에 또 타는 듯한 통증을 견뎌야만 빨리 낫는다니 고통을 몰아서 받는 것도 아니고.
"아 감삼다~ 마침 허기가 좀 진 참이었슴다."
뭐랄까, 손이 아니라 툴이 쿠키 상자를 가져다 놓는 걸 보고 있자니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것 같다. 저건 촉감을 느낄 수 있을까? 어쨌든 뭔가에 닿았다는 감각이 있으니까 저렇게 잘 다루게 되는 거겠지. OS란 건 신기하구나~ 라면서 새삼스래 되뇌이던 그녀는 쿠키라도 먹겠냐는 말에 웃으면서 감사를 표했다. 그러고 보니까 간식도 만들어 줬던가. 취미려나~
"직접 구우셨슴까?"
우유를 꺼내는 건 보지 못한 채, 알코올에 손을 닦아낸 그녀는 쿠키 하나를 집어들어 보다가 한 입 베어물었다.
아도니아 씨는, 뭐라고 해야할까요, 넉살이 좋은 사람입니다. 기본적으로 친근하고, 동물로 치자면 비글이 떠오릅니다. 나쁜 뜻은 아닙니다. 그만큼 기운이 넘친다는 의미입니다. 허기가 친 참이었다며 웃는 얼굴에 무심코 저도 웃음이 흘렀습니다. 이면이 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어떨지는 저로써는 불명입니다만.
"고생하고 오셨으니까요."
푸스스 미소를 지으면서 우유를 들고 걷습니다. 표면에 방울이 맺힌 유리컵에 담긴 흰 우유. 꿀도 조금 넣어서 단 맛이 날 겁니다. 아도니아 씨 앞에 컵을 내려두고 제 의자에 앉습니다. 그리고 겉옷을 살짝 더 내리고, 등에서 붉은 툴을 쭉 뻗어 아도니아 씨에게 붙이려 합니다.
"네. 베이킹은 취미라서요. 아마 초코 종류가 많을 건데."
좋아하시나요? 하고 웃었습니다. 툭, 툴이 붙으면,
"약간 따끔할 수 있어요."
툴을 통해 제 피를 주입합니다. 참 이게 좋습니다. 굳이 주사기로 피를 뽑지 않는 것 말입니다. 사실, 되게 불편한 구조이긴 했습니다. 구강 섭취도 가능합니다만.. 지금은 그게 더 문제입니다. 조금.. 위험한 맛이 나는 것 같으니까 말입니다. 저의 피는. -예전, 제 피로 실험하던 이들이 있을 때 이랬다면 좀 더 나빴을까요, 좋았을까요. 힘이 없었으니 나빴겠죠. 지금은, 그래요. 한 방울로 혀를 축여주며 놀리듯 말할 수 있습니다. 더 원한다면 저를 도와주세요, 라고. ..물론 하지 않습니다. 특히, 로직 봄에서는 더더욱이요.
우물우물, 한 입 베어문 쿠키는 역시 맛있다. 직접 구운 거라면 실력이 수준급인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자니 어느새 흰 우유가 앞에 놓였다. 이렇게 친절할 수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뭐... 병원에 가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주는 간식 같은 거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너무 꼬아서 보는 건 좋지 않지. 그녀는 웃는다.
"아 그러심까? 어쩐지 실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슴다."
역시 취미였구나~ 하긴 좋아하는 게 아니면 그렇게 계속 뭘 만들기는 어렵겠지. 그리고 뒤에 이어진 초코 종류가 많을 거라는 말과 좋아하냐는 말에는, 쿠키를 베어문 뒤 긍정의 의미로 눈웃음을 지었다. 달콤한 건 최고라니까. 조금 씁쓸해도 좋고. 라고 생각하고 있자니 시우의 등에서 뻗어나온 툴이 그녀의 팔에 붙었으려나. 뭐 어디라고 다르겠냐만. 말처럼 따끔했을지도, 바늘로 찌르는 것과는 또 다른 감각이었을까, 아니면 같았을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
말없이 쿠키를 우물거리며 툴과 시우를 천천히 번갈아 보던 그녀는 우유를 마셔 입을 비우고 운을 뗐다.
"이렇게 막 수혈해 줘도 괜찮슴까? 피가 모자라다거나."
이게 효과적인 치료 방법이란 건 알지만 그 방법이라는 게 수혈이라니, 그것도 미리 뽑아놓은 게 아니라 즉석에서 뽑는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 궁금한 듯했다. 혈액주머니를 본 기억을 떠올리면, 중태에 빠진 환자에게 필요한 피의 양은 한 사람에게서 뽑아낼 수 있는 양은 아니었다. 그럼 수혈해주는 사람도 위독해지겠지. 특별한 피. 그러니까 건강에 지장이 가지 않는 한에서 수혈을 해줄 수 있는 걸까. 그럼 자기 상처는 어떻게 치료하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문이 피어오른다. 얼굴은 그런 호기심이 조금 어리긴 했어도 여전히 웃고 있지만.
실력이 좋다. 종종 듣던 말입니다. 베이커리에서 일을 하고 있던 무렵 자주 듣던 칭찬. 피를 누구에게 먹인 적도 없고, 등에서 긴 줄기가 튀어나오지도 붉은 꽃을 피우지도 못했던 그 때. 평온하고, 조용하던 시절을 떠올립니다. 그 때 바라던 건 저만의 가게였죠. 자그마하지만 제가 바라는 것들로 들어찬, 단내 나는 장소를 바랐습니다만. 쿠키를 씹는 아도니아 씨를 보다가 주변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글쎄요. 지금은 어떨까요. 어찌보면 제가 바라는 그런 곳일 수도 있습니다만, 저는, 사실 지금, 아주 조금.. 목이 마릅니다.
그녀의 팔에 붙어있는 툴을 빤히 봅니다. 아뇨,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뭐라고 할지. ..이상한 갈증이 가끔 나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창백한 장소를 떠올릴 때면 더욱 심해지는 갈증 말입니다.
"..아."
잠시 정신을 놓았습니다. 뒤늦게야 그녀가 한 질문을 이해하고 어수룩하게 웃었습니다. 제 손을 봅니다. 하얗습니다. 건강한 모습은 아닙니다. 눈앞의 아도니아 씨와는 많이 다릅니다. 작고, 여리고, 약합니다. 그리고 이것에.. 제 능력이 영향을 주지 않은 것도 아니겠죠. 하지만, 뭐...
"괜찮아요."
문제는 없습니다. 부드럽게 웃을 수 있을 정도로요.
"정 부족하다 싶으면 로드 씨에게 부탁하면 되고, 한두 명 정도로는 건강에 문제는 없어요. 주입도, 벌써 끝났다구요?"
축제가 끝나고 장식들이 점점 치워지고 있었다. 당분간 화려한 조명도 대회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축제 분위기가 제법 맘에 들었었는데. 일상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로드는 자극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만약 평화로운 일상을 지향했다면 거기서 나오지도 않았을 테다. 그렇다고 해도 끝난 축제를 혼자 즐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다음 축제 때는 더 많은 걸 즐길 수 있을거라 기대하며 아쉬움을 달래보려 했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공원을 천천히 걷다가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고 조용히 다가갔다. 살금살금, 움직이더니 뒤로 가서는 팔을 뻗어 낚아채듯 백허그를 했다.
"렌 씨, 여기서 다 만나네요!"
활짝 웃으며 렌의 반응을 살폈다. 갑자기 안은 건 렌을 친한 사람이라 인식한 이유도 있겠지만, 솔직히 반응이 궁금하기도 했다. 로직 봄에서 누굴 껴안는다고 해도 다들 아무렇게 받아줄 거 같은 사람만 있으니까. 흥미로 인해 눈에 생기가 가득해졌다. 평소보다 더욱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빤히 바라보았다.
평범하게 흘러가는 일상에 축제라는 이벤트가 잠깐 추가됐을 뿐인데 축제 기간동안 정신이 없었다. 축제가 끝나고 남아있는 몇개의 장식품들과 화려한 조명을 잠시 올려다보면서 렌은 축제 분위기에 휩쓸려서 자신이 했던 일들(만행들)을 떠올렸다가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낸다. 그때는 진짜로 사라져버리고 싶었는데..분명히 흑역사가 될거야. 너무나 자연스레 떠오르는 흑역사 기억들 덕분에 한숨을 푸욱 내쉬는 건 아주 당연한 노릇이다. 공원을 몇바퀴인가 가벼운 뜀박질로 뛰었고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다고 렌은 생각했다. 예상치 못하게 뒤쪽에서 습격(이라기보다는 허그였지만)을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로, 로드씨!?"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가 아니었더라면 단언컨데 렌은 백허그를 한 상대를 어떻게든 제압하려 했을 것이다. 아는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렌의 반응은 당황스러움이 가득 담겨서 삐그덕거리고 있었다.
크게 당황하는 렌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더 안고 있을까. 고민하며 렌의 얼굴을 보다 순순히 떨어졌다. 해를 끼칠 의도는 아니었다는 듯 팔을 쫙 벌리고 보여주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놀랄지는 몰랐는데. 전에도 성실하다는 말이나 포옹을 받았을 때 삐걱거렸던 모습을 보면 이런 부분에 약한 걸까. 로드에게 렌을 향한 악의는 전혀 없었지만 반응이 재밌다 보니 콕 찔러보게 되었다. 입꼬리를 올려 웃는 얼굴엔 즐거움이 서렸다.
"죄송해요. 반가워서 그만. 오늘도 운동 중이었던 거예요?"
공원에는 보통 움직이려고 오는 장소기도 하고, 전에 이야기를 나눴을 대 렌은 대부분의 시간을 훈련을 하는데 쓴다고 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운동을 하고 있던 게 아닐지 추측했다. 렌에게 훈련을 부탁하긴 했지만... 그 뒤로 훈련을 하진 못했다. 묘하게 시간이 맞지 않았던 거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젠 움직이지 않아도 웬만한 사람은 상대할 수 있다. 전기톱에도 죽지 않을 정도니까. ...힘은 좀 길러야 하나. 곰곰이 생각하다 아직 가지 않은 길거리 음식 노점을 발견했다.
미나는 테온의 노래를 감상하며 오랜만에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이와 처음 만났을때 그는 이 노래를 불렀다. 만남을 지속하고 결혼할때까지도 그는 종종 이 노래를 불렀다. 결혼한 뒤에도 그는 이 노래를 불렀다. 그래서인지 지금 테온이 부르는 노래는 미나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노래가 끝난 뒤 미나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박수를 쳤다.
"굉장해. 정말 가수를 해도 되겠는걸?"
그가 자리로 돌아올때즈음 간만에 활짝 웃는 모습으로 반기며 말했다. 이것도 그의 Os와 관련있을까. 미나는 곧 나올 파스타를 기다리며 그에게 물었다.
그냥 단순한 포옹일 뿐인데 어째서 그렇게까지 반응하는지, 부모님과 포옹은 안하는지 묻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부모님과 하는 포옹과 지금의 포옹은 전혀 다르다고 렌은 단언할 수 있었다. 플러스로 변명하자면- 방금 전까지 몸을 움직인 탓에 땀까지 흘렸으니까. 뿌리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안절부절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려대고 있다가 로드가 떨어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렌은 두어걸음 비척비척 움직여서 거리를 유지했다. 이건 굳이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이 얼마나 빨개져 있는지 알 것 같고..저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머릿속에 마구 떠오르는 생각들을 겨우 털어낸 뒤 렌은 로드에게로 몸을 돌렸다.
