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르릉고르릉)(부빗부빗부빗) 수업이 많은 만큼 성적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 수업에서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잠에 들지 않는 일이에요. 피로가 쌓이는 것은 이해합니다만, 다수의 학생이 전공에서 잠들지는 않습니다. 내 수업은 잠을 자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어려운 수업도 아닙니다.
잠에 들지만 않는다면 A를 충분히 받을 수 있다는 말이에요.
허억...!!! 수.. 순간 교수님의 영혼에 빙의됐어.. ;0;.. 우아아 잘 거면 같이 자야지이 >;3~
차 안은 조용하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이따금씩 귀를 후드득 간지럽힌다. 차 유리에 맺힌 빗방울은 세상을 하나하나 자그맣게 담고, 이따금씩 흘러내리며 부서진다. 개중엔 뒤집힌 세상도 있다. 그런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그저 목적지가 저기라는 이정표만을 따라가게 되는 것 같다. 스쳐가는 길은 익숙할 텐데도 한없이 낯설고, 이 길이 맞는지 의문이 들지만 이곳이 맞겠거니 하는 생각이 든다. 전부 씻겨내려간 세상에서 그것은 처음으로 불평이 아닌 단어를 뱉었다. 그곳은 여전히 햇빛이 넘실거리는가. 나의 유일하던 마지막 안식처는 여전히 누군가를 품어줄 정도로 따스한가.
그마저도 이내 포기한다. 햇빛이 넘실거려도, 비가 내려도. 혹은 그 둘이 전부인 여우비가 내린다 해도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과거로 돌아가서 모든 것을 아무것도 없던 일로 돌릴 수도 없다. 애초에 그렇게 되는 상황이 정상적이었던 것일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그 상황에서 행했던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면, 미카엘이라는 존재는 어딘가에서 여전히 휘둘리고 자기 자신도 잃어버렸을 테다. 너무 많은 걸 겪고 알아버렸는데, 그보다 더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단언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이 도시니까. 그 당시의 자신을 막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안다. 세상은 야속해서, 막으려 해도 손끝의 모래처럼 바스스 흩어지게 놔둘 것이다. 잘 안다. 몇 번이고 그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되뇌며 합리화했다. 오늘도 그렇게 합리화를 했다. 다만 아쉽고도 쓰라릴 뿐이다.
"질문은 들어가서 들어도 될까."
아마 그것은 알고 있었나 보다. 침묵이 이어진다. 그것은 어딘가 침울한 기색으로 창문 밖 애꿎은 물방울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음악방송 채널에 맞춰진 주파수는 음악을 내보낸다. 비 오는 날 듣기 퍽 좋은 노래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이 당신을 향해 고개를 돌린 것은 그로부터 머지않은 순간이다. 당신이 나지막이 흥얼거리는 이 순간을 언젠가 겪어본 적이 있는 것만 같다. 다만 이것은 헤로인의 기억이 아니다. 희미하게나마 기억나는 잔인한 영화. 헤로인은 거기서 자신이 조금 무너졌다고 생각했다.
"…잘 부르네."
건물은 중심가의 위용에 걸맞은 모습을 갖췄다. 고개를 정면으로 하며 본 것은 말 조각 장식이다. 그것은 무릎 위에 놓인 스냅백을 꾹꾹 누르듯 펴서 접힌 선의 흔적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흐트러 놓더니 머리 위에 뒤집어쓴다. 백금발의 오묘한 머릿결이 새카만 스냅백에 온통 가려진다. 걸치고 있는 커다란 점퍼는 체구를 확실하게 가려준다. 그것이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그리고 검은 마스크를 찾아내고야 만다. 대체 누구의 것이냐 묻는다면 윈터가 사놓고 까먹어 방치한 것이라 할 수 있고, 신원을 가리는 것엔 가히 구원에 가까운 수준이겠다.
"저기, 있잖아. 같이 내려줘."
뒷말이 없어도 들리는 것 같다. 혼자는 싫다는 말은 죽어도 하기 싫은가 보다. 물어본다면 고개를 팩 돌리고 네가 생각하는 건 절대 아니라고 바락바락 대들겠지만.
무너진 것을 되돌릴 수는 없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고, 속이고, 얼굴에 가면을 쓰는 능력자들은 많았지만 그들 중에서 인과를 취소하는 이는 있었을지언정 인과를 뒤집는- 적어도 당신의 것을 되찾는 데에 필요한 시점까지 인과를 뒤집는 이는 아직껏 없었다. 리와인더라 불리는 역행 능력자도 누군가의 숨이 완전히 끊어진 직후에 시간을 되돌리면, 거기에 남는 것은 이미 영혼이 떠나가버린 몸덩어리뿐만이 아니던가. ─돌아갈 수는 없다.
