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려고 했으나 그 뒤에 들리는 짧은 소리는 아키라의 발을 멈추게 하기 충분했다. 뒤를 돌아보니 렌이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모습이 보였고 그는 깜짝 놀라 다시 렌에게 돌아왔다. 무슨 상황인진 알 수 없었으나 확실한 건 그가 얼굴을 처박고 넘어졌다는 사실 아니겠는가. 물론 제대로 넘어진 것은 아닌 것 같지만 그럼에도 아키라에게 있어선 조마조마한 사태였다.
"괜찮으세요?! 세이 씨?!"
물론 렌의 존재는 아키라에게 있어선 다른 이들보단 아무래도 조금 더 친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굳이 '세이 씨'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물론 자신도 렌이라고 부르면 편할지도 모르지만. 허나 그런 사정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고 그는 바로 그의 앞에서 오른쪽 무릎을 꿇고 렌을 부축하려고 했다. 허나 이내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다리를 잡고 끙끙대는 모습이었다. 왜 다리를 붙잡고 있고 왜 저렇게 끙끙대고 있는 것인가. 그에 대한 답은 적어도 아키라에겐 하나밖에 없었다.
"설마라고 생각하지만 다리가 부서졌나요?! 아니. 그런데 넘어졌다고 다리가 부러질린 없는데. 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정말로 당황했는지 그는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였고 패닉상황에 살짝 빠졌다. 이어 그는 핸드폰을 꺼낸 후에 침착하게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서 렌에게 물었다.
"세이 씨! 119 전화번호가 몇 번이죠?! 아니. 아닌가. 이럴 땐 119가 아니라 다른데인가?! 병원. 병원의 전화번호를 대면 구급차가 오나?!"
나름 협박이란 걸 해봤는데, 꽝이 나온 걸 보니, 이 이벤트는 아무래도 원망제조기가 될 가능성이 농후해보인다. 운이 나쁜게 요조라만이 아닌 걸 돌아다니면서 많이 봤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대놓고 학생회장에 대한 원망을 중얼거리는 학생도 있어서 솔직히 섬찟했다. 그거에 비하면, 약속 없었던 걸로 하는 건... 약과겠지? 그치? 요조라는 또다시 자기합리화를 하며 코드를 찾는다.
괜찮지 않아서 렌은 끙끙거리며 대답했다. 발이 저린 것도 저린 것이었지만, 너무 부끄러워서 마음이 괜찮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아키라가 제 앞에 오른쪽 무릎을 꿇고 부축하려는 모습에 조금 마음이 미안해져서 아키라에게 괜찮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그것보다 빠른 것은 아키라가 허둥지둥하면서 다리가 부러졌는지, 119를 불러야하는지 묻는 모습에….
“그게 아니라, 다리에 쥐가 나서…. 이럴 때는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면서, 말끝에 냥을 붙이면, 윽, 괜찮아져요냥.”
괜히 장난을 쳐보는 것이었다. 물론 아키라는 그 말에 기운이 빠지면서 장난치지 말라는 듯 우사미눈을 해보일지 모르겠지만. 혹시 아는가 이렇게 당황한 상태면 장난에 걸려들지도. 쨌든 별 것 아니고 괜찮다는 뜻이었다. 또, 그런 장난을 한다는 것이 렌이 아키라를 편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기도 했고.
쨌든 렌은 허둥대는 아키라를 두고 다리를 펴고 발 끝을 잡아당기는 방법으로 발의 쥐난 것을 풀려고 했다. 얼었던 땅이 녹고 촉촉해진 봄흙과 풀잎이 얼굴이나 머리카락에 묻어 있었지만 일단 우선 쥐가 난 것을 풀어야 하는 것이 먼저였다.