"아아뇨..이건 제가 익숙하지 못한 것 때문이니까 괜찮습니다..아- 네. 이제 막 끝난 참이라서.."
운동 중이였나는 물음에 렌은 옷자락을 당겨서 혹시 땀냄새가 많이 나진 않은지 확인하며 대답하면서 꽤나 민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운동광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것 같은 눈치였다. 그러다가 로드의 제안에 응? 하는 표정이 되어서는 눈을 땡그랗게 뜬다.
얼굴이 붉어진 거 같은 렌을 보며 웃음을 꾹 참았다. 여기서 웃으면 거리가 아니라 마음까지 멀어질지도 모른다. 이래봬도 나름 눈치는 있었다. 잘 보지 않을 뿐이지. 아마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언급했을지도 모르지만, 로직 봄 클랜원에겐 더 친절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래도 갑자기 안는 건 좀 자제해야겠네요. 다음에는 허락 받고 안을게요."
안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원래 지킬지 않을 말을 하지 않는 게 좋다는 격언도 있다. 이렇게 거창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결국 로드의 욕심이었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안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직 봄 전체를 안아주고 싶었다. 언젠가 다 안아줄 수 있겠지만. 실없는 생각을 하며 렌과 눈을 맞췄다.
Os의 기술 중 하나가 맞다는 긍정에 Os의 세계란 어떻게 발전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Os도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발전했으니 말이다. 그녀는 고작 탄환에 독을 실어 날릴 뿐이었던 자신의 Os가 독반지를 만든다던지 독사를 소환한다던지 하는 능력으로 바뀌게 될줄은 전혀 몰랐다.
"너는 어쩌다 이 클랜에 오게 된거니? 이 클랜엔 리더가 주워온 사람들이 꽤 있던데, 너도 그중에 하나니?"
허락을 받든 받지 않든 부끄러운 건 전혀 변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 전에 안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아예 없는거야? 내 의견은? 혹시 내 반응이 재밌는 걸까? 평범한 반응은 아니기는 해도 재미있다고는 생각 안하는데-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렌은 낯가림이 심하고 사교성이 낮은 사람이 할 법한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로드가 눈을 맞춰오자 처음 봤을 때처럼 슬그머니 다른 방향으로 돌리긴 했지만.
"편식은 없어서 어지간한 건 다 먹을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야채 위주의 건강식이지만 말입니다. 로드씨가 못드시는 걸 제외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노점으로 걸어가는 로드의 뒤를 따르며 렌은 성실하게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면서 대답했다. 노점은 멀지 않았을까.
"으음, 그렇지만 렌씨가 좋은걸요. 안으면 안 되나요? 그럼 어쩔 수 없지만...."안지 못하게 되면 슬프겠지만... 남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니까. 순순히 받아들이는 거 같으면서도 금방 시무룩해졌다.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아마 신경 쓰이지 않게 하려는 거겠지만, 절로 아련해지는 눈빛을 거두진 못했다. 집을 나오고 자신이 하고 싶은 걸 다 하면서 살았기 때문인지 감정을 숨기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 탓에 좋은 것도 싫은 것도 곧장 표현하고 말았다.
"저는 못 먹는 건 없어요. 야채 위주라... 야채곱창도 파는 거 같긴 하던데."
이걸 야채라고 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하나씩 주문해놓고 다 먹어보고 싶었지만 둘이서 먹는 거니까 자제햐야할 거 같았다. 그러다 렌의 물음에 생각난듯 입을 열었다.
"축제하니까, 전에 홍등가에서 미니 이벤트를 했잖아요. 그때 렌씨 주변에 사람이 엄청 많던 거 같은데 그분들 번호 다 받으신 거예요?"
로드의 말에 렌은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면서 되물었다. 사교성이 없고 낯가림이 심한 타입이다보니 이렇게 거리감을 좁혀오는 사람은 어떻게 대해야할지 모르겠다. 말을 고르느냐고 렌은 우물쭈물 땀이 식어가는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있다가 겨우 말을 웅얼거릴 수 있었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신다면.."
괜찮을지도라는 말까지는 못했다. 끝으로 갈수록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때문이다. 렌은 헛기침으로 기어들어간 목소리를 끄집어내서 자신의 물음에 답해주는 로드의 말에 대답해주려고 했다. 로드가 홍등가에서 있었던 축제 이벤트를 꺼내지 않았더라면 꽤 침착해진 목소리로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콜록! 예상치 못한 질문에 렌은 마른 기침을 했다.
뭘 안마시고 있어서 다행일 정도였다.
"그....그그그그걸..그걸 봤....그그그건.."
겨우 잊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새빨갛게 된 얼굴로 더듬더듬 말하던 렌은 상처받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은 채 로드를 외면한 상태였다.
작은 목소리기는 했지만, 로드의 기준에서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바로 표정이 밝아졌다. 오히려 방금 전보다 신이 나서는 헤실헤실 웃었다. 다른 사람과 있으면 저도 모르게 들뜨게 되었다. 예전에는 다른 사람을 만날 기회가 없었으니까. 이제 벌써 1년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사람들과 대화하고 있다는 자각을 하면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자꾸만 다가가게 되는 걸까. 잠시 생각에 빠졌다 기침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 정말 렌씨였군요. 멋졌어요!"
사람들 가운데 있던 렌을 떠올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유명한 사람이 온 거라고 생각헸을지도 모른다. 제한시간이 20분 밖에 없었는데도 그렇게 사람을 모으다니! 존경까지 느껴지는 눈빛으로 렌을 보았다.
마음의 준비를 하는데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거라고 생각하고,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지금처럼 크게 당황해서 굳어버리는 일은 줄어들테니까. 렌으로서는 다행일지도 모른다. 로드의 대답에 렌은 맞장구 대신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 마저도 뒤이은 반응에 멈춰버리고 말았지만.
"그-, 그그그건 그...어쩌다보니...정말로.."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렌은 그날 느꼈던 감정이 그대로 느껴지는 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괴성인지 신음인지, 알아듣기 힘든 정체불명의 소리를 내면서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버렸다. 누가 좀 살려줘. 아니 그냥 죽여줘. 부끄러워서 죽어버릴 것 같은데 도망쳐도 되나.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말아주세요 진짜 죽어버릴것 같아. 너무 부끄럽고 민망한 나머지 울고 싶은 기분을 느끼며 렌은 종종걸음으로 로드를 지나쳐서는 먼저 노점으로 향했을 것이다.
눈치가 보여서 일찍이 일자리를 찾아나섰으리라 짐작하며 레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아이가 성인이 되기까지 무사히 성장하는건 지금으로선 어려운 일이지. 디스포가 출현하기 전에도 그랬지만.
"나? 글쎄... 정신을 차려보니 로직 봄이더구나."
뒷사람이 이유를 정하지 못해서라고는 말 못 한다. 대충 술에 취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로직 봄이었다... 정도면 되려나. 그녀는 식전빵으로 나온 바게트 조각을 입에 넣으며 상념에 잠겼다. 리더는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군. 사람을 잘 주워오는건 좋은 사람같지만 그 외엔 평가를 내리기 어렵단 말이야.
그다지 아프지도 않은 치료에다가 맛있는 쿠키와 우유라니, 정말 다친 곳을 치료하러 오는 곳이 맞는 걸까 싶은 장소. 그녀는 남은 쿠키 조각을 입에 털어넣으며 손에 쥐고 있던 쿠키를 먹어치웠다. 그리곤 바로 우유 한 모금. 캬, 마치 맥주를 마신 것처럼 감탄사가 나올 것만 같다. 역시 맛있어. 그동안 자신의 팔에 붙은 툴에 향한 건지, 아니면 자신의 팔에 향한 건지 잘 모르겠는 시우의 시선을 살피면서 웃음짓는다. 그렇게 빤히 볼 만한 일인가? 그녀의 질문에 조금 늦게 반응한 걸 보니 역시 완벽한 정상이라고는 볼 수 없는 상태겠지, 당연한 게 아닐까. 수혈이 곧 치료라면 결국 한 사람에게 있어선 과다출혈이나 다름없지 않나?
"아항, 로드 양이 있었지 참."
그렇게 생각하니 이게 바로 무한동력인가 싶었지만 어디까지나 우스갯소리로 치부할 만한 이야기였다. 벌써부터 천천히지만 아물기 시작하는 듯한 상처를 보며 뺨에 났던 상처를 건드리던 그녀는 시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한두 명 정도로는 괜찮다... 이런 소규모 클랜에서 두 명 이상이 큰 부상을 입어버리면 클랜 전체가 휘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잠시 미뤄둔다. 그리고 음.
"그 한두 명 중에 시우 씨가 있을 수도 있잖슴까?"
듣기로 이정도로 치료에 두각을 드러내는 OS를 지닌 사람은 흔하지는 않은 거 같은데, 그만큼 중요한 존재겠지. 로직 봄의 사람들에게도, 로직 봄을 노리는 사람들에게도. 뭐 정보가 쉽게 새어나가는 건 흔한 일은 아닌 듯하니 괜한 걱정이다 싶기도 하지만. 애초에 걱정하는 게 맞나? 어느새 떨어진 툴을 회수하는 시우에게서 시선을 옮겨 툴이 붙었던 팔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방금 한 말은 기억에 남겨두지 않는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시우 씨, 수혈 말고 다른 치료법도 아심까?"
다른 치료방법이 그다지 필요없어보일 정도로 유용한 OS임에는 틀림없다만,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의무실에 머무르는 건 어떨까. 그녀는 무슨 의미가 담긴건지 알아보기 어려운, 그러니까 별 의미 없는 듯한 미소를 띄우며 너덜거리는 옷소매를 만지작거리다가 부욱, 하고 찢어낸다. 이미 소매의 역할은 다했기 때문일까.
의아하다는 듯 렌을 쳐다보았다. 로드는 진심으로 렌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걸 좋아하고,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하는 걸 즐기는 로드에게 그 짧은 시간에 사람을 많이 사귀는 건 부러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렌의 전제적인 모습을 보자니 납득이 갔다. 만약 거길 지나가고 있었다고 하면 자신도 렌에게 말을 걸고 싶었을 거였다. 렌은 어쩌다가 그랬다고는 했지만, 우연은 아니라 생각했다. 본인이 인기 있는 걸 모르는 타입인건가. 전에 읽었던 순정만화 주인공이 떠오르는 거 같기도 하다. 렌이 들었다면 기함을 할지도 모르는 생각을 하다 노점으로 향하는 헨을 뒤따라갔다.
"정말요? 렌씨가 대단하다고 해주니까 기분이 좋네요."
배시시 웃으며 노점에 가까워졌다. 메뉴판을 보니 다양한 걸 파는 거 같다. 간단한 노점이 아닌 그냥 가게 같았다. 이런 데를 오면 한번싹 다 경험해보고 싶은데... 눈을 바쁘게 돌리며 뭘 먹을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진지한 얼굴을 하다 렌에게 시선을 돌렸다.
"먼저 고르셔도 돼요. 그냥, 제가 욕심이 많아서 뭘 고를지 오래 걸리는 거 뿐이니까요."
