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미즈미고의 수학여행이 규모가 어마어마하다는 건 마히루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테마파크형 섬 전체가 수학여행지라니, 이걸 듣자마자 마히루는 부럽다는 말을 먼저 했을 정도다. 그냥 놀러가는 여행 수준 아니냐고. 요조라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차례가 내년이었으면 좀 더 좋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했다.
수학여행 동안은 병원에서 처방해준 약을 먹고 낮에도 깨어있게 된 요조라는 제일 먼저 식물원으로 향했다. 왜 거기로 갔는가 하면, 아마 숙소인 콘도에서 가장 가까워 보였기 때문 아닐까. 그냥 걷다보니 가장 먼저 나온게 식물원이었던 것도 같다. 이유가 어찌 됐든 식물원으로 들어간 요조라는 느긋하게 내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런 시설이 대부분 그렇듯, 기후나 테마별로 나뉜 내부를 한곳 한곳 둘러보고 있던 중이었다. 요조라는 허브들이 가득한 테마관을 나와 열대와 온대성 식물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는데, 뭐가 잘못된 건지, 눈앞이 흐릿해지며 현기증이 몰려올 낌새가 느껴진다. 아, 이거 뭐됐는데. 잠시 벽을 짚고 서서 쉬어도 증상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한복판에 주저앉을 수는 없으니, 요조라는 조금 걸음을 재촉해서 벤치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중 겨우 빈 자리를 찾아내서 가까이 다가가니, 먼저 앉아있던 사람이 아는 듯이 말을 걸어온다. 낯선 목소리에 멈칫, 하고 선 요조라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했으나,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대강 인사만 할 수 밖에 없었다.
"에, 저, 안녕하세요..."
요조라가 이런 상태만 아니었어도 그 목소리의 주인이 지난 번 도서관에서 마주쳤던 사람임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형식상의 인사를 하고, 벤치에 빈 쪽에 앉으며 짧게 말하는게 겨우였다.
"여기, 실례... 좀, 할게요..."
으윽, 하며 앉은 요조라는 낯빛이 창백해져 있었다. 일단 앉으니 좀 나아지는 거 같았지만, 한동안은 이대로 쉬어야하지 않을까, 기껏 와서 이 무슨 고생인지, 등등 여러 생각이 들어서, 요조라는 옆사람을 알아보려 하기보다 몸을 숙이고 자신의 상태를 추슬러야 했다.
수학여행이 어마어마하긴 합니다. 토와는 2학년 때 수학여행을 갔다오기는 했지만.. 혼자 다닌 적이 적었기 때문에 혼자서 느긋한 것은 처음이기는 하지요? 그리고 이정도의 규모는... 솔직히 가능한 데가 거의 없지 않나요? 그런 생각은 뒤로한 채 요조라를 봅니다.
"아. 그렇죠. 반갑습니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요? 라고 생각하는 토와입니다. 그야. 낯빛이 창백해진 것은 물론이고 옆에서 몸을 숙이고 있는 거라던가...를 보면 웬만하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나요? 일단 좀 기다린 다음에 토와는 웬만하면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 이온음료 한 캔을 요조라에게 건네려 시도합니다.
"혹시 속이 안 좋은 건가요?" 이온음료 하나쯤은.. 괜찮나요? 라고 물어봅니다. 혹시 속이 엉망인 거면 소화제 비슷한 걸 파는 자판기도 근처에 있다고 하던데요. 같은 말을 건네는 토와입니다.
반갑다는 말에도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 요조라는 옆에서 말을 걸 때까지 줄곧 상체를 숙이고 있었다. 묶지 않은 긴 머리가 등이며 팔이며 죄 흘러내려 흐트러졌어도, 정리할 엄두도 내지 못 한 채 얕은 심호흡으로 상태를 진정시키는게 최선이었다. 그러던 중 속이 안 좋냐는 물음이 들려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자, 옆사람이 내민 이온음료가 보인다. 푹 패인 눈으로 음료를 물끄러미 바라본 요조라는 몸을 조금 들고, 손을 내밀어 캔음료를 받아든다. 그리고 골골거리며 말했다.
"속은... 아니고... 현기증, 이... 좀... 나네요..."
전날밤 잠을 좀 잤으면 모를까, 한잠도 자지 않은 채 약빨로만 돌아다니려니 탈이 안 날 수가 없었나보다. 사실 병원에서 처방 받을 적에도 꼭 가야겠냐는 말을 들었는데, 그래도 고교 생활 중에 한번인 기회를 요조라는 그냥 보내고 싶진 않았다. 조금 힘들어도 버틸 만 할 거라고 생각해서 왔는데, 이건 예상 이상이었다.
