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은 다 했다는 말을 하자 다가와 또 덥석 제 손을 잡는 것에 눈을 깜빡였지만, 방금보다는 덜 당황했다. 어, 원래 그런 성격인가보다(?) 하는 것이었다. 물론 요조라에 대해 대화를 해본 적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그 어떤 선입견을 가질 새도 없었다. 그저 말투가 느릿느릿하고 스킨십에 스스럼 없는 편인가? 하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아니면 지금이 특수한 상황으로 상정할 수 있는 건가? 렌 자신도 생각해보면 수영을 가르치거나 사람을 구조할 때 동의 없이 잡거나 끌거나 하니까, 여차하면 인공호흡도 한다.
어쨌든 요조라에게 잡힌 손으로 이것저것이 그려지고 그대로 하라는 말에 명령어가 입력된 강아지처럼 순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물감이랑, 붓이랑…. 팔레트. 여기.”
렌이 잠시 연필을 내려놓고 주섬주섬 채색을 위한 도구들을 근처에서 찾아 주었다. 아마 물감들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일반 학생들이 살만한 물감이고 어느정도는 팔레트에 짜져서 굳어있을 것이었다. 조금 순서가 난잡할 뿐이지 도구들은 깨끗하게 새척되어 있어 아마 깔끔한 편이구나 생각이 들 정도는 되었다. 이미 물통에 깨끗한 물은 받아놨고 붓의 물을 닦을 걸레도 한 편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문제는 없었고.
그리고는 서두르는 게 좋겠다는 그 말에 렌은 다시 연필을 잡고 집중해서 스케치를 해내었다. 뭔가 자신이 그렸던 그림보다 훨씬 나아진 모습에ㅡ그야 원근법을 무시하고 그렸었으니까ㅡ 어떤 점이 달라진 지는 확실히 캐치하지는 못하였지만 얼굴이 조금 환해졌다. 나름 생각해서 끙끙거리면서 하는 것보다 이렇게 가이드를 잡아주니 훨씬 빨리 진척이 되고 있어서 나름 놀라는 중이었다.
“다 했어. 다음은 뭘 하면 돼?”
아마 꼬리가 있다면 흔들흔들하고 있지 않았을까. 상명하복에 익숙한 게 딱 운동부일지도, 아니면 뭔가 창의력을 발휘하는 것에 조금 어려움을 느끼는 편일지도 모른다.
당연하게도 지금 요조라의 행동은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애초에 이런 상황 자체가 논외였으며 매우 드문 상황이란 걸, 상대가 알 리가 없다. 그래서 오해가 생긴다 한들 요조라는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사람은 제멋대로 생각하고 제멋대로 판단한다. 그걸 일일히 바로잡는게 얼마나 번거로운지 요조라는 알기 때문에, 말없이 최선의 방법으로 가이드 해줄 뿐이다.
요조라는 채색 도구들을 받아들고 먼저 팔레트의 안을 살핀다. 물감은 충분한지, 무슨 색이 있는지, 대강 훑어보고 붓의 상태와 물감의 여분도 확인한다. 딱 고등학생이 쓸 만한 무난한 도구들이고, 관리도 잘 했는지 깨끗하다. 쓸 맛이 나는 도구들이라고 생각하던 요조라는 다 했다는 말에 붓과 팔레트를 들고 돌아본다.
"뭐긴, 칠해야지..."
지극히 담담하고 당연한 대답을 시작으로, 스케치와 비슷하지만 좀 더 가이드가 많은 채색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채색을 하는 동안, 요조라는 고리타분한 설명 같은 건 없이 짧게 알려주기만 했다. 이건 밑색, 여기는 빛이 이렇게 내리니까 밝게, 여긴 그 아래 그늘이니까 어둡게, 등등의 그런가보다 할 만한 한마디 말과 함께 무슨 색을 어떻게 칠해야 하는지 말한다. 이번에도 역시나 필요하다면 손을 잡아 붓질하는 요령을 가르쳐 주었을 거다. 넓은 편을 한번에 슥 칠하는 법, 붓끝을 세우고 테두리를 긋는 법, 원래 재주가 없는 사람이라도 쉽게 따라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하게, 말이다.
"됐어, 이제..."
한참의 채색 시간을 거친 끝에 명암을 약간 손보는 것으로 그림은 마무리 된다. 시간은 아슬아슬하게 맞춘 정도다. 마르는 걸 잠시 기다렸다가 제출하면 딱 맞을 듯 하다. 요조라 역시 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곤, 그렇게 말한다.
"그거... 말라야, 하니까... 뒷정리, 먼저, 해..."
또 물통을 엎었다간 다시 기회는 없을테니까, 조심하라며 덧붙이곤 돌아서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그래봐야 옆자리였지만.
초여름의 첫비가 내린다. 하늘이 우중충하게 흐려도 시커먼 구름이 끼지는 않았다. 물 머금은 공기를 들이쉬는 감각이 마치 부슬비 맞는 느낌과 비슷하여, 얼굴 스치는 바람에 제 우산을 제대로 쓴 것인지 멈추어 확인하게끔 하는 날씨다. 며칠간은 비가 내릴 예정이란다. 이 시기가 지나면 습도가 본격적으로 높아져 한동안은 꼼짝없이 찌는 듯한 열과 습도를 맞아가며 지내게 될 것이다. 본격적인 여름이 오기 전, 온화한 계절의 마지막을 느껴두려면 때가 오래 남지 않았다.길을 걷던 중 공연히 어느 한곳에 눈길이 가, 평소에는 가지 않던 골목에 들어선 데엔 그런 이유가 있었다.
후미카는 어느 주택의 담장 앞에 멈추어 섰다. 마당을 넘어서 주렁주렁 내린 덩굴이 담장까지 내려와 벽 한 면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 끄트머리에 핀 꽃은 언뜻 붉은 듯하다가도 노란 빛이 선명한 주홍색이다. 물에 젖어 어둑한 채도의 세상에서 생생하게 밝은 색에 눈길이 간다. 짧은 폭 안으로나마 능소화 핀 다발이 고왔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후미카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빗물이 튀어 신발 끝이 조금씩 젖어들 만큼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을 것이다.
그가 잠시 잊은 것이 있다면 이 길목의 너비가 좁은 편이라는 사실이다. 옆으로 돌아선 채로 어깨에 걸친 우산이 툭 튀어나와서 골목의 절반 정도를 막고 있었다. 처음에야 자신 말고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으니 괜찮았겠지만 언제까지고 그러리란 법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