>>354 강아지를 닮은 여성에게 끌리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건 로드주의 입장이고요. 로드는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호감이 높은 편입니다. 그냥.. 다 좋아해요. 적이어도 기본적 호감이 있어요. 이제 말 섞고 태도에 따라 갈리긴 하지만 렌은 로드에게 대화 나눔(50점)+친절함(50점)+재미있음(50점)+로직 봄 클랜원(10000점) = 총 10150점의 호감도를 가지고 있다. (100점 만점)
렌은 슬그머니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 로드의 시선을 피하며 한자한자에 힘을 줘서 필사적인 목소리로 로드의 말에 부정했다. 자신도 그렇게까지 사람이 모일거라고는 예상하지도 못했고 그만한 인원에게 번호를 얻을 수 있을거라고는 더더욱 생각 못했으니까. 그날만 생각하면 다시 식은땀이 나는 느낌이었다. 밤에는 진짜 악몽이라도 꾸는 건 아닐까 싶었다니까..
다른 곳을 보고 있던 눈동자를 슬그머니 움직여서 로드를 보던 렌은 대답 대신 고개를 좌우로 내저어보이는 걸로 대신했다. 기가 쭉 빨려서 이벤트고 뭐고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 악몽이었어 진짜로. 노점에 도착하자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는 모습은 평소와 똑같았다.
"아-..그럼, 음.."
렌은 로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해보이고는 국수 하나를 시킨 뒤에 물을 따라서 로드에게 먼저 밀어준다.
//포장마차같은 걸 생각하면 되는가. 아니면 길거리 포차같은 거랑 비슷할까....오너는 노점에서 국수와 어묵밖에 안먹어서ㅋㅋㅋ
강한 부정을 하는 렌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의도해서 모인 것보다는 어쩌다 보니 모인 게 더 놀라운 일인 거 같기도 했다. 마음 같아서는 더 이야기 하고 싶었지만, 계속 언급했다가는 렌이 밥을 먹으면서 체할 거 같아서 그 이야기는 마무리하기로 했다. 기회가 있다면 또 물어볼 수 있을까. 그동안 렌의 반응을 생각하면 다시 물을 수 있을 거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아쉬운 마음을 애써 누르고 음식을 고르는 데 집중했다.
"감사해요."
물을 건네주는 렌의 상냥한 태도에 배시시 웃었다. 렌이 물을 건네준 이후에도 제법 긴 시간 동안 고민하다가 왠지 카레가 먹고 싶어진 기분이 들어서 매운 카레를 주문했다. 그나저나 국수랑 카레를 동시에 파는 노점이라니. 바쁠 거 같다. 그만큼 다양한 음식을 만드는데 자신이 있다는 걸까. 주문을 끝내고 물을 한모금 마셨다.
"사실 저 다른 사람이랑 이런 노점에 온 건 처음이에요. 혼자서는 몇번 와봤지만... 축제가 자주 열리는 것도 아니고, 마땅히 가줄 사람이 없어서요. 렌씨라 와서 기쁘네요."
고맙다는 로드의 말에 렌은 고개를 다시 끄덕끄덕해보였다. 방금전까지 잘 익은 토마토처럼 빨개져 있던 얼굴이 평소의 색으로 되돌아가 있었지만 귀에는 아직 부끄러움과 쑥쓰러움으로 인한 여파가 남아 있다. 열기가 몰렸다가 빠져나갔지만 아직 뜨끈한 얼굴에 찬물이 담긴 컵을 가져다대며 뭔가를 더 시킬까- 하는 고민했다. 곧 이 시간에 더 먹으면 안되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지만.
그나저나 국수랑 카레를 파는 노점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공원 근처에 이런 게 있었나? 어라- 왜 못보고 넘어갔지.
"네? 아! 음, 어.. 감사합니다..?"
어지간히 얼굴의 열기가 가라앉자 렌은 컵에 담긴 물을 단숨에 비우고 물을 다시 따라서 마시다가 수줍게 말하는 로드의 반응에 눈을 좌우로 이리저리 굴렸다. 대답인지 물음인지 의아한 반응이기는 했어도 말이다. 미묘하게 올라가버린 말끝을 갈무리하려는 듯 렌은 헛기침을 한다. 컵을 양손으로 쥐고 만지작거린다.
"그래도, 로드씨가 권유하면 같이 동행할 사람은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음... 그렇지 않습니까?"
키득거리며 렌을 바라보았다. 혼자 잇는 걸 선호하지 않았다. 로드에겐 사람, 만남, 사건 같은 통제 할 수 없는 것들이 필요했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느낄 수도 있지만, 모든 게 매일 똑같은 일상을 몇년 동안 지속한다고 하면 직접 행동하는 것들이 신기하게 느껴질 지경이라는 알아줬으면 한다. 아니, 모르는 게 나으려나.
"하긴 다른 로직 봄 클랜원도 있으니까요! 이젠 다른 사람들이랑 자주 올 수 있겠네요."
렌의 말에 밝게 웃었다. 시간이 좀 지나고 나온 국수와 카레를 받아서 국수에게 렌에게 내밀었다. 숟가락을 들고 카레를 가득 퍼서 입에 넣었다. 혀를 치듯 강하게 느껴지는 매운 맛에 숨을 깊게 내쉬었다. 매운데 맛있다! 컵에 들은 물을 한번에 들이키고 카레를 퍼먹었다. 매운 걸 그리 잘 먹는 편도 아닌데 계속 찾게 되는 건 매운맛이 아니면 이런 짜릿함을 느낄 수단이 없었다. 그리고 건강에 문제없이 오래 즐길 수 있으니까. 사실 노화가 멈춘 상황에서 건강을 그리 챙길 이유가 있을까 싶었지만 말이다
"저야말로 권유해줘서 감사하다는 뜻이라고 받아주시면 되겠습니다. 사실 운동이 끝나면 뭘 먹는 편이 아니니까 말이죠."
친구들이랑은 시간이 맞질 않고, 부모님하도 그렇고. 컵의 물을 한번 더 비워낸 뒤에 다시 물을 채워넣으며 렌은 로드의 말에 대답하고는 베시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게다가 극존칭이 한결 편해보이는 존칭으로 바뀐 건 나름대로 친해졌다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눈은 제대로 마주치지는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로드씨가 제안하면 거절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편하게 권유해보세요. 다른 사람들한테 말입니다."
국수를 밀어주는 로드에게 감사합니다- 하는 인삿말과 함께 렌은 갓 나와서 뜨끈한 국물을 한번 마시고 면을 숟가락에 올려서 입안에 넣었다. 맛있다. 운동하고 난 뒤에 먹는 거라서 더 맛있을지도 모르겠다. 면치기도 없이 숟가락과 젓가락을 이용해서 국수를 먹던 렌은 딱 보기에도 매워보이는 카레를 맛있게 먹는 로드를 바라봤다. 엄청 매워보이는데 괜찮나? 하는 걱정은 덤이었다.
혹시 식단관리까지 하는 걸까. 그렇게까지 하면서 훈련한다고 생각하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자신은 운동을 하고 나면 뭐라도 입에 넣어야 직성이 풀렸다. 그렇게 운동이 끝나고 먹은 푸딩, 샌드위치, 마들렌... 그만 생각하도록 하자. 세상엔 너무 맛있는 음식이 많다. 죽기 전까지 다 먹어볼 수 있다면 좋을텐데. 만약 평생을 산다고 해도 음식은 새롭게 탄생이니 무리지 않을까 싶었다. 렌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아까 전보다는 편안헤보이는 거 같아 안심이 됐다.
"네. 이 노점이 오래 있었으면 좋겠네요."
노점이니 그렇게 오래 자리를 유지할 수는 없겠지만. 성격대로 단정하게 국수를 먹는 렌의 모습을 지켜보며 빠르게 움직이던 숟가락을 느리게 움직였다. 먹는 속도를 맞추는 편이 좋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그릇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그렇게 노력하는 것과 실전은 다르기 때문에 렌은 로드의 말에 대답했다. 그래도 익숙해지기는 했는지 얼굴 전체가 붉어지지는 않았다. 국수를 먹다가 자신을 보는 로드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갸웃해보이는 건 덤이다.
"맛도 괜찮고, 분위기도 괜찮은 편이니까 오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고개를 끄덕인 뒤에 렌은 자신이 먹는 속도를 맞춰주는 로드의 모습에 슬쩍 베시시 웃었다가 국수를 먹는데 집중했다. 금방금방 자리가 비워지고 자리가 차는 속도가 빠른 노점인 만큼 그릇이 바닥을 보였을 때,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으로 채워져 있었다. 간단한 식사를 마친 뒤에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난 렌은 로드를 향해 목례를 해보였다.
한 번 나갔다 와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영혼까지 삼켜 소화시켜도 문제 없을만한 사람이 어디에는 있지 않을까요? 괜히 혼자 나섰다가 클랜에 해가 되는 건 바라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먼저 덤비면 어떨까. ..새삼 생각합니다만, 저도 성격이 많이 나빠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유한 사람은 죽어가는 세상입니다. 한 방울 선의가 사람을 묶고 끌고가는 세상이죠. 아도니스 씨의 팔에서 시선을 떼며 웃습니다. 아마 조금 곤란한 미소가 아닐까요.
“실제로 로드 씨의 피를 마신 적은 없지만요?”
아직은요. 아마 위급해지면 그러긴 할 텐데.. 아직은 거부감이 듭니다. 죽지 않는다곤 해도 같은 클랜원의 피를 마시는 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당장 디스포에 꽂아도 생명력을 먹을 수 있으니 아마 되도록 없을 일이긴 합니다. 아마 대부분, 제가 피를 쓸 일은 전장일 테니까 더더욱 그렇습니다. 다만, 아도니아 씨의 말대로 제가 부상을 입는 경우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대부분은 적에게 툴을 꽂고 흡수를 하든 하면 어떨까 싶지만..
“일단..저희 클랜에 저 말고 다른 힐러분도 계신 걸로 알고는 있어요...”
목소리에 확신이 없는 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기껏해야 작은 상처나 감기 정도를 치료하는 분들이시다 보니. 당장에 제가 약한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자기방어가 가능한 사람입니다만 전문적인 전투요원은 아닙니다. 저는 이미 다 사라진 아도니아씨의 상처를 떠올렸습니다. 제가 없더라도 치료는 받았겠습니다만..
“네? 아, 수혈 말고는 경구 섭취, 그러니까 드시는 쪽의 회복량이 높아요. 추천은 하지 않지만요.”
다소의 중독성을 동반하는 달콤하고 몸을 강화 시키는 피. 아무리 다르게 들어도 위험합니다. 그나마 그냥 맛있는 수준이었던 예전에야 별 문제 없이 드렸습니다만, 지금은 그랬다가는 위험하지 않을까요. 아마 크게 문제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뭐든 확실해지기 전에는 조심하는 게 좋습니다. 고민하면서 뺨을 긁적이는데, 옷소매가 흘러내리며 붕대에 감긴 팔이 나타납니다.
그건가, 목에 송곳니를 꽂고 쭉쭉 빨아들이는 그건가! 뱀파이어라고 하던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시우가 다른 사람의 피를 빨아들이는 장면을 상상했다가 그만둔다. 이건 아닐지도. 피를 빨아들인다는 말이 흔하진 않으니 마신다고 표현한 거려나. 일단 수혈 이야기 하고 있던 거였고? 아까 보았던 블러디 툴을 떠올리는 건지 잠시 허공에 시선을 두던 그녀는 아직이라는 말이 이어지자 웃었다.
"피가 필요한 사람한테 피를 주는 걸 마다할 리 있겠슴까, 더군다나 동료 아님까?"
로드를 떠올리면 아마 흔쾌히 주지 않을까 싶다, 나서서 어떤 느낌인지 궁금해 할거 같기도 하고. 그러다가 이어지는 이야기는 어느 정도 고민들 담고 있었으려나, 아니면 평소에는 생각해 본 적 없는 이야기였을까. 확신이 없는 듯한 목소리에 그녀는 웃는 낯으로 고갤 끄덕였다. 있긴 있지, 시우와 비교하기에는 좀 많이 부족한 감이 있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확실히 특이하긴 특이한 거 같다. 유난히 강하달까.