돌아갈 수 없다 해도 앞길로 떠나는 것이 쉬운 것도 아니다. 잡아먹혀 버린 과거는 뇌리에 남아 사람을 잔인하게 괴롭힐 것이요, 그것이 없다고 해도 무언가를 새로이 찾아내거나 지어나가는 과정은 그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거나 고되기 그지없다. 이 잔인한 세상이 자신이 앗아간 것의 대체품을 그렇게 쉬이 허락해줄 리 없으니까. 당신도 잘 알지 않는가. 발버둥쳐도, 도망쳐도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그런 당신의 삶에 이 여자는 예기치 못한 예외변수로 끼어들었다. 따뜻한 손으로 눈사람을 거머쥐려 하면 녹을 뿐인데, 그것을 아직 모르고 있는 이 소녀같은 여인이, 당신과, 이 차 안에 단 둘이. 여름 소낙비는 속도 모르고 후두둑 쏟아질 뿐이다. 그녀는 당신의 요청에 고개를 끄덕였다. 차 안에 침묵이 감돈다. 그녀가 손을 뻗어서 라디오를 킨 것은 그 침묵을 조금이라도 덜어보려는 시도인 모양이다. 다만 당신이 잘 부르네, 하고 말을 건네자 페로사가 시선을 피하는 게 보인다. "잘 부르긴." 부끄럼타는 건가?
2절의 가사가 지나고 나면, 어느덧 SUV는 화이트 나이트 호텔 앞에 도착한다. 당신의 요청에, 페로사는 당신을 곁눈질하며 대답했다. "그럴 생각이었어. -그 전에, 잠깐만."
저만치 멀리 운전석에 앉은 여인과 똑같은 머리색을 한 사람이 서있는 게 보인다. 커다란 장우산을 쓰고 있음에도 알아볼 수 있다. 차이점이라곤 그녀와 달리 머리를 뒤통수 높은 곳에서 묶는 게 아니라 그냥 등으로 쏟아지도록 내버려두었다는 정도겠다. 페로사는 그쪽으로 시선을 두더니 그 사람이 자신이 찾던 사람인 것마냥 차를 몰아 인도에 차를 붙였다. 조수석 창문 쪽으로 그 사람이 고개를 디밀어온다. 한때 순진무구하고 자상했을 법한, 그러나 지금은 세상의 풍파에 휩쓸려 낙담해 있는 비취색의 눈이 여기서도 보인다. 전체적 인상이 페로사보다 훨씬 유순하다는 것을 빼면, 페로사와 퍽 닮아있는 여인이었다. 페로사는 "잠깐만." 하더니 조수석- 당신이 앉은 자리 쪽으로 몸을 뻗으며 조수석 창문을 열었다. "다녀오셨어요." 하는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NOSTALGA TROPIC이라는 상표가 난잡한 폰트로 인쇄된 담뱃갑을 손이 건네어주고, 페로사는 그것을 넘겨받았다. "고마워." "조심하세요." 뜻모를 인사를 남긴 그녀는 당신에게 눈짓으로 조심스레 인사를 건네더니, 호텔 정문으로 총총히 멀어져갔다.
페로사는 담뱃갑만을 받아들고 다시 조수석 창문을 올리고는 화이트 나이트 호텔의 직원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까의 그 허름한 건물과는 대조적으로, 당신의 몸이 아니라 눈에 좀 더 익숙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과시하고 있는 화려하면서도 정갈한 슬로프가 눈앞에 보인다. 페로사는 한 손으로 담뱃갑을 툭 열었다. 그 담뱃갑 안에는 담배가 가득차 있지 않았다. 열댓 개비쯤 될까. "그 안에 보면 핸즈프리 같은 게 있을 텐데, 꺼내서 옷깃에 단 다음에 스위치 눌러."
그녀의 말을 따라 담뱃갑을 들여다보면 언뜻 보면 옷의 아일렛 장식 정도로 보고 지나칠 수 있을 만한, 옷에 부착할 수 있는 조그만 기계장치가 하나 있다. 톡 털면 굴러나온다. 에만의 지식이 당신에게도 공유된다면, 이것은 주변의 감시장치를 자동으로 인식하고 종말 단계에서부터 이미지를 해킹해서 합성하여 감시카메라 기록에서 사용자의 이미지를 지워버리는 재머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담배 어쩌구저쩌구 했던 건 미리 이렇게 말을 맞춰두었던 걸까? 하긴, 여기를 들리는 VVIP들 중에 자신이 여기에 들렀다는 사실마저 숨기고 싶은 사람이 없으란 법은 없다.
페로사는 주차장의 직원 구역에 차를 댔다. 다시 기어봉 움직이는 소리, 사이드 브레이크 내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시동이 꺼지고, "이제 벨트 풀어도 돼." 하는 말과 함께 페로사는 벨트를 풀고는 운전석 문을 열고 나갔다. 운전석 문이 탁 닫히고, 정면 창으로 그녀가 조수석 쪽으로 돌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페로사는 조수석 문을 열고는 당신에게 손을 내밀어왔다.
