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자지 않은 일요일, 해가 저물고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간 요조라는 각자 귀가한 가족들과 느긋한 저녁을 즐겼다. 저녁 메뉴는 햄버그였고, 언제나처럼 맛있었다. 요조라는 부모님과 마히루가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는 걸 들으며 자신의 몫을 비웠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마히루가 내온 홍차와 디저트를 먹고, 남은 얘기를 조금 더 풀다가 요조라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간다. 가기 전, 편히 쉬렴, 이라는 부모님의 다정한 인사에 요조라는 번갈아 포옹을 해드리는 걸로 답했다.
느즈막히 돌아온 방은 어쩐지 생소하지만, 침대에 누워 조금 뒹굴거리면 금방 익숙해진다. 먹과 물감, 잉크, 묵은 종이와 새 종이, 방 한구석에 걸린 향주머니까지, 복잡하게 섞인 향들을 차츰 인지하다보면 어느새 방에 돌아왔단 실감이 든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보면,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에 오늘도 밤이 왔구나, 싶다.
잠들지 않는 날은 보통 날보다 하루가 길다. 낮도 길고, 밤은 더 길다. 잠들지 않으면 더, 더욱 길다.
기나긴 밤을 보내기 위한 준비는 언제나 방 안에서 시작됐다. 요조라는 가장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고 바닥에 앉아 낮은 테이블을 펼친다. 세 사람은 넉넉히 쓸 만한 넓은 테이블 위 한가득, 4절 스케치북의 깨끗한 면을 열어 놓는다. 그 옆엔 색연필 케이스를 놓고, 반쯤 엎드려서 스케치북 위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다가, 곧 색연필 하나를 집어들고 스케치북 위에 올린다. 그리고 사각사각, 고요한 소리를 내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밑그림도 없이 갖가지 색으로 새하얀 도화지 위를 채워나가면, 그만큼 시간도 흘러 세상은 어느새 새벽의 한중간에 접어든다. 창을 메우는 어둠은 깊어지고, 가장 작은 소리도 들릴 만치 적막해진다. 그럼에도 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 요조라의 방에 방문을 두드리는 이가 있었다.
"야... 뭐하냐... 안 자고..." "뭐하긴... 책, 보는데...?"
자다가 깨서 부엌에 가려던 마히루였다. 빛이 새어나오는 방문을 열자 침대에 엎드려 책을 보던 요조라가 뭐냐는 눈으로 쳐다본다. 그에 지지 않고 얼척 없다는 눈을 하고 있던 마히루. 고개를 가로저으며 문을 닫고 돌아선다. 저멀리 계단 내려가는 소리에 요조라는 보던 책이나 마저 보려 눈을 돌린다.
느릿느릿, 시선으로 활자를 쫓아 막 한 장을 넘겼을 무렵, 다시 요조라의 방문이 열린다. 이번에도 마히루인데, 이번엔 양 손에 머그컵을 들고 왔다. 뚜벅뚜벅 방 안으로 들어온 마히루는 치우지 않은 테이블에 머그컵을 내려놓는다. 침대 위 요조라가 내려다보자 컵 안 가득 일렁이는 초콜릿색 음료가 절로 입 안 침고이게 한다. 희미한 계피향에 달콤한 초콜릿향 섞인 그것은 진짜배기 핫초콜릿이다. 누운 채 손 뻗는 요조라를 마히루가 제지하며 씁, 하고 혀를 찬다.
"저거 침대에 엎으면 어쩔라고. 내려와. 앉아서 마셔." "쳇..."
불만 어린 소리 내지만, 요조라는 군말 없이 내려와 침대에 등 대고 앉는다. 그리고 마히루가 건네주는 머그컵을 받아 두 손으로 살포시 감싸 쥐고서, 굳었던 손을 컵의 온기로 풀어본다. 조금 떨어져 비스듬히 앉은 마히루도 컵을 들고, 표면을 식혀 조심히 한 입 머금으면, 달큰한 초콜릿이 혀끝에서부터 목으로 흘러든다. 남매 중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휴- 긴 숨 내뱉고나면, 대화할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다. 그 물음은 의례 마히루의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왜 여태 안 자고 있는데? 너 어제 외출했잖아. 안 피곤해?" "피곤은... 하지... 그렇지만, 잠이... 안 오는 걸... 어쩌라고, 나더러..." "그렇긴 한데. 거 참, 이상하네. 그 전엔 계속 잘 잤잖아? 낮에 뭐 이상한거 먹었냐?" "뭐래... 히루가 말한, 그 가게, 갔는데..." "가긴 갔구만. 뭐 먹었는데?" "나폴리탄... 애플민트, 에이드..." "거기까지 가서 나폴리탄을 먹냐. 토스트 먹으라니까, 치즈 들어간 거." "아... 그게, 먹고 싶었던... 걸, 어쩌라고..." "하여간 고집 더럽게 세. 됐고, 혼자 갔어?" "아니... 유령이랑..." "유령? 왠 유령." "있어... 유령마냥, 이상한 사람..."