오- 나는 네가 꽃잎을 잡는 것이 신기하여 이리저리 허공을 향해 손을 뻗어댔다. 그러나 잡히는 것은 휑한 공허뿐이니 나는 기분이 나빠진다. 나는 꽃의 신도 아니고 바람의 신도 아니니 꽃잎 하나 못 붙다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테지만 모양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평소라면 쿨하게 넘어갔을 너의 말에 괜히 오지랖을 부려본다. 능력 없을 신으로 격하된 이미지를 세워주기 위함이라고 해야할까.
"꽃방울이 아니라 꽃잎이에요. 코로리씨는 아직 인간 세상에 익숙치 않나보군요?"
나는 인세에 온지 고작 6개월도 안 됐을뿐이지만 공부만큼은 열심히 했다. 인간의 유행 단어-하이루 방가방가, 오나전 캐안습 등등-도 곧잘 쓰고 대화에 어색함이 없을 정도였다. 나는 의기양양해져서 어깨를 쭉 폈다.
"그런 말이 아니라- 이름에 담긴 뜻이 투명하다고요."
너도 나만큼이나, 아니, 나보다도 인세에 무지한게 틀림없다. 투명하다라는 말 뜻도 모르고. 정말이지 어쩔 수 없다. 인간에 좀 더 익숙한 내가 잘 알려줄 수 밖에. 이런 적은 처음이라 나는 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아까는 나빴다가 지금은 또 좋아지는 걸 봐서는 요즘 내 감정이 풍부해진 게 맞나보다. 아무튼 나는 검지를 들어올리고 너에게 나의 추측을 읊어준다.
"이름에 달도 들어가있고 자장가도 들어있잖아요? 그러면 코로리씨는 분명 밤의 신 맞죠?"
내가 영어는 좀 못해서 그렇지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 그리 말하며 너에게 빙그레 웃어주는 것도 잠시 갑자기 덥썩 내 손을 붙잡고 애칭을 불러주지 무엇인가? 나는 순간 이 사람이 나를 인간으로 착각한 것인지, 아니면 나에게 첫눈에 반해서 이러는 것인지 -아주 헛소리다- 알 수 없어서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저, 코로리씨 저는 신인데요. 꼬셔도 얻을 게 없어요."
나는 너에게 소곤거렸다. 만약 이게 평소대로 한 것이라면......... 나는 엄청난 경쟁자를 얻었다 자부할 수 있다. 너는 객관적으로 귀엽게 생긴데다가 덥썩덥썩 손도 잘 잡고 애칭도 바로 짓는 걸로 보아 무시무시한 상대가 아닐 수 없다. 내 인간 상대를 모조리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손도 떨리고 눈도 떨리고 늑골도 떨릴 지경(아님)이다.
다리를 쥐어잡고 있는 것이 단순히 쥐 때문이라고 한다면 정말로 그나마 다행인 셈이었다. 물론 쥐가 나도 아픈 것은 마찬가지지만 부러진 것에 비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 와중에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면서 말 끝에 냥을 붙이면 괜찮아진다는 그 말에 아키라는 순간 움찔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않나?
....라고 평상시의 아키라는 생각했을지도 모르나 패닉상태에 살짝 빠진 아키라에게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어쩌지. 어쩌지. 하다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외쳐버리고 만 것이다.
"야옹~ 고양이가 있으니 쥐는 멀리멀리 달아나라냥."
자신도 모르게 페이즈에 말려들어 그렇게 말한 직후에야 아키라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뭘 하는지를 인지했다. 순간적인 패닉은 사람의 판단력을 잃게 만든다고는 하나, 이번 것은 확실히 거대했고 아키라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침착하게 숨을 정리하던 아키라는 근처에 있는 풀숲에 머리를 묻어버리면서 중얼거렸다.
"...고양이 잠잔다냥. 건드리지 마라냥. 야옹."
힘없는 목소리를 내며 붉어진 얼굴을 진정시키기 바쁜 그였기에 아직 얼굴을 빼들 수 없었다.
"거짓말. 스즈쨩 분명 쓸쓸하단 얼굴 하구 있었어. 앗, 나도 친구 갖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구. 시이는 다 알지롱."