"피를 직접 먹어야 하는 검까...음~ 그게 부담이 덜하면 그 쪽이 나을지도."
추천하지 않는 이유는 뭠까? 너무 꼬치꼬치 캐묻는 것 같지만 궁금하니 어쩔 수 없달까, 같이 디스포도 잡고 다치는 꼴도 본 마당에 이것저것 알고 있으면 좋을 거고. 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쨌든 피를 뽑아내는 건 마찬가지...그러니까 이런 걸 물어본 게 아닌데. 그녀는 의사 하면 떠오르는 스테레오타입을 그리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 그 팔은 왜 그러심까?"
대강 짐작은 간다만. 누가 저 팔만 집중적으로 공격한 게 아니라면야... 저게 걱정인 걸까. 아니면 뭘까. 그녀는 웃는 낯으로 그 팔을 빤히 바라보았다.
별안간 거점에서 알케스의 어이없다는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알케스가 이상한거야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 보통 큰 소리는 잘 안내는편인데.. 무슨 일인가 싶어 알케스의 지정석이나 다름없는 소파쪽을 본다면 처음보는 여성과 이야기하고 있는 알케스가 보일것이다. 여성쪽은 꽤 심각해보이는 표정이었고 알케스는 적당해 보이는 표정으로 그것을 듣고 있었다.
대화를 슬쩍 들어보거나 옆에 있던 루온에게 물어본다면. 여성이 플레임 벨이라는 클랜의 멤버라는것을 알 수 있을것이다. 플레임벨. 전뇌도시의 클랜중에서도 상당히 상위권의 클랜으로 유명하기에 알려면 알 수도 있지만, 몰라도 이상할건 없다. 아무튼 그런곳에서 알케스에게 무슨 볼일이냐하면..
"아니 그런걸 우리한테 부탁해도 말이지~"
플레임 벨의 주요멤버 몇이서 2군을 육성시킬 생각으로 조금 멀리 나간 모양인데. 2군만 돌아온 모양이다. 이유는 즉, 갑작스런 이상현상에 의해 2군을 감싸다가 지도역이던 1군 3명이 모두 큰 부상을 입고 2군을 도망보낸 모양. 간단히 말해서 생사가 묘연한 주요멤버의 구원이 목적이었다.
"귀찮은데.." "어떻게든 부탁드릴게요, 사례는 넉넉히 할테니까.."
사례라, 먹을거라도 많이 주려나? 일단 알케스는 썩 내켜보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흐음~?
// 아주 잠깐만 나갔다와야해서 미리 올려둘게요! 예정대로 8시 30분까지 레스 받으니 안심하시길~!
"상위 클랜들끼린 서로 견제가 심해서 괜히 잘못 말했다가 오히려 공격당할 위험도 있어요."
여성은 테온이 끼어들자 의외로 순순히 설명해줬는데, 오히려 같은 상위권들이기에 호시탐탐 서로의 약점을 노리고 있는거라고 한다. 즉 주요멤버가 셋이나 빠져있다는게 들키면 오히려 본진이 공격당해도 이상하지 않는다는것. 하위중에서도 최하위인 로직봄과 다르게 저 위쪽은 상당히 난리인가보다.
"일단 가능한 중위권 클랜들에겐 다 말해두긴 했지만.. 일단 혹시나하고 이곳에도 온겁니다."
들어주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듯. 여성은 알케스를 흘끔 바라봤다.
"일단은 가보겠습니다.."
추후의 선택은 이쪽에 맡기는 모양인지. 여성은 알케스에게 인사를 하곤 거점을 떠났다. 뭐 이것저것 불편한 느낌은 많긴한데.
"뭐어~ 귀찮다. 가고싶은 사람 있으면 가던가."
잠깐 고민하는척을 하던 알케스는 결국 그렇게 말하며 다시 드러누웠다. 갈 생각이 있다면 자세한 설명이나 질문이 있다면 옆의 루온에게 물어보면 될거같다.
자랑스레 말하자니 괜히 부끄럽습니다만, 아마 제 치유 능력은 꽤 강할겁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상처는 피 단 한방울로도 없던 것처럼 되니 말입니다. 1군 분들이 어떤 상태일 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만, 죽지만 않았다면 살릴 수는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상태이상 같은 것에 걸렸다면 비교적 시간이 걸리겠지만요.
약소클랜이어도 힘들고, 상위클랜이어도 힘들고. 이게 전뇌도시에 현실인가 싶다. 그렇다고는 해도 로직 봄에 들어온 뒤 밥을 굶거나 부상을 입고 치료를 못 받은 적은 없다. 최하위클랜임에도 불구하고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래도 1군이 2군을 다 보냈다니, 차가운 클랜은 아닌가봐. 여성의 표정을 살피다가 느러눕는 알케스를 보고 자리에 일어나서 루온에게 말을 걸었다.
"아직 여러분들은 가본적 없겠지만. 비교적 도시와 가까운 4지역을 넘어서 조금 더 가면 유적지가 있어요."
"그쪽부터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급지역 느낌으로 여기고 있고 나오는 디스포의 위험도도 훨씬 높구요. 아마 그 쪽을 수색하면 될거 같아요."
루온은 이름은 자신도 모른다고 답하고는 조금 더 설명을 이어갔다. 유적지는 말이 유적지는 사실 그냥 폐허랑 똑같은 지형이라고 하나. 그 규모가 상당히 넓다고 한다. 원래 어떤 지역이었는지 알 수 없어서 그저 유적지라고 명명했을뿐이고. 실제로 예전에 유적이 있었다거나 하는건 아닌듯. 주 디스포의 위험도는 80~100. 만만한 지역이 아니니 갈거라면 조심하고 도우미 한명정도는 데리고 가는게 좋을거라고도 말해줬다. 도우미라고 해봤자 자신이나 드라이, 혹은 알케스 정도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시체라도 괜찮겠죠. 일단 저희랑 플레임벨의 사이는 좋은편이지만.. 그래도 저번같은 일은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해주세요."
플레임 벨은 상위권중에서도 상위를 다투는 클랜이고. 그 클랜의 주요멤버라면 위험도 100이 떼거지로 몰려와도 이길 수 있을거라고. 루온은 설명했다. 그러니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거나 혹은... 함정일 가능성도 있다는것.
"뭐 이제 저같은 사람의 어드바이스가 통할 레벨이 아니니까요 다들. 부디 조심히 다녀와주세요."
"이번에 디스포가 목적이 아니라 구출이 목적이죠? 최대한 조심해서 다녀올게요. 함정이면.... 뭐, 그때 어떻게든 해볼게요! 리더랑 부리더도 조심하세요."
가볍게 말하며 걱정하는 루온을 안심시키려 했다. 솔직히 위험할 거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호기심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지만 궁금한 게 쌓으면 오히려 답답해서 죽을 수도 있으니까. 빙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전히 누워있는 알케스를 빤히 보다 슬쩍 말을 걸었다.
함정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이번 일은 꽤 괜찮습니다. 위험요소가 크고, 자칫 잘못하면 저희의 목이 달아나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다만, 이건 예전부터 그랬습니다. 아마 이 일, 빚으로 잘 달아두면 후에 좋은 일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톡, 톡, 입가를 치며 생각을 정리합니다. 사실, 구출 과정에 대한 짐작은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디스포가 언제 상식이 통하덥니까.
죽은 게 아니라면 치료는 가능합니다. 불구를 되돌릴 수준은 아닙니다만, 목숨줄은 능히 붙들어둘 수 있습니다. 이건 꽤 큰 빚으로 남길 수도 있겠죠. 저희의 뒷통수가 안전하다는 경우의 일입니다만..
"아, 그렇죠. 냉동실에 아이스크림을 좀 만들어 뒀으니까, 좋을 때 드셔주세요. 저희가 돌아와서 먹을 것만 남겨주시면 됩니다."
루온은 로드의 말에 옆에서 말했다. 그리고 테온에게는 드라이라면 목적지로 가고 있으면 조금 늦게 도착할거라 답했다. 자신이 선택지상에 없는걸 깨닫고 순간적으로 슬퍼졌던 루온이었지만. 뭐 어쩔 수 있겠는가. 알케스는 누워서 만화를 보고있기는 하나, 딱히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뭐 알아서 상의해서 데려가도 좋고. 아니면 자신들만의 힘으로 가도 좋겠지.
"아이스크림이요? 언제 또.. 감사해요."
간식이 끊이지 않는 클랜. 이렇게만 놓고보면 좋은 클랜인거 같긴 하다만. 루온은 시우에게 감사인사를 전한뒤 일행들에게 사진을 건넸다. 남자 둘 여자 하나. 행방이 묘연한 주요멤버들의 사진이란다.
"다녀와요~"
// 동행자는 여러분끼리 상의해서 선택해주시면 알아서 배송해드리겠습니다. 레스 일일히 주고 받기엔 시간이 너무 걸리니~
전투능력이 없는 루온이 걱정이 되어서 심각한 표정을 해보였다. 루온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고 워낙 위험한 곳이라 했으니까. 그러다 알케스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루온과 알케스의 친분을 생각하면 루온을 그냥 두지 않을 게 분명했다. 게다가 로직 봄 클랜원들고 가만히 있지 않을거고 치유사도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루온을 빤히 바라보았다.
"부리더가 탐지계니 도움이 되겠지만... 위험한 곳이니 강요는 안할게요. ...간다면 무조건 조심이에요!"
루온은 딱히 말을 하진 않았지만. 어? 뭐야? 저 데리고 가주나요? 하는 느낌으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거의 항상 거점에서 대기를 하니까 조금 신이 난거 같다. 물론 자신은 그런걸 티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겠지만..
뭐 아무튼 시우의 말대로 최대한 시우의 근처, 후방쪽에서 있기로 하고 일행들은 출발했다. 전뇌도시에서 좀 떨어져있긴해도, 그렇게까지 먼 거리는 또 아니었기에 곧 유적지에 도착한 일행들. 루온은 도착하자마자 Os를 사용했는데 그녀의 앞으로 초록색의 격자맵과 좌표같은것들이 표시되는. 일종의 좌표 탐색형인거 같았다.
"기습이나 그런건 알 수 있겠지만. 사람을 콕 집어서 찾는건 자신 없어요. 생명체 같은건 알 수 있지만.."
이곳에는 플레임벨의 부탁을 듣고온 다른 이들도 꽤 있을테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저 평범히 사냥중인 사람들도 있겠지. 사람들과 많이 엮여서 좋은것은 없으니 조심해야될 부분이었다. 요는 수색보다는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는 느낌이라고 봐야할테고. 그럼 수색은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해야겠지.
유적지는 여기저기가 부숴져 있어서 엄폐물이라고 할만한것도 없었다. 그냥 평야에 돌무더기가 나뒹구는 수준?
루온씨는, 왠지, 생각보다 신이 나신 것 같습니다. 제가 눈치가 좋은 편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알 수 있을 정도로요. 평소 이런 일이 있으면 안쪽에만 있어서 답답했던 것일까요? 아무튼 그 모습이 보기 싫지 않습니다. 저는 조용히 웃으며, 제 곁에 붙는 루온씨에게 양해를 구하며 블러디 툴을 미리 꽂아두려고 합니다.
루온씨의 능력은, 뭐랄까, 지도 같은 거였습니다. 전투력은 모르겠습니다만, 있으면 편해보입니다.