두루뭉술한 설명에 마히루는 고개를 갸우뚱 하고 요조라는 조용히 핫초콜릿을 마신다. 제대로 말해줄 기미가 안 보이자, 마히루는 에휴, 빈 한숨을 쉬고 머그컵 내려놓는다. 그러다 아직 펼쳐둔 스케치북이 시야에 들어와, 그리로 몸을 움직여 오늘은 또 무얼 그렸나 들여다보니, 듣지 못한 말 대신할 그림이 거기 있었다.
드넓은 바다와 백사장, 그 한가운데에서 바다를 보는 소년의 뒷모습, 옆얼굴도 없이 뒷모습 뿐이지만, 검은 옷차림에 키는 제법 커 보이고, 뒷머리 가득 하얀 머리칼이 햇빛에 반짝여 은빛으로 물들어있다. 색연필 만으로 절묘히 표현해놓은 풍경과 묘사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마히루는 문득 저 뒷모습이 어디선가 본 듯 함을 느낀다. 저 백발, 분명 가게 손님으로 온 적 있다. 지인이었나, 하고 생각하며 몸을 뒤로 무른 마히루는 지나가듯 묻는다.
"왠일로 사람을 그렸대. 별로라더니." "유령, 이니까... 세이프야..."
그려냐, 며 고개를 끄덕인 마히루는 서서히 식어가는 음료를 들이킨다. 요조라는 여전히 표면을 핥듯 천천히 마신다. 남매는 맞추기라도 한 듯 서로 조용하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대화를 한다.
재차 언급된 지칭은 마히루도 놀라게 한다. 요조라와 대화하면서 특정 누군가가 이렇게 많이 나온 적이 있었던가. 마히루는 순간, 양말 냄새를 맡은 고양이 표정으로 요조라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곧 심호흡을 하며 자신을 진정시킨다. 그리고 천천히 머그컵 내려놓고, 양 손으로 요조라의 어깨를 잡으며 말한다. 진지하게, 아주 진지하게.
"요루... 솔직하게 말해 봐. 너, 그 유령한테 뭐 들켰어? 약점이라도 잡힌거냐? 지금이라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면 괜찮을 거야. 나나 아버지가 어떻게든 해줄게." "으... 왜 그래... 뭐하자는 거야... 내가, 그런 약속, 잡은게... 그렇게 이상해...?" "당연히 이상하지! 맨날 집학교 밖에 모르고 주말엔 방구석에 처박혀 사는 애가 갑자기 마츠리날 약속을 잡았다는데! 천하의 호시즈키 요조라가!" "아, 오바하지 마... 시끄러워..." "이것도 충분히 참은거다. 그러니까, 뭔가 잡힌게 있으면 지금 말 해! 그래야 더 늦지 않아!" "아니라고..."
관객 없는 남매의 꽁트는 요조라가 마히루의 팔뚝을 꼬집는 걸로 끝난다. 아프다며 요조라의 어깨를 놓고 뒤로 물러난 마히루였지만, 여전히 시선은 근심과 걱정과 의심과 궁금함으로 가득하다. 그 시선을 흘겨보기로 응수한 요조라는 머그컵 속 음료를 찰랑거리며 중얼거린다.
"그냥, 먼저, 권유하길래... 대답만 했어... 아무 일도, 없었다고..." "허... 참, 취향 특이하네. 그래서 언제 보려고." "몰라... 할거, 많은데... 꼬였어..." "알면서 대답했을거면서 뭘 투덜대. 됐으니까 첫날 가. 나머지는 남은 날 어떻게든 되겠지." "그럴려나... 어... 귀찮다... 라인..." "라인도 교환했어? 아, 약속 잡았으면 당연한가." "라인은, 저번에..." "이번이 아니야!? 뭐야, 너 대체 요즘 뭘 하고 다니는거야!?" "시끄러..." "어흑!"