받은 음료수를 바로 마시지 않고 목덜미에 살짝 댄다. 평소보다 체온이 오른 상태기도 해서, 음료수캔의 냉기는 응급처방 정도는 되어준다. 그래도 너무 오래 대면 역효과가 날 테니 잠시만 대고 있다가 따개를 열어서 천천히 마신다. 이온음료 특유의 밍밍한 맛이 이럴 땐 반갑다. 그렇게 열도 식히고 목도 축이고 한 다음에야, 요조라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덕분에, 좀, 살만... 해졌네요... 감사합니다..."
자리 뿐만 아니라 음료가 아니었으면 잠깐은 정신을 잃었을지도 모를 상태였으니, 요조라의 감사는 제법 진심이었다. 표정 없는 얼굴이나 기운 없는 목소리가 썩 그래보이진 않았겠지만 말이다.
"현기증인가요.." 뭐 약 같은 건.. 함부로 받기 그럴 거고요. 토와 자신에게는 거의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지만, 무언가 처방을 받고 있다면 약을 함부로 먹으면 겹치는 약 같은 것 때문에 위험합니다. 휴양지 내의 의료진 쪽을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규모면 분명 의료진도 상주하고 있을 것이니까?
"조금 나아진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고개를 끄덕여 감사인사를 받은 뒤 약간은 변명처럼 말을 덧붙입니다.
"한번 본 일도 있으니까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괜찮냐고 물어볼 만한 안색인 것 같았거든요. 라고 말하면서 손끝으로 볼을 살짝 긁적이며
"아파보이면 어쩔 수 없이 눈이 가고 말아서요" 눈을 살짝 피하면서 딴청을 피우는 듯이 대답하는 토와입니다. 그래도 앉아서 식물들을 구경하기에 제법 괜찮은 스팟이기는 하지만.. 뭐 어떻겠는가.
사실 감사의 인사를 할 때까지만 해도, 요조라의 시야는 한낮에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흐렸다. 항상 그랬다. 현기증이 일면 꼭 시야가 제일 느리게 돌아오곤 했다. 그래도 옆에 사람이 있거나 한 정도는 보이니, 시선 처리에 별 문제는 없지만, 누군가를 알아봐야 할 때는 조금 곤란하다. 지금처럼, 한번 본 적이 있다고 하면, 더욱 말이다.
"일시적... 인, 거니까요... 일단은..."
요조라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등으로 눈가를 지그시 누른다. 흐린 시야를 뭉그러뜨리듯이, 몇초간 눌렀다가 떼고 눈을 느릿하게 깜빡여본다. 오래된 필름이 넘어가듯이 차차 시야가 맑아진다. 이제 바닥의 블럭도 말끔히 보일 만큼 깨끗해지면, 고개를 돌려 옆사람의 얼굴을 확인한다. 보자마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금방 떠오른 얼굴에 잠깐 동안 아, 하는 표정이 드러났다 사라진다.
"도서관, 맞죠...? 봤던 거..."
그 날 요조라는 잡지를 보며 졸다가 이 사람에게 기댔고 얼결에 실례를 했더랬지. 같은 사람에게 비슷한 민폐를 두번이나 끼칠 줄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하, 짧은 숨을 내쉰 요조라는 음료수를 옆에 내려놓고 손으로 엉망이 된 머리를 빗어 가지런히 모은다. 따로 묶지는 않고, 뒤로 모아 넘겨두곤 벤치 등받이에 기대어 다시금 긴 날숨을 내뱉는다. 낯빛은 여전히 창백하지만, 상태는 꽤 나아진 요조라는 옆사람을 힐끔 보고 중얼거렸다.
집이나 학교 근처도 아닌 곳에서 쓰러지기라도 했다간 관리감독을 하는 측에게 성대한 민폐가 될 테니 말이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으나, 아주 들지 않는 생각도 아니라서, 무심코 흘려버린 말이었다. 에휴, 이번엔 선명한 한숨 내뱉고서 음료수를 집어든다. 다 마시고 기운 좀 돌면 숙소에나 돌아가야겠다, 요조라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시적인 거라면 다행이네요." 그래도 그 일시적인 게 자주 일어난다면 병원을 추천해야 하는 건가? 같은 생각이 들지만. 본인이 스스로 인지하고 있고 꾸준히 병원을 다니고 있다면 더 관여하는 것 또한 실례니까요. 도서관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렇죠...?" 제대로 소개받았다.. 라고 하는 건 기억이 잘 안나니 넘기고. 토와는 긍정만 하고는 그나마 괜찮아진 듯한 모습을 봅니다.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는 건... 토와는 고무줄 같은 건 안 들고 다녀서 줄 수는 없군요. 앞머리용 핀은 한두개 있을지도 몰라도? 요조라의 흘린 말을 듣고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아파도 이런저런 기회가 있으면 잡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저는 생각하는 편이니까요" 가끔 이렇게 했었으면 좋았겠다. 같은 생각이 들곤 하거든요. 아마도...그건 아까웠다. 같은 느낌일까요? 라면서 저 멀리에서 바람이 불어서 흔들거리는 큰 잎을 가진 나무를 바라봅니다.