유적지에 도착해서 루온이 OS를 쓰는 걸 보며 꽤 신기한 듯 묻는 그녀였다. 이것저것 많이 봤지만 역시 신기한 것들 투성이라니까.
"그걸로 충분하지 않겠슴까? 사람 찾으러 왔다가 실종되는 것보단 훨씬 낫슴다."
지난번 일도 있고, 다들 같은 일을 하면서도 서로 경계해야 하니 어쩔 수 없지. 혹시 모를 기습에 대한 경계가 덜어지면 그만큼 수색에 할애할 신경이 생기니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일단 엄폐물로 쓸만한 건 없어 보이는데 그럼 여기저기 나뒹구는 게 아닌 이상 여기 있는 건 아니려나. 그녀는 근처에 있는 돌멩이를 툭툭 걷어차면서 돌무더기 쪽을 살폈다. 혹시 누가 깔려 있거나 한 건 아니겠지.
루온은 두곳을 가리켰다. 한쪽은 직진하는 방향. 한쪽은 왼쪽으로 가야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아직 다른 이들의 의견까진 듣지 않았으므로 자신이 움직이지는 않은 후방의 위치를 유지했다. 잘못 하면 죽으니까.
"디스포는 생명체랑은 좀 다르지만.. 확인할 수 있어요. 시체는 무리지만.."
아마 생명이 없는것들은 그냥 하나로 퉁치는 모양이다. 로드의 말에 답한 루온은 현우를 바라봤다.
"휘말리는거면 다행이고, 잘못하면 만만하게 보이고 공격당할지도 몰라요."
위험천만한 세상이구만. 한편 그 사이에 자신에게 블러디 툴이 꼽히자 주사기 생각이 났는지 안색이 나빠졌던 루온이었지만. 그건 중요한게 아니었다. 그리고 린이 돌무더기를 슬쩍 들어올리고 있을즈음, 잔해 사이로 작은 디스포가 튀어나와 린의 주변을 맴돌았다. 로직 봄이 키우고(?) 있는 그 녀석 맞다. 깔려있던건 아닌거 같고 어느새 몰래 따라온 모양인지 삑삑 거리고 있다.
선택지는 몇가지있다. 직진, 왼쪽, 아니면 사람이 많은쪽, 그것도 아니면 디스포가 많은쪽도 있겠지.
적당히 의견을 조율하다보니 왼쪽으로 결정난거 같았다. 루온은 탐지 범위를 왼쪽으로 조금 더 넓혔고. 가능하면 사람을 마주치지 않는 루트를 일행에게 안내했다. 그래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고. 딱 한번 플레임벨에게 부탁을 받은 중위쯤 되는 클랜의 멤버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딱히 서로에게 볼일도 없었으므로 넘어가고 10분정도 더 걸었을까. 루온은 갑자기 앞쪽에 디스포 반응이 다량으로 보인다며 멈춰섰다.
"분명히 아까전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단순히 많이 있는게 아닌, 일정 거리가 가까워졌을때 보인 모양. 그리고 때마침 그 사이에 사람의 반응이 셋 포착됐다고 합니다. 이건 또.. 너무 잘 짜여진 상황이 아닐지.
"어쩌죠..?"
- 린
다만 그건 왼쪽의 이야기였고. 린은 당당하게도 혼자 직진을 선택했다. 그것을 말릴수는 없었으므로 정말로 따로 움직이게 되었는데. 그래도 루온의 통신이 연결되어 있어서 어느정도의 의사소통은 가능할것이다.
직진을 하자 꽤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는데. 대부분이 사냥중이라서 린에게 신경을 쓰지는 못한거 같았다. 그리고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수상하기 짝이 없는 바닥에 떡하니 박혀있는 문을 찾을 수 있었다. 구식 문마냥 손잡이로 여는 철문인데. 바닥에 박혀있으므로 당겨서 열어야할거 같다. 열린다면 말이다.
어쩌다 보니 일행과 떨어져서 솔로로 돌아다니게 된 그녀, 통신은 가능한데다 여기저기서 사냥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고립도 아니다. 그렇담 그다지 걱정할 거 없을지도? 자신은 걱정할 필요 없고, 당연히 루온을 포함해서 다수가 간 왼쪽도 그다지 걱정할 필요 없으니 이번 의뢰는 걱정할 점 하나 없는 의뢰인거 같다! 라는 생각인지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오."
감이 있어서 온 건 아닌데 여기에 문 같은 게 있네. 열어보시지~ 라는 느낌으로 땅에 박혀 있는 문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더니 문 손잡이를 붙잡고 힘껏 잡아당겨 본다.
현우가 제일 먼저 달려들었다. 루온이 말한 좌표상의 위치로 가자 쓰러져있는 플레임벨의 주요멤버 3명이 눈에 띄인다. 그러나 의식을 잃고 중상정도의 상처를 입긴 했으나 주변에 디스포라곤 보이지 않는다. 루온의 Os가 오작동을 한걸까?
뒤이어 로드와 테온이 도착했을 시점이었지만. 남들보다 조금 더 앞이었던 현우의 뒤쪽으로 거대한 낫 같은게 갑작스레 나타나 현우를 노렸다. 다만 그것은 현우가 미리 꺼내놨던 손에 의해 다소 여유있게 막혀서 피해는 따로 없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디스포의 모습이 드러났는데. 거대한 사마귀의 형상을 한 디스포. 물론 사마귀의 모습은 큰 문제가 아니다. 이 디스포가 카멜레온 마냥 투명해졌다가 나타났다는것이지. 순간이동 같은것은 아니었다. 그 형상은 천천히 허공에서 드러났으니까 말이다.
곧바로 로드와 테온쪽으로도 다수의 디스포가 나타났다. 크기는 하나 하나가 코끼리만한데 그 수는 10마리는 되어보인다. 어느샌가 포위당해 버렸기에 무혈로 도망치기도 쉽지 않아보인다. 하지만 대체 뭘까, 디스포란 놈들이 사람을 미끼로 두고 다른 사람을 유인하기라도 한걸까?
"..... 저희도 가는게 낫지 않을까요?"
한편 루온은, 다른 이들이 먼저 나가고 이제 시야에도 보이지 않게되자 시우에게 그렇게 말했다. 본인은 크게 신경 쓸 필요 없으니 그래도 다른 사람들을 돕는게 낫지 않겠냐는듯하다.
- 린
문을 열자 무거워보이는 철문의 모습과 다르게 문은 꽤 가볍게. 그리고 매끄럽게 열렸다. 누가 손질이라도 하고 있는거마냥 말이다. 다만 문을 열자 계단이라도 나와야할거 같은 구조와 다르게. 갑자기 양쪽 문이 다 열리면서 그대로 린을 삼켜버렸다. 무슨 뜻이냐면 원래의 문의 공간보다도 더 크게 바닥이 꺼져버리면서 그대로 일직선 추락한것이다. 무슨 함정마냥.
다만 누군가 오기를 기다린것마냥 착지하는 부분에 쿠션이 있어서 다치지는 않았고. 고개를 들자마자 보인것은 빛나는 인간이었다. 사람의 형태는 띄고 있으나 빛나고 있어서 성별이나 얼굴 같은건 알 수 없지만.
어째서인지 린은 그것이 이상한 공간에서 마지막에 당신들의 앞에 나타났던 빛나는 인간이라고.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묘하게 적대적인 느낌을 품고 있었고. 당장이라도 린을 공격하려는듯 다가오고 있었지만 말이다.
분명 보이지 않았는데 나타난 디스포를 보며 놀란 것도 잠시 사방을 감싸는 디스포에 한숨을 쉬었다. 함정일 거 같기는 했는데. 사람이 쳐뒀을 거라고 생각했지 디스포가 쳐뒀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디스포가 원래 이렇게 지능이 높았던 생물인가. 우연인지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얼른 데려가야 후유증이 없을테니 생각을 그만두고 총과 망치를 꺼내들었다.
"사마귀가 카멜레온인 건 신기하긴 하네요."
실없는 소리를 하며 사마귀형 디스포를 바라보다 테온의 걱정에 고개를 끄덕였다.
"테온 씨랑 현우 씨도 조심하세요. 사람의 목숨은 보통 한개니까."
나름 농담이라고 한 말이었다. 테온이 충각을 날리는 걸 확인하고 테온이 날린 쪽에 있는 디스포에 총을 몇번 쏘고 쓰러져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실력에 아주 자신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저는 근본적으로 비전투인원입니다. ..사실 요즘에는 이렇게 말하면 왠지 양심이 아파옵니다만. 다소, 걱정스러운 낯으로 루온씨를 바라봤습니다만, 사실 저도 이제 보이지 않는 그들이 신경쓰입니다. 아무런 연락도 없고, 오지도 않는 걸 보면 곤란한 상태겠죠. 저는 아주 살짝, 루온시에게 피를 주입한 뒤에 혈속을 발동시킵니다.
"그러면.. 안전하게 가볼까요."
겉옷을 좀 더 벗고 툴을 여러개 꺼내둡니다. 필요하다면 이 도구의 끝에서는 안개도, 가시도 튀어나오겠죠. 저는 루온씨와 함께 조심스럽게, 동료들이 떠난 곳으로 향합니다.
누가 기름칠이라도 해 놓나? 싶었을 때 쑤욱, 하고 그녀는 문 너머의 지하로 떨어졌다. 지난번 같은 계단이 아니었나? 그대로 낭떠러지일까나. 체감상 꽤 떨어지는 것 같은데 이대로면 빈대떡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으앗!"
쿵, 빠작 하는 끔찍한 소리 대신 들린 건 포옥, 하는 소리. 누군가 떨어지기를 기다린 듯이 미리 준비된 쿠션 위로 떨어진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충격을 이렇게 잘 흡수하다니 엄청난 기술력! 같은 생각을 하는 건지 웃는 낯으로 쿠션을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자신 앞에 보이는 빛나는 인간의 형상에 눈을 깜빡인다. 뭐지? 생김새도, 성별도 알 수가 없는데 분명 본 기억이 있는 듯한 느낌이다. 중요한 건 기시감보다는 저 형상의 움직임이겠지. 마치 공격할 것만 같은 느낌에 그녀는 주변을 빠르게 살펴보았다.
"워워, 살기? 위협은 하지 마심다?"
이쪽은 연약한 인간이지 말임다. OS란 게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무적이 되는 건 아니다. 게다가 상대는 미지의 존재인데 좀 무섭잖아. 그녀는 쿠션을 집어들고는 폭신함을 느끼며 발걸음을 뒤로 천천히 옮겨 물러섰다.
테온의 충각이 앞의 공간을 일그러트렸으나. 사마귀 형태의 디스포들은 날개를 꺼내서 날아올랐다. 심지어 그 속도가 상당해서 충각은 어이없게도 이미 디스포가 날아가고 없는 자리에서 터지고 말았다. 말이 쉽지 충각의 속도 자체가 그렇게 느린편이 아니기에 저 디스포의 속도와 반응속도가 상당한걸 알 수 있다.
그 중 한마리는 날아오른채로 로드의 총에 맞아 날개가 손상되서 떨어졌으나. 기동력의 일부를 잃었을뿐 그렇게 큰 피해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날개부분이긴 해도 어쨌거나 총이 박히는 수준은 되는듯. 갑각이 단단한 편은 아닌거 같기도 하다. 그리고 동시에 로드는 앞으로 가서 쓰러진 이들에게 다가갔는데. 그 순간 왼팔과 다리가 허무하게 잘려나가 하늘을 날았다.