시이가 가장 잘 아는 표정이기도 했으니까. 아소비코쇼를 하나 보내고 나면, 거울에 비친 시이는 곧잘 그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시이는 친구를 갖고 싶었고, 그래서 스즈의 얼굴도 그렇게 설명해버렸다. 조금 달랐지만, 의미는 비슷하다. 기존의 친구에게서 얻는 쓸쓸함을 견디기 어렵다. 마음이 통하고, 날 의심하지 않게 하는 친구를 가지고 싶다. 그런 의미. 물론 차이는 있었다. 스즈가 그런 친구를 기대하고 실망한다면, 시이는 그런 친구를 만들었다. 되지 않는다면 놀잇감으로 쓰고는 끝이다.
"나는 좋은 사람이 아냐. 나, 편식도 많이 하고 약도 먹기 싫어하는걸. 병원도 싫어-"
사실들 속에 교묘한 거짓이 섞여든다.
"하지만 나, 약속은 잘 지키려고 노력해. 그러니까- 응, 스즈쨩을 잊지 않을 거야. 약속이니깐."
스즈가 시이를 껴안고, 시이는 반겼다는 듯이 폭 안겼다. 인간은 불혹을 겨우내 넘겨 사는 주제에 따듯했다. 불변하는 신들과 달리, 맥동할 때마다 따스한 피가 꿀럭거리는 인간들은 연약하면서도 살아움직였다. 경이롭지만, 하찮다. 하지만 그 미물이 베푸는 온기에 금세 녹아버리는 것이 나라서. 나는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이 녀석도 내가 부르는 소리를 못 듣게 된다면, 그런 바보 같은 내가 정말 미워지겠지 싶었다.
시이는 그래서 배반당하면 곱절로 베풀어주리라고 다짐했다.
"믿어도 돼." - 이쯤에서 막레려나 고생했어 스즈주 내가 갑자기 바빠져서 정말 폐를 끼쳤네 그래도 돌려서 즐거웠어
최근 들어 요조라는 컨디션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어디가 아프거나 그런게 아니라, 이상하게 좋다. 생활패턴이 바뀐 것도 아니고, 특별한 약을 먹은 것도 아닌데, 묘하게 자고 일어나면 몸이 가볍다. 자고 일어난 후도 그렇다. 원래는 일어나서 정신을 차리는 것도 시간이 걸렸는데, 어느날부터인가 눈을 뜨면 그대로 정신이 말끔해진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요조라는 생각하며 양호실 침대에서 일어났다.
시간을 보아하니 종례는 진작 끝났겠고 부활동도 슬슬 마무리 될 시간이다. 자고 일어나서 개운하긴 하지만 아직 자는 시간 자체가 줄어들진 않았나보다. 오늘도 신세를 진 양호 선생님께 인사를 한 요조라는 폰과 작은 주머니를 챙겨 들고 양호실을 나온다. 천으로 된 주머니는 흔들릴 때마다 작게 잘그랑거리는 소리가 난다. 얼마 전 받은 드림캐쳐의 장식 소리다.
느릿느릿 걸어, 교실로 가는 길에 몇번 코드를 찾아 기쁨과 좌절을 반복한다. 이 점수로는 목표치에 도달하려면 한참 멀었네, 아무래도 포기해야겠어, 같은 생각을 하며 요조라는 빈 교실에서 가방을 들고 나온다. 주머니는 가방에, 폰은 교복 주머니에 넣고, 빈 교실을 나와 빈 복도를 걷는다. 여전히 느릿하지만 비틀거림 없이 반듯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온 요조라는 역시나 텅 빈 신발장에서 신발을 갈아신는다. 그 때, 짧은 진동이 요조라의 폰을 울렸고, 신발을 다 갈아신은 요조라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폰을 꺼내 연락 온 걸 보고 있었다.