요조라치고 매섭고 빠른 찌르기가 마히루의 옆구리를 강타하고, 예상치 못한 공격에 마히루는 그대로 쓰러진다. 아픔보다 놀람과 충격에 부들거리는 마히루를 두고 요조라는 다시 침대 위로 기어올라간다. 언제 마셨는지, 바닥까지 깨끗하게 빈 머그컵이 요조라 앉았던 자리에 덩그러니 놓여졌다. 적당히 리액션을 보인 마히루는 몸을 일으켜 침대와 한몸이 되려는 요조라를 본다.
"으휴...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맹이를 저대로 둬도 되나 싶구만." "헛소리는, 1절만 해... 히루... 다음은 뒷목이야..." "알았다 알았어. 아무튼, 잠은 영 안 올거 같냐?" "그러게... 책이나, 마저 보려고..." "오늘이야 그러면 되겠는데, 곧 수학여행 가잖냐. 그 땐 괜찮겠어?" "뭐... 죽진, 않겠지..." "그건 당연한거고. 너는 나 때랑 달라도 너무 달라서 뭐라고 조언도 못 하겠네. 에이, 다시 자러 갈란다." "어... 잘 자..."
엎드려서 성의 없이 손을 흔드는 요조라의 행동에 마히루는 어이없는 웃음 내뱉는다. 다 마신 머그컵 들고 방을 나가려다가, 문가에 발 걸쳐놓고 돌아보며 묻는다.
"마츠리 때 입을 옷, 초안대로 가면 되지? 사요가 묻더라고." "응... 초안, 두 개... 다 하면, 될 걸..." "사요만 신나겠네. 알았어. 쉬어." "응..."
그 대화를 끝으로 문 여닫히는 소리도 없이 마히루가 나갔다. 이제 핫초콜릿은 잔향만 남은 채 요조라의 코끝을 간지럽힌다. 잠시 엎드려서 늘어진 채 눈만 깜빡깜빡, 하던 요조라. 이내 꾸물거리며 움직여서 덮어두었던 책을 집어온다. 사그락, 페이지 넘어가는 소리 나고, 요조라의 눈은 다시 활자를 쫓아 흰 종이 위를 구른다. 창밖의 어둠이 서서히 희어져 이윽고 햇살로 가득 밝아질 때까지.
언제나 느끼기로 시대는 빠르게 흘러간다. 변변한 방직도 하지 못하던 인간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손가락 한 번 까딱이는 것만으로도 수만의 인간을 죽일 수 있게 되고, 하늘과 천체를 우러르기만 하던 그들이 어느새 달에 발 디디며 더 나아간 우주에 진출하려는 시도가 있은지도 100여년 정도가 지났다. 근 100년의 시대 동산 있었던 발전은 이전의 수천 년 세월과 비하면 그 속도를 비약이라 이르기에도 모자랄 테다. 겨우 40여년 정도 인세에 직접 내려오지 않은 사이에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뒤바뀌고 세워지고 새로운 형태의 가치를 덧입어 창조되고 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대에 적응하기도 바쁜 풍어신은 보아야 할 거리가 많았다. 하루라도 빨리 요즘 아이들 문화를 알아둬야 인간을 알든 뭘 하든 하지 않겠는가. 수학여행을 온 토미나가 후미카는 본의 아니게 한창 여기저기를 다니며 누구보다도 진심으로 관광을 즐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섬 하나를 통째로 관광시설로 삼은 규모도 신기하지만 그중에서도 이 플라네타리움이라는 것은 신선한 감상을 안겨준다. 인간의 종이 융성한 만큼 지구는 병든 시대,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어진 별하늘을 인공적으로나마 재현한 곳이다. 하지만 신선하다고 느낀 것은 처음에 한정했다. 웅장한 장관을 보여준다 해도 결국은 인공이고, 조용한 공간에서의 힐링 컨셉이라는 것은 알겠으나 밤하늘을 보는데도 시원한 밤공기나 밤바다의 소금 내―이건 순전히 본인이 바다에서 지내길 좋아하는 탓이다.―가 나지 않으니 영 감상이 살지 않는 것이다. 결국 후미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이라 해도 워낙에 느긋한 성정의 소유자라 1시간은 족히 앉아 있었지만 말이다. 여기는 충분히 볼만큼 봤으니 다른 곳으로 가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제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몇 걸음을 걷던 그의 발 아래에 불현듯 무언가가 꽉 밟혔다. 반사적으로 발 아래를 본 그의 시야에는 누군가의 발이 자리잡고 있었다. 신이라 할지라도 밤눈이 밝은 특성은 타고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그' 풍어신이 무의식적으로 힘 주어 밟아버렸으니 꽤 아플지도 모른다. 후미카는 즉시 발을 떼고는 고개를 들어 자신이 밟아버린 발의 주인을 찾았다. 그러고는 잠깐 말없이 그 얼굴을 쳐다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 나이가 되어서 플라네타리움을 신기하게 바라보지는 않았다. 현대 일본에서 이 플라네타리움만큼 빛나는 별을 볼 수 있는 장소는 한정되어있으며 적어도 그가 살아 온 기간동안에 그에게 있어 별은 우러러볼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여러분이 보고있는 별은 엄청난 과거의 별의 모습입니다 같은 말도 로맨틱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조금은 신기한 과학적 사실이다.