자세히보니 어느새 투명화를 풀며 로드의 팔다리를 자른것으로 추정되는 다른 디스포 하나가 보인다. 허나 투명화도 투명화지만 속도가 너무나도 빨랐다. 보아하니 공격할때는 모습이 드러나는거 같은데 그걸 감안해도 피할새도 없었다.
그나마 상황이 좋은건 현우. 어느정도의 공격은 플러싱이 알아서 방어를 해줄터이다. 다만 현우의 공격은 허공을 갈랐다. 목표로 했던 디스포는 날아서 뒤로 물러나버렸고 두 거대한 손은 디스포를 붙잡아주려 했으나. 옆에서 튀어나온 다른 디스포 둘의 낫에 의해서 저지당했기 때문이다. 스피드는 확실하게 일행을 뛰어넘고 있었고. 더 문제는 이 놈들 다른 디스포와 다르게 협력이란걸 할 줄 아는듯 하다.
"시우씨, 저기.. 큰일이에요."
그러는 사이 루온과 시우는 일행들 근처에 도착했는데. 딱 봐도 위험한 상황이 한눈에 보였다. 그러나 더 문제는 루온이 한 말이었는데.
"디스포 반응이 늘었어요. 저 근처에만 30마리에요."
- 린
"너는. 내가"
기다리던
사람이니?
빛나는 인간형의 무엇인가는 린에게 말을 걸었다. 목소리는 여성이었으나 몸이 저렇게 빛나서야 의미는 없어보인다. 다만 조금 대화가 통하나 싶었던게 잠시. 빛나는 그것은 갑자기 손을 휘둘렀고 그 손은 린에게 닿지도 않았지만 섬뜩함은 느껴졌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공간째로 잘려나간것마냥 보이지 않는 참격이 린에게 날아왔다.
테온의 충각이 앞의 공간을 일그러트렸으나. 사마귀 형태의 디스포들은 날개를 꺼내서 날아올랐다. 심지어 그 속도가 상당해서 충각은 어이없게도 이미 디스포가 날아가고 없는 자리에서 터지고 말았다. 말이 쉽지 충각의 속도 자체가 그렇게 느린편이 아니기에 저 디스포의 속도와 반응속도가 상당한걸 알 수 있다.
그 중 한마리는 날아오른채로 로드의 총에 맞아 날개가 손상되서 떨어졌으나. 기동력의 일부를 잃었을뿐 그렇게 큰 피해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날개부분이긴 해도 어쨌거나 총이 박히는 수준은 되는듯. 갑각이 단단한 편은 아닌거 같기도 하다. 그리고 동시에 로드는 앞으로 가서 쓰러진 이들에게 다가갔는데. 그 순간 왼팔과 다리가 허무하게 잘려나가 하늘을 날았다.
자세히보니 어느새 투명화를 풀며 로드의 팔다리를 자른것으로 추정되는 다른 디스포 하나가 보인다. 허나 투명화도 투명화지만 속도가 너무나도 빨랐다. 보아하니 공격할때는 모습이 드러나는거 같은데 그걸 감안해도 피할새도 없었다.
그나마 상황이 좋은건 현우. 어느정도의 공격은 플러싱이 알아서 방어를 해줄터이다. 다만 현우의 공격은 허공을 갈랐다. 목표로 했던 디스포는 날아서 뒤로 물러나버렸고 두 거대한 손은 디스포를 붙잡아주려 했으나. 옆에서 튀어나온 다른 디스포 둘의 낫에 의해서 저지당했기 때문이다. 스피드는 확실하게 일행을 뛰어넘고 있었고. 더 문제는 이 놈들 다른 디스포와 다르게 협력이란걸 할 줄 아는듯 하다.
"시우씨, 저기.. 큰일이에요."
그러는 사이 루온과 시우는 일행들 근처에 도착했는데. 딱 봐도 위험한 상황이 한눈에 보였다. 그러나 더 문제는 루온이 한 말이었는데.
"디스포 반응이 늘었어요. 저 근처에만 30마리에요."
- 린
"너는. 내가"
기다리던
사람이니?
빛나는 인간형의 무엇인가는 린에게 말을 걸었다. 목소리는 여성이었으나 몸이 저렇게 빛나서야 의미는 없어보인다. 다만 조금 대화가 통하나 싶었던게 잠시. 빛나는 그것은 갑자기 손을 휘둘렀고 그 손은 린에게 닿지도 않았지만 섬뜩함은 느껴졌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공간째로 잘려나간것마냥 보이지 않는 참격이 린에게 날아왔다.
30마리? 저 거대하고 빠른 사마귀 같은 것들이 30마리나 더 있다니 참 슬픈 이야기입니다. 슬프다고 할까요, 다소 뒷목이 당기는 느낌이 듭니다. 아직 저희를 눈치 채지는 못했으리라 믿으면서, 천천히 제 옷을 잡습니다.
"..정말, 전투는 특기가 아닌데 말이에요.."
겉옷을 살짝 벗고, 등에서부터 여러 개의 툴을 꺼냅니다. 속도도 빠르고, 피안화를 피운다 해서 맞아줄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넓은 범위로.. 약간 고통스럽게 해드려야죠. 붉은 툴의 끝에서, 안개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하아.. 숨이 뱉어집니다. 어느 하나가 삐걱이기 시작한다 싶으면 툴을 꽂고 마셔야겠습니다..
쓰러진 이들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말이 안 되는 통증에 눈을 깜빡였다. 팔다리가 떨어진 걸 인지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하늘을 보고 드러누우며 잘려나간 팔에서 흐르는 피를 핥았다. 이젠 피는 간식이니까. 맛은 없겠지만. 꾸물꾸물 다시 자라나는 팔다리에 집중하면서 남아있는 오른손으로 총을 디스포들에게 마구잡이로 쐈다. 디스포 중 어떤 녀석이라도 맞으면 좋은 거고, 투명화가 됐더라도 맞는 소리는 날테니까 어디에 잇는지 파악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저기요! 정신 좀 차려요!"
눈을 날카롭게 쓰러져 있는 사람들에게 소리칩니다. 좀 깨서 움직여줬으면 좋겠는데! 못 일어나면 어쩔 수 없지만.
테온의 소리 폭발로 인해 날아다니던 디스포 하나의 날개가 터지면서 추락했다. 장갑도 아닌 날개부분이기에 더욱 더 약했는지 그야말로 종이였지만. 한가지 간과한게 있었다. 등뒤를 진동으로 보호하고 있었으나 디스포의 방어력이 약한거지 공격력이 약한게 아니었기에. 곧바로 등뒤에서 나타난 디스포의 손낫에 진동을 무시하고 테온의 등을 깊게 베어버리고 말았다.
"시우씨 전방 두마리!"
피안의 범위내까지 접근에 성공한 시우와 루온, 시우는 피안을 사용해서 넓게 붉은 안개를 뿌렸고 몇몇 디스포의 움직임이 느려진거 같긴 했으나. 본래 상태이상의 효과가 적은 디스포라 그런지 무력화 시키기에는 부족해 보였다. 물론 이런 다수전 이거라도 없으면 더 위험할테니 최선의 선택이겠지만. 그리고 그 순간 루온은 좌표내의 적 두마리가 시우를 노리는것을 눈치채고 크게 소리쳤다. 눈앞에는 거대한 손낫 두개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며 시우의 목을 노리고 엄청난 속도로 휘둘러지고 있었다.
로드는 잠시 자세가 무너졌지만 회복 자체는 빠르게 되고 있었다. 사방으로 갈긴 총이 보이지 않은 적도 몇번 갈겼으나. 총탄은 금새 떨어졌고 피해는 있을지언정 분산해서 쏜 터라 어느것도 치명상은 되지 못해 디스포의 움직임을 막지는 못했다. 그나마 시우의 피안으로 인해 아까보단 다소 느려진 디스포들. 그 중 세마리가 로드를 노리고 낫을 내리쳤다. 기절해 있는 사람들은... 움직일 기세도 없다. 가까이서 확인해보니 알 수 있는 사실인데. 사실상 거의 죽기 직전인거 같다.
수호는 적을 향해서 동시에 Os를 발동해 넓은 범위를 쓸어버리려 했지만. 주변의 디스포들은 일제히 날아올랐다. 다만 속도가 느려진 몇개의 개체는 혼수화에 의해 꽤 큰 피해를 입으며 날아가려다 실패하고 바닥을 뒹군다. 그럼에도 아직 쓰러진 개체는 없었고. 하늘로 날아올랐던 개체중 두마리가 수호를 노리고 돌진해왔다.
그러는 사이 현우는 안개로 인해 디스포들의 위치가 드러나길 기대했으나. 디스포들의 투명화는 생각보다 성능이 높은지 피안속에서도 건재했다. 그래도 아주 집중하면 근거리의 녀석들의 위치까지는 볼 수 있을거 같았고. 한 개체에게 플러싱을 방어로 돌린채 돌진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디스포의 모습이 갑자기 드러났는데. 특이하게도 공격할 생각을 하지 않고 양 낫을 교차해 방어자세를 취했다.
- 린
"......."
린이 공격을 피하자 사람의 형태는 고개를 기울였다. 대화가 통하고 있는건 맞는걸까? 그것은 이번엔 손가락을 까딱였고. 그러자 린의 옆. 공간이 일그러지는게 느껴진다. 만약 피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공간째로 오른팔이 날아갈것이다.
루온씨의 말을 듣자마자 피안화를 발동시키며 몸을 뒤로 쭉 뻈습니다. 꽃까지 피워서 터트리는 게 아닌, 즉발성을 위해 피인 상태로 곧바로 터트립니다. 공격 수단이 아니라, 회피를 위한 견제이기 때문입니다. 슬쩍 주변을 봅니다. 피안이 흩어져 있습니다. 피를 터트려 바닥에 피가 떨어져 있..을 겁니다. 그렇죠? 있죠?
그리고 조금 더 먼 곳을 봅니다. 로드 씨의 근처... 보이는 것으로는 분명 저희가 찾는 플레임벨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들을 치료하면 더 나아질까요? 루온씨를 흘깃 봅니다.
혹시 걱정할까 급하게 대답해주고 쓰러진 사람들을 살펴다. 이미 죽기 직전인 사람들을 살피고 혀를 찼다. 치유사가 있기는 하지만 이 상황에서 이 사람들을 치료하고 빠져나갈 수 있을까. 시우의 지원으로 속도가 느려진 디스포를 눈으로 쫓으며 세마리가 덤벼오는 걸 보고 한쪽 입꼬리만 올려서 웃으며 그 자리에 멈췄다.
공격을 피했더니 고갤 기울였다. 왜 피하는 거지? 같은 느낌인가... 아니 그야 공격을 얻어맞으면 뼈도 못 추릴 것 같으니까 그렇지. 역시 다른 세계의 존재 같은걸까 같은 생각을 하는 건지 미소를 띄우던 그녀는 상대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이번엔 또 뭐야. 하는 눈빛으로 형체를 쳐다보았다.
"저 말임까? 린이라고 함다. 아."
어쩐지 말을 계속 거는 게, 대화를 할 생각이 있는 건가 싶어서 웃는 낯으로 이름을 이야기해 주던 그녀는 오른팔이 없어져 버렸다. 이건 새로운 세계에 건넨 팔...이 아니라 공간이 일그러지며 그 쪽에 위치했던 팔이 그야말로 떨어져 나갔다. 어디로 가버렸나 내 오른팔~ 물리적으로 뜯겨 나간 기분일까, 아니면 그대로 슥삭 하고 잘려나간 기분일까. 단면이 있을까? 있다면 단면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려나. 아니면 어디론가 가버렸기 때문에 아무 일도 없을까. 통증은 있을까? 있다면 얼마나 아플까. 다행인 건 지금 그녀의 몸에는 마치 마약과 같은 것이 세차게 피를 따라 흐르고 있었다. 덕분에 아프더라도 정신을 잃지는 않았으려나.