"어떻게 여기실지는 몰라도 저는 기회를 놓쳐버리고 아깝다며 울었던 걸 본 기억이 나서 그런 걸지도 몰라요?" 장난스러운 말투네요.
첫 만남에 대한 건 긍정만으로 충분했다. 요조라 역시 제대로 자기소개를 했던 기억은 없고, 그 날 상황을 돌이켜보면 안 했을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아까 분명 호시즈키, 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아, 그 날 보고 있던 잡지에서 본 건가, 정도는 유추할 만큼 정신이 맑아져온다.
"그러는게... 맞긴, 하죠... 기회는, 놓치면, 돌아오지... 않으니..."
머리를 뒤로 넘겨두니 그만큼 드러난 목덜미나 팔뚝으로 제법 시원한 공기가 느껴진다. 거대한 돔 같은 식물원이지만, 식물이 많은 만큼 환기가 잘 되고 있는 모양이다. 요조라는 이제 다 마신 캔을 옆에 내려놓고 한 팔을 벤치 등받이에 걸치며 조금 더 편한 자세를 취한다. 저멀리 나무 뿐만 아니라 벤치 근처에도 희미하게 부는 바람에 남은 열을 식히다가, 시선을 앞에 향한 채로 중얼거린다.
기회를 놓치고 안타까워하는 건 과거의 인간관계로도 차고 넘친다. 최소한 흘러가는 시간, 상황 정도는 가능한 만큼 챙기고 싶었다. 잠깐 약한 소리를 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요조라는 수학여행에 와서 여기에 있다. 힘든거야, 잠시 이렇게 쉬면 되는 일이다. 식은땀으로 들러붙었던 앞머리를 툭툭 털어 정리하고, 옆사람을 힐끔 본다. 이제 보니 머리카락이나 눈 색이 참 특이한 사람이다. 아마 3학년이겠거니, 생각하며 때 늦은 자기소개를 건네본다.
중태까지는 아니었지만 피를 토하게 만든 적은 있다. 최근 일은 아니고 네 자리수 년도 이전의 경험이긴 했지만. 더 말했다간 비밀 유지도 그렇고, 제 첫인상―이미 실전압축근육녀가 되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에 문제가 생길 것 같다. 풍어신에게도 그 정도의 상식은 있었다. 그래서 말을 하다 말고 후미카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쪽이 더 수상해 보일지도 모르는데.
"왜 그러니?"
남학생의 묘한 시선을 눈치챘는지 후미카는 상대를 빤히 바라보았다. 별달리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면 곧 신경을 끄고 다시 고개를 돌릴 것이었다.
가미즈미는 반이 다섯밖에 되지 않는 작은 학교다. 인맥이 넓지 않아 각 반의 모든 사람을 알지는 못해도, 같은 학년이라면 지나가며 한 번쯤은 마주칠 법도 하다. 그럼에도 전혀 모르는 얼굴이라는 건 다른 학년이라는 뜻이겠지. 후미카는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실수로 사람을 쳤더니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니, 역시 엄청난 근육을 가졌나보다! 이정도면 존경심보단 두려움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공주님안기를 했을때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했다면 과연 어떤일이 벌어졌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순간의 판단으로 목숨을 구했구나. 나 자신이 자랑스럽고 한심스러웠다.
"뜨거운걸 유달리 좋아하는구나 싶어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저 근처에 가는것도 꺼려할텐데. 묘하게 시선을 흘리기도 하고 여러의미로 수상한 사람이었다. 힘이 세다.. 높은 온도에 강하다.. 여기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뭐긴 뭐야. 그냥 엄청나게 힘이세고 뜨거운걸 좋아하는 이상한 사람인거지.
"2학년."
눈치를 보니 자신을 다른학년이라고 생각하고 물어보는걸텐데 어째서 말투가 하나도 변하지 않는걸까. 그래, 신경쓰지 말자. 당당하고 좋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