"흐아아아암."
하지만 이곳의 분위기 자체는 좋았다. 콘도에서 평소에는 즐기지 못하는 여유로움을 즐기고 있었건만, 묘하게 '이예이ㅡ' 하고 외치는 괴상한 녀석들이 여럿 모여서 오더니 시끄러운 분위기가 되어서 대피를 한 곳이 이곳이었다. 별을 열심히 바라보는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그저 하품만 하는 존재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별은 컴퓨터를 켜도 볼 수 있을거라고.."
다른 사람이 다른 장소에서 잘 찍은걸로 말이야. 적어도 그 사진은 실제 별을 찍은것이니 가짜 별을 보여주는 플라네타리움과는 차별성도 있었다. 가짜라곤 해도 별빛이 반짝이는 로맨틱한 장소에서 그것을 부정했기 때문인걸까. 그는 그야말로 신벌을 받았다. 그리고 그 신벌의 결과는 다리의 엄청난 통증이었다.
"끄아아악!"
뭔데, 라는 말을 할 여유조차 없이 비명을 지르고는 그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분위기를 깨고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한마리의 토끼가 완성되었다.
"괜찮지 않아, 뭐야. 싸움거는건가! 내가 뭘 했다고! 나는 별조차 느긋하게 바라볼 수 없는 인생의 업을 달고 태어난거야?"
"그래. 이 정도면 된 것 같구나. 그런데 아키라. 너무 무리한 거 아니니? 수학여행 전에는 그래도 끝내고 싶다고 해서 조금 빡세게 한 것 같은데 고3이기도 하고 공부도 했고."
"세이 씨가 걱정을 할 정도였으니 무리한 것은 맞긴 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저도 제대로 제 역할을 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어머니. 저도 시미즈 가의 피를 이어받은 이로서, 호타루마츠리는 언젠간 제가 이어야 하니까요."
시미즈 가의 현 당주인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며 아키라는 조금 피곤한 표정을 짓긴 했으나 굳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미즈미 마을의 4대 마츠리 중 하나인 호타루마츠리는 그 특성상, 샘이 고여있는 동굴과 그 옆의 낡은 신사를 관리하고 지키고 있는 시미즈 가문이 직접 개최하는 행사 중 하나였다. 당연히 다음 당주가 될 예정인 아키라 역시 그에 대해서 확실히 배우고 어떤 절차로 진행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아키라처럼 시미즈 가문에 태어난 그의 어머니이자 현 당주에게 그는 요 며칠간 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막 끝을 낸 상태였다. 적어도 수학여행 이전에는 끝을 낼 수 있었기에 아키라는 어느 정도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 마츠리에는 저도 시미즈 가문의 사람으로서 돕도록 할게요."
"그래. 하지만 아키라. 네가 모든 것을 다 할 필요는 없단다. 그래. 적어도 첫날 정도는 그런 것 신경쓰지 말고 재밌게 놀도록 하렴."
"네? 그래도..."
"장차 네가 당주로서 오르게 되고 정식으로 모든 것을 진행하게 되면 그땐 놀고 싶어도 놀기 힘들어진단다. 놀 수 있을 때 노는 것. 그것은 어린아이의 특권이자 권리이지. 일은 그 이후에 도와도 괜찮잖니. 후후. 이럴 때 친구랑 놀아도 좋지 않겠니? 그래. 유메라던가 같이 다니면서 반딧불도 보고, 댄스도 추고, 등불을 보면서 기도도 드리고. 좋지 않겠니."
