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라의 말의 의미가 옷이 아닌 안경이라는 사실에 요조라도 조금 의아한 표정이 지어진다. 하지만 곧 납득한다. 평소에 안 끼던 걸 꼈으니까, 패션용인지 다른 용도가 있는지 하는 생각이 들 만도 하다. 그렇대도 달리 말은 안 할 거지만, 귀찮으니까, 요조라는 안경테를 한번 만지작 하고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알아서 생각하라는 의미였다.
걸으면서 얘기하자는 요조라의 제안에 아키라가 동의했으니, 요조라도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평소보다는 조금 다른, 보통 사람과 비슷한 보폭에 비슷한 걸음이다. 굳이 맞출 필요가 없는 걸음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걸으며 요조라 역시 들고 있던 스무디를 빨대로 푹푹저어 섞은 뒤 한모금 마셨다. 차고 달달한 음료가 목으로 넘어가자 조금 있을까 말까 하던 더위도 가시는 듯 하다. 그렇게 얼마를 걷다가, 요조라가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뭐부터, 말해야 하나... 시미즈 씨... 일단, 이거, 봐요..."
설명을 하려던 요조라는 말보다 보여주는게 빠를거라 생각했는지, 폰을 들어 한 영상을 재생시켜서 아키라에게 내민다. 그대로 봐도 되고 폰을 잠시 가져가서 봐도 된다고 덧붙인다. 어떤 식으로든 아키라가 편하게 볼 수 있게 해주고, 약 5분간 영상 볼 시간도 보내었을 것이다. 영상 속 내용은 어느 행사에서 있었던 듯한 퍼포먼스인데, 특주한 종이를 펼쳐놓고 그 위에 먹과 붓 만으로 스케치 없이 그림을 그리는게 주된 내용이다. 이른바 즉석 그리기라는 퍼포먼스였다.
그녀가 보여주는 영상을 바라보며 아키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즉석 그리기. 일단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왜 이걸 나에게? 라는 의문이었다. 가게에서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자신이 아니라 시미즈 본가에 가서 물어보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아니면 요조라가 직접 하고 싶어서 자신에게 묻는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지금까지 본 그녀는 그렇게까지 적극적인 인상은 아니었다. 물론 실체는 다를지도 모르나 마츠리를 돌아다닐 때의 기억은 아직 그의 머릿속에 강하게 박혀있었기에. 일단 물음이 왔으니 자신은 그에 대해서 대답할 뿐이었다.
"하는거야 개개인의 자유니까 상관없을 거예요. 반딧불을 볼 수 있는 산길 코스에서 하는 것만 아니라면. 반딧불들이 도망쳐버리거나 피해버리면 호타루마츠리의 의미가 없으니까요. 한다고 한다면 역시 호타루노히카미를 모시는 신사 근처의 백사장이 좋지 않을까 싶지만."
결론적으로는 반딧불을 볼 수 있는 구간이 아니라면 자신은, 정확히는 시미즈 일가는 크게 터치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일단 자신이 기본적으로 배운 것에 따르면 그런 느낌이었으니, 크게 차이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아키라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만약 가게에서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래도 혹시 모르니 시미즈 본가. 그러니까 제 아버지와 어머니. 정확히는 어머니에게 여쭙는 것이 좋을 거예요. 호시즈키당의 사장님에게 부탁하면 아마 대신 물어봐주지 않을까요?"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며 그는 한입 크기로 남아있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입에 마저 넣으면서 그 부드러움을 목구멍 속으로 꿀꺽 삼켰다.
"그래도 흥미로울 것 같네요. 시간이 된다고 한다면, 그리고 맞는다고 한다면, 그 상태에서 그걸 한다고 한다면 구경 정도는 가볼게요."
렌이 웃는 소리에 요조라의 시선이 또 힐끔, 움직인다. 비웃는 건 아닌 듯 하니 째릿한 반응은 없다. 그게 그렇게 웃긴가, 웃길 일인가, 하는 반응은 있었겠지만. 더 웃었다면 혀를 차는 것까지 했겠지만, 아니었으니 시선만으로 그친다. 요조라는 줄어드는 대기열을 따라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그럼, 안 타면, 되는 거고..."
애초에 무서웠으면 타겠다고 올 사람도 아니다, 요조라는. 권유를 했다면 딱 잘라 거절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군다면 한숨과 함께 쓴소리 두어마디 정도는 했을 것이고, 뭐, 렌은 그 어느 쪽도 아니라서 다행일지도 모른다. 요조라의 쌀쌀맞음은 정도가 좀 많이 강했으니 말이다.
"그럴, 거야... 일일히, 찾아다니는 거... 귀찮고..."
다음은 뭘 탈 거냐고 묻길래 요조라는 새삼 별 걸 다 묻는다는 투로 대답한다. 어차피 놀이기구는 입구와 출구가 전혀 다르니까, 나간 다음에 주변을 다시 보는게 나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요조라는 아직, 롤러코스터를 한번만 탄다고는 안 했다. 그것까지 상정하면 가능성의 수는 늘어난다. 그러니 대강 둘러댈 만큼은 대답하고, 앞을 한번 내다본다. 이번 열차는 무리고, 아마 다음 열차 쯤에 탈 수 있을 듯 싶다.