에, 이게 아니었어. 시이는 시이가 귀엽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협박까지 생각한 건데? 어깨가 결리는 정도의 재액을 손에 담고 있었으나 맥이 빠져서 풀려버렸다. 테츠야의 어깨가 다소 뻐근한 감이 생겼을지도. 하여튼 시이는, 좀, 좋게 말해서 아둔하고... 나쁘게 말해서 바보이기때문에. 테츠야가 갑자기 본인을 귀엽다고 하자 눈을 말똥거리고 뜨곤 잠시 말이 없었다.
에, 하지만. 이거 괜찮지 않아? 자그마한(167cm) 소년이 자신을 귀엽다고 반복하는 걸 봐. 이거 좀... 되지 않아?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괜찮아!
"조, 좋~아 좋아. 그대로 스스로에게 되뇌는 거야. 나는 귀엽다. 나는 귀엽다라고..."
약간 뉴에이지 오컬트를 영업하는 사기꾼처럼 말하는 시이.
"나는 귀엽다. 나는 귀엽다. 나는 예쁘다... 나는 반바지와 세트인 세일러복이 잘 어울리는 쇼타다."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나는 시니컬하게 주변을 냉소하는 듯 하지만 주변과 친구관계를 맺고 싶어서 TRPG라는 수단을 사용하는 츤데레 쇼타다."
오늘의 학생회 활동을 가볍게 마치고 아키라는 집에 돌아가기 전에 가볍게 본교 건물을 둘러보고 있었다. 특별한 문제는 없었으나 QR코드로 인해 절망하는 학생들이 너무 많이 보인다고 느끼며 아키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가끔 돌려보는 것은 다 꽝이긴 했으나 그렇게까지 꽝이 많이 나온단 말인가. 일단 별 생각없이 계단에 꽂혀있는 QR코드를 하나 집어들고서 아키라는 천천히 밑으로 내려갔다. 슬슬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물론 바로 집으로 가진 않고 전병이나 하나 사서 돌아갈까 싶어 간만에 호시즈키당으로 가야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꼭 전병이 아니더라도 다른 맛있는 화과자가 있으면 사도 좋을테니까.
신발장에 도착하자 낯익은 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호시즈키 요조라. 사쿠라마츠리 때 만난 이후로 처음이었던가. 그래도 아는 사람인데 학생회장으로서 가볍게 인사는 하는 것이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아키라는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겼고 요조라의 근처에 선 후에 말을 걸었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호시즈키 씨. 오늘도 하루 수고하셨어요."
뒤이어 그는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내 QR코드를 찍으려고 하면서 자신의 신발장에서 신발을 꺼낸 후에 갈아신으려고 했다. 김에 그녀에게도 호시즈키 당이 오늘 영업하는지의 여부를 물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호시즈키 당이 영업을 하나요? 영업을 한다면 집에 가기 전에 잠깐 들려서 간식거리나 살까 해서요."
어째 어깨가 뻐근하다. 왜 이렇게 어깨를 세게 잡는거야. 갑자기 화라도 난건가? 행동거지가 제정신이 아닌게, 화나게 하면 안될 것 같은데. 그런데 어쩌다가 '나는 귀엽다' 같은 소리를 하게 되었더라.
아, 귀엽다고 하지 않았으니 또 삐진거구나. 일단은 장단을 맞춰주는게 좋을 듯 싶다. 솔직히 활동내역도 간당간당한 요즘 상황에 trpg부실에 이상한 소리가 난다는 소리까지 들린다면 학생회쪽에서 가만있지 않을 것 같았다. 그쪽 입장에서는 부비를 낭비하는 이상한 부는 폐지하고싶어할게 뻔하고.
"나는 귀엽다."
그런데 저 녀석이 원하는 말을 하려면 '나는 귀엽다' 가 아니라 '너는 귀엽다' 라거나 '시이는 귀엽다' 가 맞지 않나? 하하, 저녀석도 참 바보다. 이래서야 그냥 단순히 자신을 칭찬하는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