"사이온지는 그 날 일정이 있다고 해서..."
"어라. 그러면 마츠리날에 같이 다닐 이가 없는 거니?"
"그래서 돕겠다고 한..."
"잠깐 정좌하도록 하렴."
"네?"
"정좌하도록 하렴."
어머니의 엄한 목소리에 아키라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 혼날 때마다 항상 하게 되는 자세였다. 아키라의 어머니는 지금까지 아키라를 대하면서 단 한 번도 매를 든 적이 없었다. 오로지 말로만 훈육을 했으며 아키라는 자신도 모르게 절로 그 말에 따르는 일이 많았다. 방금 전과는 다르게 상당히 엄격해진 목소리로 변하며 그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녹아내렸고 아키라는 절로 긴장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봤다.
"야, 약속 상대가 없다고 이렇게 하실 것까진..."
"내가 고작 약속 상대가 없다는 이유로 이렇게 하는 거라고 생각하니? 아키라. 네가 약속 상대가 없는 것은 같이 돌 이가 없어서가 아니라 당연히 호타루마츠리 땐 일을 다 도와야한다는 생각만으로 정할 생각조차 안 한 거잖니. 내 말이 틀리니?"
"아, 아니 그게..."
"시미즈 가문의 사람으로서 시미즈 가문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좋아. 허나 우리 시미즈 가문은 가미즈미 마을의 유지 중 하나로서, 다른 이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하는 법. 무조건적으로 집안의 일만 잘한다고 해서 당주가 될 순 없는 법이란다. 긴 말은 하지 않으마. 마츠리 첫 날에는 일은 신경쓰지 말고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이와 시간을 보내도록 해라. 친구건, 모르는 사람이건 아무나 상관없어. 앞으로도 몇 년간은 마츠리 첫 날은 일을 도울 생각을 하지 말고. 아니. 그래. 네가 정식으로 결혼을 해서 당주로 오르는 날 이전까진 첫 날에 도울 생각은 하지 말고 다른 이들과 어울리도록 하렴."
"네? 아, 아니. 하지만...어머니. 저는 딱히 주변 사람들과 벽을 쌓은 적은..."
"누구랑 어울리더라도 이 어미는 크게 간섭하지 않으마. 이 어미는 반려가 될 이가 기본적인 예절도 모르는 양아치만 아니면 크게 신경쓰지 않을 생각이란다. 애초에 네 아버지도 학창 시절 땐 그렇게까지 모범생은 아니었고 이 어미도 그렇게까지 딱딱한 느낌으로만 산 건 아니니까."
"혹시나 해서 묻는건데 어머니. 아까 좋은 관계니 뭐니보다는 지금 것에 더 초점을 두시는게..."
"아니란다. 이 어미는 어디까지나 너의 인간관계가 조금 걱정이 되서 말하는거란다."
정말로 단호하게 아키라의 말을 끊으면서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아키라는 입을 꾹 다물고 조용히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봐도 저쪽이 목적 같은데 기분 탓인가. 하지만 어머니가 그렇다고 하니까. 괜히 그렇게 생각을 하며 다시 한 번 납득을 하며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 기분 탓이겠지. 기분 탓일거야.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는 와중 아키라의 어머니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산풍화가 그려진 부채를 펼친 후에 자신의 얼굴에 살살 부쳤다.
"아무튼 방금 것은 좀 오버했다고 쳐도 올해는 첫날에 아무것도 신경쓰지 말고 놀렴. 그래. 그 이후에도 크게 바쁘지 않을 것 같으면 쉬어도 괜찮단다. 앞으로 네가 해야 할 일이 점점 많아지는만큼, 처음부터 무리할 건 없어. 아까도 말했다시피 놀 수 있을 때 노는 것은 어린아이의 특권이자 권리니까."
"아, 알겠어요. 그럼 일단 그렇게 할게요."
딱히 약속상대는 없었고, 이제 와서 누구에게 연락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적당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보면 아는 사람 하나 정도는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약속 상대가 없으면 그냥 자신과 같이 둘러보자고 말을 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지금 와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 날이 되어봐야 알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정 애매하면 그냥 혼자서 천천히 둘러봐도 될 일이었다.
'그래도 누군가와 만약 돌게 된다면... 샘 가이드 정도는 확실히 해볼까. 시미즈 가문의 사람이 직접 소개하면서 같이 보면 또 다른 느낌일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