줄이 줄어들수록 덜컹거림도 비명도 리얼하게 들려오지만, 요조라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차분히 남은 인원을 보고, 지도를 가방에 집어넣고, 머리를 앞으로 넘겨와 세갈래로 나눠 땋아내리며 탈 준비를 천천히 하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기준이었다. 상대가 이 정도로도 끄떡없다면, 그냥 안전바를 잡지 않고 바로 만세를 하면서 타는 경우도 있을 수 있을테니까. 아. 거기 왼쪽도 흐트러졌어요. 그렇게 가르쳐주려고 하는 찰나, 이내 또 다시 높은 곳까지 올라온 롤러코스터는 다시 한 번 아래로 돌진했다. 그 때문에 아키라의 말은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 왼쪽도오오오오오!!! 흐어어어!!"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바람 속에 그의 목소리는 묻혔고 이내 아키라는 다시 한 번 크게 비명을 질렀다.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리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열차는 정말 빠르게 공기를 가르고 질주했고 높은 곳으로 올랐다가 내려갔다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또 다시 연속으로 회전하며 빠르게 정점을 향해서 돌진했고 이내 정점을 찍은 롤러코스터는 또 다시 90도로 땅을 향해 레일을 타고 내려찍는 구도로 향했다.
"우와. 우와. 우와. 우와아아아!!"
절로 그의 눈이 크게 뜨였으나 그는 애써 눈에 힘을 꽉 줘서 감으려고 했다. 허나 강한 바람과 공기저항은 그걸 어렵게 만들었고 아마 사진이 여기서 찍혔으면 그는 반쯤 눈을 뜨고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는 상태로 찍혔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레일을 타고 다시 제대로 앞으로 질주하던 롤러코스터는 이제 처음 자리로 돌아왔다. 안전바가 올라오자 그는 파들파들 떨리는 두 다리에 애써 힘을 줘서 밖으로 나섰고 근처에 있는 벽에 등을 기대며 숨을 내쉬었다.
미워. 미워! 완전 미워! 너 오늘 완전 무섭구 끔찍한 악몽 꾸게 해버릴 거야! 그 대상은 인형뽑기 기계였다! 말랑말랑해보이는 인형들이 줄지어 늘어선 커다란 기계들 안에 갇혀 올망졸망 코로리를 바라보고 있으니 구해줘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말하겠지만, 사실 승부심이 불타고 있을 뿐이었다. 사쿠라마츠리 때에도 풍선 다트로 훌륭하게 1등 경품이었던 커다란 인형을 따냈었는데, 이런 기계 쯤이야 이길 자신이 있었고, 인형도 제법 귀여웠다. 처음에는 갖고 있던 동전을 다 쓸 때까지만, 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다보니 지폐도 동전으로 교환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실패를 거듭하니 자존심에 스크래치도 박박 나버리고, 의욕도 상실할 지경이 되고 말았다!
"못 구해줘서 미안해에."
인형뽑기 기계에 앞에 털썩 쭈그려 앉았던 코로리는, 다른 사람이 인형 뽑기를 하러 오는 거 같길래 마냥 쭈그려 앉아있지도 못하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마음에 상처가 많이 나서 움직일 기력도 없었다. 다행히 인형뽑기 근처에 앉을 수 있도록 의자가 있었고, 코로리는 기운없이 의자로 향하더니 추욱 늘어져 기대 앉았다. 누군가 옆에 있는지 없는지 알아채지도 못할 만큼 상실감이 컸다.
아키라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역시 요조라는 조용히 듣기만 했다. 영상이 끝난 폰을 닫아 주머니에 넣으며,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 있지 않았을까. 입에 문 빨대도 마시려고 그런다기보다 생각에 잠겨 잘근거리고 있을 뿐이다. 한번씩 음료가 올라가는 걸 보면 아주 안 마시는 것도 아닌 듯 하다만, 그건 아무래도 좋을 사실이다.
다 들은 뒤 요조라는 잠시 생각하느라 말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정리를 하는지, 조건을 맞춰보는지, 눈동자가 좌우로 한번씩 데굴거린다. 흐음, 하는 고민에 찬 소리도 흘러나온다. 그러다 생각이 끝났는지 빨대를 놓고 말을 했다.
그렇다. 요조라가 그리려는 그림은 반딧불이 아니라 마츠리 중에만 개방된다는 신성한 샘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야 반딧불 그림은 이미 천막으로 그렸으니 더 그릴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요조라는 살짝 텀을 두었다가 얘기를 잇는다.
"그, 샘... 따로, 전설이, 있다고... 들어서요... 그걸... 단 한 폭, 으로, 담아내면... 어떨까... 해서..."