"쿠션은 안 사라졌네, 왼손에 들고 있길 잘했슴다."
푹신푹신한 쿠션을 만지작거리며 심신의 안정을 찾고자 노력하는 듯, 조금 창백해질 것 같은 얼굴에는 미소가 어렸다.
"천천히 하는 게 어떠심까? 너무 크게 날리면 다섯 마디도 못 나누겠슴다."
한 마디에 한 부위씩 날아가면 아마 그렇겠지, 다음에 또 참격 같은 게 날아올지도 모르는 일이긴 했지만. 그녀는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위 말고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나? 이거 혹시 개미지옥 같은 거 아닌가? 그럼 어떡한담. 개미귀신을 잡아 족쳐야만 하나?
시우는 공격을 회피하는데 성공했다. 피안화가 터지며 주변의 피가 흩뿌려졌는데. 특이하게도 그 디스포들은 추적을 하지 않았다. 시우의 능력을 경계하는것처럼 두마리 모두 물러난것이다. 디스포가 능력이 있는것도 그렇고 뭔가 범상치 않았다. 한편 시우의 말에 고민하던 루온은 잠시 후에서야 입을 열었다.
"제가.. 같이 붙어서 지시를 내린다면 아마 가능은 할거에요."
다만 그건 필연적으로 시우는 그렇다치고서도 루온이 위험해진단 소리였다.
힐러가 묶여있는 사이 공격받은 테온은, 상처를 입은채로 주변을 폭발시켰다. 소리에 대응하기에 꽤나 효과적이라 할 수 있었는데. 폭발로 인해 몇마리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나 그것과 동시에 어느새 가까이, 소리도 없이 접근한 개체가 드러나며 이번에는 복부를 베어버렸다. 그래도 이번에는 조금 얕았는지 큰 부상까진 아니었으나 공략법을 읽혔다는것 만으로도 문제다.
로드는 포위당한 상태에서 대담하게도 피해를 입을시 발동하는 Os를 사용했고. 그 사실을 알리없는 디스포들의 공격이 날아들었다. 무자비한 피해량에 더불어 공격한 디스포 세마리의 움직임이 정말로 느려졌지만. 로드가 입을 공격이 사라지는건 아니다. 휘둘러진 낫에 의해 로드는 양 다리와 더불어 아예 상반신과 하반신이 깔끔하게 분리해 나갔다. 이 상황에서 살아있는게 호러라면 호러지만. 아무리 로드라도 이정도 피해를 순식간에 회복하는건 힘들고. 주변에는 아직 디스포가 많았다.
어느새 다른이들처럼 포위되어 고립된 수호는 야타가라스로 변해 날아올랐는데. 상당히 괜찮은 선택이었던거 같다. 야타가라스는 크기로만 봐도 사마귀 형태의 디스포보다 컸고 스피드도 디스포를 압도하는듯 했다. 쉽사리 공격을 회피한 수호는 주변의 상황도 쉽게 확인 할 수 있었다. 원한다면 지원도 가능할것이다.
거기서 현우는 공격을 멈추고 완전한 방어태세로 들어갔고. 디스포들을 무시하고 곧바로 쓰러진 사람들 ㅡ 로드가 있는 방향 ㅡ 에게 달려갔다. 주변에서 날아오는 공격은 플러싱이 막아주고. 그것마저 뚫은 공격은 자동으로 카운터를 날려대고 있었다. 자신의 몸이 Os의 감각으로 움직이는건 조금 이질적이긴 했으나 현 상황에서는 꽤 좋은 성능이다. 조금만 더 가면 닿을 정도의 거리. 그러나 본능적으로 이 카운터 모드. 이 상태로 시우한테까지 다시 뛰어갈 정도의 지속시간이 아니란걸 깨달을 수 있었다.
- 린
".....?"
린이라고 대답하는 말에 그 형태는 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어느새 좀 더 여성의 형태가 되어있는데 키도 줄어서 소녀정도로 보인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팔은 잡아 뜯긴것마냥 사라졌으므로 전혀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시간, 얼마, 없는걸."
다시 영문모를 소리를 하며 소녀의 형태는 손가락으로 린을 지칭했고. 이번에는 보이지 않는 일그러진 화살이 린을 향해 5발 날아들었다. 맞으면 정말 위험할거 같은 느낌이 풀풀 풍기며. 주변을 둘러보니 길이라고 할만한건 소녀의 뒤쪽밖에 없어보인다.
어째 점점 작아지는 거 같은데... 이러다 뿅 하고 사라지는 건가? 그건 그거고 이름을 들려줬더니 뭔가 시원찮은 반응이자 그녀는 조금 멋쩍은 듯 웃었다.
"내가 아는 건 그게 전부임다? 뭐 다른 신상이라도 궁금하다면 얘기해 주겠지만~"
그걸로 일이 해결된다면 개인정보 유출이야 뭐가 대수겠느냐! 나중에 도용만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해야 할까 생각하는지 그녀는 뜯겨나간 팔에서 피가 흘러나오자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대로면 몇십 초 안에 실신할지도.
"그러니까~"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니까! 뒤엣말을 간신히 삼킨 그녀는 무형인데 아무튼 화살인 게 날아들자 도핑된 몸을 움직여 피해보려고 했다. 전부 피하지는 못한 것 같지만. 이거 그래도 나갈 수 있는 길 같은 걸 찾은 것 같으니...
"시간은 없은데 말이 너무 느리심다."
제가 참을성이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라서~웃는 낯으로 그렇게 이야기하던 그녀의 눈이 빛을 내는 듯 하더니 땅을 그대로 박차고 나가 소녀 형상의 목을 잡아채려고 했다. 설마 그냥 뚫고 지나가 버린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이런 패턴이면 다음 공격을 얻어맞으면 즉사일까. 한 번 정도는 그녀의 육감이 그녀를 지켜줄 수 있으려나? 사람의 생존 본능은 어느 정도까지 밀어붙여져야 그 진가를 발휘하는 걸까?
엄청나게 느려진 디스포를 보며 쾌재를 불렀다. 비록 남이 보며 기절할 거 같은 모양새지만 죽지 않았으면 됐다. 저렇게 느려졌다면 여기로 오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조금이라도 됐을 것이다. 목적은 구출이다. 이왕 왔는데 구출하지 못하고 되돌아가는 건 너무 허무한 일이니까. 최대한 쓰러진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거리를 좁히려고 했다. 그 사이에 온 테온에게 인사를 했다.
"이 분들도 멀쩡하면 좋겠는데..."
테온에 결계에 쓰러진 사람들도 포함이 됐을까? 테온의 보호 아래 전투도 방어도 내려놓고 회복에 전념한다.
고민입니다. 루온씨의 말을 따를지, 아니면 얌전히 있을지. 다만, 저는 치료 인원이며, 직감이라고 할까요. 저 사람들의 상태는 영 좋지 못합니다. 고민은 길지 않았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금방, 수호씨가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루온씨에게 피를 다시 약간 주입하고 '혈속'을 발동시킵니다.
"가요!"
사실 알고 있습니다. 안전한 방법은 없습니다. 이 세상이 그렇죠 뭐. 만약 적이 다가온다면 드문드문 피안화를 피 째로 폭파시킵니다.
현우의 카운터 모드는 쓰러진 이들을 회수한뒤 조금 달렸을즈음 풀려버리고 말았다. 플러싱은 다른 이들을 감싸고 있기에 방어에 쓸 수 없는 상황. 인질들을 데려가자 순식간에 현우쪽으로 몰린 디스포들이 안개속에서 다수 보인다. 수많은 낫이 몰려온다. 그것을 버틸 수 있었던건 오로지 현우가 자신의 신체 자체를 강화하는 계열의 능력자였기 때문이고. 비슷하게나마 카운터 모드의 방어력을 흉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피가 튀기고 깊은 상처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테온은 로드가 있는곳까지 달려갔으나. 아무리 가속했어도 모든 공격은 피할 수 없었는지 잔상처가 남으면서야 도착했다. 슬슬 출혈량이 위험했지만 어쨌거나 결계가 쳐졌고. 테온의 행동이 봉인당하는 대가인지 상당한 방어력으로 디스포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결계덕에 로드는 회복에 전념할 수 있었고 어느새 상반신과 하반신이 붙었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경이로운 회복력이라 할 수 있겠지. 그러나 꽤 많은 상처를 단시간에 회복하고 있었기에 체력 자체의 소모가 큰것도 느껴졌다. 그래도 이제 움직일 수 있을거 같았다. 쓰러진 이들은 현우가 데려갔으므로 현재 결계 안에는 둘이 전세낸 상태이다.
수호는 공중에서 혼령포로 주변의 디스포들을 쓸어버리려 했으나 아무래도 한방으로 모두 정리되지는 않았다. 하긴 그러면 이야기가 간단하겠지. 그럼에도 꽤 자리가 났기에 시우가 혈속으로 루온을 강화시키고. 피안화를 지속적으로 사용했으나 디스포들은 영리하게도 그들과 현우의 합류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렇게 루온의 지시에 따라 아슬아슬. 현우와 접촉에 성공했을때 현우는 이미 치명상이었지만. 그럼에도 살아있기에 시우의 능력으로 회복시킬 수 있을것이었다.
다만, 그것과 얼마 차이나지 않는 찰나의 순간에. 루온이 낚아채진게 보였지만 말이다. 피안화와, 블러디 툴마저 뚫고. 자신의 커버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던 좌표의 빈틈에서 디스포는 놀랍게도 루온을 공격한것도 아니고. 입으로 낚아채서 디스포 한 가운데에다가 던져놓았다. 정말이지 영악한 디스포였지만. 끌려가기 직전 루온의 눈빛은 딱히 자신을 구하지 말고 도망치라고 말하고 있었기에.
현실적으로 테온과 로드쪽도 소모가 심했고. 현우와 쓰러진 이들도 지금바로 치료하기 시작해도 바로 완치가 되는게 아니다. 심지어 쓰러진 이들이 바로 정신을 차릴지도 의문. 어쨌건 그들은 아직 디스포 무리의 한 가운데이다. 여기서 전투를 지속하면 곧 Os를 발동할 스테미너조차 남지 않을것이다.
- 린
"?"
화살을 용케 전부 회피한 린은, 그대로 돌진해서 소녀의 목을 잡아챌 수 있었다. 분명히 물리력은 있었으나 뭔가.. 사람을 잡은듯한 촉감은 아니었다. 아무튼간에 목을 잡힌 소녀의 형태지만 딱히 고통을 느끼지는 않는듯. 오히려 그 상태에서 린을 붙잡으려는듯 손을 움직였다.
테온에 결계에서 회복을 다하고, 이젠 움직일 수 있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구출도 다 했고 이제 도망가는 게 맞지만... 루온이 잡혀간 걸 그냥 두고 갈 수 없았다. 늘 상냥하게 대해준 루온을 두고 갈 바에는 죽는 게 낫다. 테온에 결계에서 빠져나가서 루온이 도망갈 시간이라도 벌고 싶었다.