마치 파노라마 사진처럼 길고 긴 그림 한 폭에 전설 속 내용을 쭉 그려보고 싶다, 요조라의 말은 그런 의미다. 어찌 보면 호타루마츠리의 주제에 어긋날지도 모르니, 정식으로 문의하기 전에 미리 알아보는 것에 가깝다. 그 뒤에 마히루의 채근이 있긴 했지만, 그건 그거인 일이다. 요조라는 음료로 목을 축이고 덧붙였다.
"샘이... 개방되는, 이 시기가... 의미가, 있을, 테니까요... 아오노미즈류카미 님... 전설은..."
그렇다. 렌은 은근 궁금증도 많고 호기심도 많았다. 공부에 그렇게 호기심이 많으면 좋으려만…. 사람들을 좋아하다보니 주로 사람들에 대해 호기심이 많았다. 친하지 않으면 속으로만 생각하는 편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어느정도 선을 생각하면서 이런 것은 대답해주지 않을까, 하는 것들은 종종 물어봤다.
물에 폭싹 젖은 요조라를 상상했다가, 이내 요조라는 우비를 쓰고 있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뭔가 렌의 머릿속에서 요조라는 단호하고 철저한 느낌이다. 우비를 입어서 물을 철벽 방어 하려고 하겠지. 하지만 앞머리 정도는 젖지 않을까? 아니, 아예 그런 류의 놀이기구는 타지 않을지도 모른다.
조금씩 앞으로 앞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을 따라 줄은 점점 짧아진다. 돌아오는 열차는 타지 못하고 다음 열차는 음, 우리 앞에서 끊길지도 모르겠는데? 요조라도 곧 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머리카락을 땋기 시작했다. 렌은 조금 신기한 듯 바라봤다가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만약 우리 앞에서 딱 끊겨서, 첫번째로 자리를 고를 수 있게되면 맨 앞을 타는 편이야, 아니면 맨 끝? 그것도 아니면 중간?”
코로리가 진짜 뒷끝 부리면..... 악몽 속에 가둬버릴 수도 있는걸, 악몽으로만 이루어진 몽중몽을 무한히 반복시켜버릴 수도 있다구~! 절대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지만! ( ´∀`) 코로리한테 악몽은..... 새로 산 신발 신은 날 비오구.... 어제 산 무언가가 오늘 1+1 하고 있는 그런 꿈이니까~!
"당신은 한번씩 의외인 것을 이야기할 때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의외인 것을 이야기하네요."
샘에 대한 전설이 있다고 들었고 그것을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이요, 아오노미즈류카미라는 말이 나오자 아키라는 두 눈을 깜박이며 그 물음에 대답했다. 아오노미즈류카미. 적어도 자신은 그녀에게 그 신의 이름을 말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아니, 하지만 여기서 오래 살았으면 못 들을 이름도 아니었다. 신에게 관심이 있고, 혹은 나이 많은 어른들 중에선 이름을 알 수도 있었으니 그것을 경유해서 못 들을 것은 없었으니까.
허나 그렇다고 한들 여기서 전설에 대해서 언급할 거라고는 그로서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세이 렌. 그 남학생이 주변에 이야기를 한 것일까. 그렇게 생각을 잠시 하지만 그래도 굳이 그 의문점에 대해서 말을 꺼내진 않으며 그는 일단 고개를 끄덕인 이후,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아오노미즈류카미. 잊혀진 이름이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겐 기억되는 이름. 시미즈 가문이 아닌 이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의외라면 의외네요. 아니. 그보다는... 샘의 전설을 거론하는 것이 더욱 의외지만요. 그 전설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적어도 저희 또래중에는 없을 거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뭐,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를테면 렌이라던가. 그때 자신이 이야기를 한 것을 떠올리며 아키라는 두 눈을 깜빡인 후에 가볍게 손을 털었다. 그리고 걸음을 살며시 멈춰, 고개를 그녀 쪽으로 완전히 돌린 후에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는 것은 어차피 개인의 자유니까 시미즈 가문은 물론이고 저도 크게 말을 꺼내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그 전설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진 않을 것 같고... 그 전설을 알려달라는 말로 받아들이면 될까요?"
자구 일어났어?! 지금? 여기서?! 킁, 코 끝에 걸리는 향이 달았다. 달콤한 디저트가 있다거나 누군가 뿌린 향수 향이 그런 거라면 좋을텐데, 이 파릇한 단내는 양귀비에게서 맡아지는 그 향이었다. 풋사과 씨, 원래도 양귀비였지만 왜 더 피었어?! 코로리가 잠의 신이라서 알아챈 이 향기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피곤해보이는 모습에 코로리의 고개가 갸웃거린다. 수학여행에서 많이 놀아서 피곤한 거라면 좋을텐데, 이전 시험 대체 같이 과제를 하게 되었을 때 나누었던 이야기를 생각하면 수학여행에 와서도 공부 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풋사과 씨, 완전 시들었어. 상했는데!"
의자에 푹 기대 앉아있던 코로리는 몸을 조금 틀어서 풋사과 씨 사과 해야하는데! 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