분명 목이 손에 잡혔다. 사람의 목을 쥔 것 같지는 않지만 아무튼 잡아채긴 했다. 그다지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지만서도. 오히려 소녀의 형상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붙잡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잡히면 갑자기 펑 터진다거나. 분해된다거나 하는 걸까?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그럴만도 했다. 그럼 지금까지 피한 게 말짱 도루묵이 된다는 건데...
"잘 안 들림다. 발성 기관이 뭔가 눌려서 말이 잘 안 나오는 거 같진 않은데..."
시간이 없다든가, 기다리던 사람이냐고 묻는다던가 석연찮은 구석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뭔가 말을 계속 이어가려는 듯한 소녀의 모습에 지금 이대로 소녀를 던져 버리고 저 출구로 향할지 아닐지도 모르는 길로 뛰쳐나가는 게 옳은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에 리더가 했던 말도 묘하게 신경 쓰이고, 아니,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 그녀는 뻗는 손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듯 보였다. 팔이 두 개였으면 목을 잡은 상태로 잡아챌 수 있을 텐데, 하필이면 손이 하나뿐이라서 그럴 수는 없었다. 목을 놓든지 해야 할 텐데, 딱히 목을 붙잡아도 달라지는 건 없고... 그럼 저 손에 안 닿는게 좋지 않을까? 대체 얼마나 고민을 하는 거야. 찰나의 순간에 죽어버릴지도 모르는데.
"역시 다 들을 수 있으면 들어야겠슴다."
소녀의 목을 잡느라 떨어트린 쿠션을 떠올리는 듯 미소를 띄우는 그녀는 소녀의 목을 붙잡은 채 방향을 틀어 쿠션 쪽으로 던져 버리려고 했다.
수호는 날아가는 루온을 낚아채려고 했으나. 애초에 루온을 구하는것을 전제로 노리고 있던 디스포들의 행동이 더 빨랐다. 기본 속도는 수호가 훨씬 위였음에도 함정처럼 공중에 있던 투명화했던 디스포들이 모습을 드러내 수호를 순식간에 베었다. 날개가 잘리고 두개의 낫이 수호를 꿰뚫었다. 순식간의 피해량과 날개의 손상에 그대로 추락한 수호는 지상에서 변화가 풀렸으나. 다행히도 날개가 잘린건 상처로 취급되진 않았고 낫에 찔린 상처만이 몸 크기가 돌아온 비율에 맞게 축소되었다. 물론 그럼에도 관통된건 마찬가지기에 위험한건 매한가지다.
탕탕. 그 사이에 로드의 총성이 울렸으나 더럽게도 디스포들은 낫을 이용해 공격을 최대한 막아내며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통솔된 움직임. 거기에 완벽한 기습처럼 결계에서 나온 로드의 배후에서 나타난 낫은 그대로 로드의 심장을 꿰뚫었다. 쌍극이 있기에 죽지는 않더라도 무시할만한 피해량은 아니었다.
테온도 로드와 맞춰 움직였으나. 진동파로 이동하던 테온에게 맞춰 갑자기 앞에서 나타난 디스포의 낫의 등부분이 그대로 테온을 날려버렸다. 자신의 속도가 오히려 데미지가 되어 얼굴을 제대로 얻어맞은듯 어질거리기까지 하다. 그나마 충각이 디스포 한마리를 쓰러트리긴 했으나 상황이 끔찍한건 변함이 없어보인다.
시우는 툴을 최대한 뻗어내 쓰러진 이들과 현우를 치료했으나. 잠깐 꽂은걸로 나을 피해는 아니었고 그 사이를 놓칠 디스포들이 아니었다. 치료에 할애된 블러디 툴을 노리고 남은 블러디툴을 잘라내며 나타난 디스포들은 그대로 시우를 깊게 베어버리고 말았다. 치료중이던 플레임벨의 사람들을 노리지 않은게 그나마 다행인걸까? 그와 동시에 붉은 가시가 터졌으나. 터프하게도 흡수까지 당한 디스포들은 오히려 시우를 향해 논개를 각오하고 낫을 휘둘렀다. 이건 자신의 방어에 집중하면 치료중인 플레임벨의 인원들이 죽을지도 모르겠다.
현우는 어느정도 치료를 받고 준족을 사용했고, 플러싱이 그 주변을 지키듯 섰지만. 아무래도 아까부터 혹사한 반동일까. 몸의 움직임도 느려져 있는데 디스포의 공격에 플러싱마저 파괴되고 말았다. 오히려 여기까지 버틴거에 칭찬해줘야하지 않을까. 만약 거기에 맞춰 카운터 모드를 썼다면 이어지는 공격을 피할 수 있었을테고. 그렇지 않다면 공격에 맞고 날아갔을것이다.
어쨌거나 루온이 보일 정도로 접근하는데 성공했다면. 글쎄 놀랍게도. 움직이면 죽이겠다마냥 루온의 목에 낫을 대고있는 디스포가 보이겠지. 이거 정말 디스포가 맞긴 할까?
딸깍.
세개의 코인중 하나에 금이가기 시작했다.
- 린
소녀의 손이 린의 팔에 닿기전에 린은 소녀를 집어 던지는데 성공했고. 푹신한 쿠션에 떨어진 소녀는 한번 튕기고 데굴데굴 굴렀다. 그럼에도 딱히 피해를 입은 모양새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일어나는게 느려보인다.
"문제, 문제,"
그러나 소녀가 일어나기도 전에 린은 엄청난 불길함을 예감했다. 일단 첫번째로. 피를 너무 흘렸다.
손이 닿기 전에 던져버리는 데 성공했다. 뭔가 타격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모습은 점점 이 상황이 꿈이 아닌가 하고 고민하게 만들었다. 팔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점점 흐릿해지는 의식이 그게 아니라는 걸 말해 주고 있었지만... 더군다나 이건..확실히 끝장내겠다고 말하는 듯한 느낌의 일그러짐.
"하?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면 여기서 죽여버리는 검까?"
자유로워진 손으로 옷의 자락을 찢어내 상처 부위를 꾹 눌러보지만 그다지 지혈이 효과가 있는 것 같진 않다. 지금의 일그러짐을 피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별 수 없나. 그녀는 자신의 본능을 믿어 보기로 했다. 그런 얘기가 있었던가. 죽기 직전에 가서 초인적으로 힘을 내거나 속도를 낸다고. 생존본능은 그 이름대로 그녀를 살려보낼 수 있을까?
저거, 정말로 디스포인가요? 의문이 듭니다. 툴을 끄집어 내고 곧장 달려오는 녀석들을 향해 피를 방사합니다. 그리고, 혈액경화를 사용합니다. 아마 분명, 넓게 뿌린 피는 그대로 굳어 방패가 되어주겠죠. 자기 방어에 집중하기 보다는, 다른 플레임벨 사람들을 위주로 모두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장을 뚫는 감각에 쿨럭하고 피를 뱉어냈다.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절체절명의 상황이다.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숨을 쉴 수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숨을 마실 때마다 공기가 통하면 안 될 곳에 통하는 느낌이었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개변을 이용해서 리벤지를 이용하기 전으로 돌아갔다. 이렇게면 심장이 멀쩡한 상태일까.
"부리더!"
루온을 붙잡고 있는 디스포를 떼낼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현우랑 대치 중인 디스포를 보며 이를 악 물었다. 일단 나타난 디스포에게 다시 리벤지를 이용하여 망치로 내려쳤다. 조금이라도 디스포 무리를 없애는 게 도움이 될 태니까.
시우는 넓게 방어했으나. 그만큼 허점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다행이 플레임벨 사람들은 지킬 수 있었으나. 몇개의 낫이 방어를 뚫고 시우를 두번이나 베고 지나갔다. 자기 자신도 치유가 가능하니 즉사를 하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이대로면 지치는게 먼저일것이다. 아무리 디스포에게서 흡수하더라도 피로감이나 정신, 스테미너가 무한히 샘솟는건 아니니 말이다.
특히나 테온은 피해도 컸고 소모도 컸다. 자가치유도 없는 상태로 너무 격한 움직임이 많았다. 주변에 진동을 터트리나 몸이 지나치게 무겁다. 공격을 피할틈도 없이 앞에서 진동을 뚫고 나타난 죽기 직전의 디스포의 낫에 복부가 꿰뚫린다. 이건 조금, 위험할지도.
심장을 꿰뚫린 로드는 공격전으로 개변을 사용했고. 어느새 로드는 아까의 상처가 사라져 있는채로 서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사고가 따라가지 않아 당황하던 디스포를 그대로 개변으로 인해 다시 충전된 리벤지의 힘이 담긴 망치로 디스포를 으깨버렸다.
"안돼.. 그만."
그럼에도 디스포는 15마리 가량 남아있었다. 아니, 사실. 투명화한 녀석들이라 어디서 더 추가됐을지도 모르겠지. 소모할대로 소모한 일행의 모습에 루온이 입을 열었다. 이대로면 최악의 경우 전멸이고. 못해도 반은 죽을게 뻔했다. 마치 세상이 당신들을 골탕먹이는것마냥. 모든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특수능력이 달려있는 디스포에, 디스포치고도 많은 숫자. 거기에 통솔된 움직임과 영악한 전술까지.
하지만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루온의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이 고통이라 할지라도. 다음 순간 비록 다 회복된건 아니었지만 플러싱이 다시 나타나 루온을 보호하려 했다. 그러나 허무하게도 옆에서 나타난 디스포 두마리가 각각 하나씩 플러싱을 꿰뚫어 당겨버렸고. 돌진하고 있던 현우보다도 빠르게 낫이 루온을 찌르는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러나 수호의 일점해방이 디스포의 머리를 날려버렸고. 간신히 루온이 공격당하는것만은 막아낼 수 있었다. 다만 그 무방비한 모습에, 수호의 배후에서 나타난 디스포가 수호의 등을 베었고. 일직선으로 돌진하는 현우에게는. 다섯마리의 디스포가 나타나 카운터 모드로도 다 막아낼 수 없을 난격을 날렸다.
제발..
작은 목소리와 함께,
피가 튀고.
모든것을 지워버리는 폭발이 일어났다. 최근에 꽤 많이 봤던 폭발. 처음 봤을때보다도 광범위하고 강력한 폭발이 순식간에 남아있는 디스포의 반을 재로 만들었다.
특히 모두를 공격하고 있던 가장 가까운 디스포가 중점적으로 터져나갔고. 지근거리에서 폭발이 일어났음에도 일행들은 폭발에 아무런 데미지도 없었다.
. .
세개의 코인 중 하나가. 완전히 깨져 방안에서 흩어진다.
- 린
말 그대로 죽음이 보였다. 이 공격을 맞으면 아까 떨어져나간 팔처럼 심장이 뜯겨서 죽어버리겠지. 마치 개미가 일을 하는것마냥. 매우 당연한 사실처럼 다가왔다. 그러나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으려 한다던가. 일그러짐이 풀리며, 그 반동으로 공간이 튕겨져나가 린의 심장부근을 도려내려 했으나. 어떠한 '개념'에 의해 그것은 무효로 돌아갔다. 분명히 물리력이 발동했음에도 그것은 린에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마치 무적 치트라도 쓴것마냥 말이다.
"???"
그리고 그것을 의아하다는듯 ㅡ 표정따위 없는 달걀귀신이지만 ㅡ 바라보던 소녀의 형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 도,"
그러나 말은 이어지지 못한채 그 형태는 무너져버렸다. 다만 공격은 막았으나 출혈이 사라진것은 아니었기에 시간이 오래 남진 않은것은 변함이 없었다. 이제 린의 시야에 남은것은 뒤쪽의 문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