답레쓰다 30분 정도 잠들었다... 3.3 에만주는 잠들었으려나? 나도 답레만 남겨놓고 자러 갈게. 에만주의 몸이 하루빨리 회복되었으면 좋겠네... 오늘도 저녁 같이 보내줘서 고마웠어. 푹 쉬고, 머리는 차갑게 유지하고. 좋은 꿈 꾸고 피로없이 푹 자길 빌어. 잘 자. (쫍)
돌아갈 수 없기에 앞으로 나서려 했으나, 세상이 남긴 상처는 낫지 않는다. 한 번 일어난 일은 어떻게든 되돌아오지 않는다. 가혹하고 잔인한 운명은 청천벽력처럼 떨어지고, 남겨지게 된 사람은 상처를 안고 살게 된다. 상처가 곪고 썩어도 어떻게든 살아가야만 한다. 비참한 삶이 마침내 끝날 때까지. 잔인한 세상에서 빛을 찾는다 해도 그 썩어 문드러진 상처를 다시금 회복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발버둥 친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헤로인의 삶뿐만이 아니다. 모든 것의 시작이 된 미카엘의 삶에도, 하물며 그 앨리스의 삶에도 상처는 있다. 내색하지 않고, 혹은 가시를 완벽하게 드러내며 살 뿐이었다.
그런데 당신은 예상치 못하게 나타나 온기를 주려 한다. 이미 나는 꽁꽁 얼어붙어서 더는 다가오면 안 되는데. 침묵과 함께 그것은 눈을 잠시 내리감는다. 비가 떨어지는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는 여우비가 왔는데, 쏟아지는 비는 아주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묘한 날이었다. 후드득 쏟아지는 빗속에서 편하게 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을 뜨니.. 그것은 눈을 떠 당신을 바라본다. 당신은 부끄러움이라도 타는지 시선을 피하고 있다. 어느덧 노래는 2절을 시작했고, 당신을 바라보는 시선도 잠시 사그라든다. 다시금 기력 없이 눈을 감는다. 스냅백을 꾹 눌러쓰고, 마스크로 입과 코를 가리며, 점퍼를 잠가 체구를 가린다. 호텔 앞에 도착할 적 잠시 차의 속도가 느려진다. 같이 내려달라 했는데, 지금이 내릴 순간은 아닌 것 같다.
눈을 가늘게 뜨자 한 사람이 보인다. 커다란 장우산을 썼지만 당신만치 키가 크다. 아까 전화를 했던 동생인 걸까? 머리카락은 등으로 쏟아지고, 조수석 창문 쪽으로 고개를 디밀자 마치 자신은 없는 사람이라는 양 몸을 차 등받이에 가까이 붙인다. 낙담한 비취색 눈이 창문 너머로 보인다. 당신과 비슷한 여인이고, 가족은 확실한 것 같다. 동생 쪽이 조금 더 유순한 것 같다. 그것은 스냅백의 캡 부분을 꾹 눌러쓴다. 당신이 이쪽으로 몸을 뻗는다. 이런 상황은 바라지 않았는지 마스크 속 입을 꾹 다문다. 조수석 창문을 열자 당신의 동생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담뱃갑 하나를 손에 쥐여줄 뿐이다. 그게 다다. 뜻 모를 인사도, 자신을 향한 눈짓의 인사도. 그것은 눈을 굴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며 끝까지 침묵했다. 담뱃갑 하나 때문에 여동생을 이곳으로 부른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아."
직원 주차장으로 향할 적, 그것은 익숙함을 느낀다. 지하도 이렇게 스스로를 과시하며 화려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짧은 감탄사를 뱉은 것은 그 이후 당신이 담뱃갑을 열어젖힐 적이다. 담뱃갑을 툭 열 적에, 그것은 가만히 당신을 쳐다보다 시선을 내린다. 담배는 가득 차 있지 않다. 담뱃갑을 받아들고 톡 털자 무언가 굴러 나온다. 옷깃에 단 다음에 스위치를 누르란 말에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갔다. 아까 그건 암구호 같은 느낌이었나. 지하에서도 흔한 일인데 왜 의심조차 못 했을까. 에만의 지식 선에서가 아닌 그것의 선에서도 잘 알고 있다. 이건 재머다. 우스운 일이다. 왜 세상 물정이라곤 단 하나도 모르던 미카엘에게서 돋아 나온 가시가 이런 것을 알고 있는 건지.
그것도 제법 머리를 잘 굴리는 편이었다.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 많기 때문에 에만의 머리에 비교 당하거나, 앨리스만큼의 잔머리가 없어 보일 뿐. 그것은 짧은 시간 머리를 굴린다. 이런 재머를 평소에 가지고 다닐 정도면 그만큼의 손님을 접대한다는 뜻이고, 그 손님 중에서 모습을 떳떳하게 드러낼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적어도 정적이 많기 때문에 이곳에 올 수 없단 것인지. 이 도시에서 단순히 수줍다는 이유로 재머를 요청할 멍청이는 없을 테니까. 조금이라도 건수를 물렸다간 귀찮아질 일 투성이인 사람들이 주 고객이란 건가. 그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옷깃, 정확히는 아무도 의구심을 갖지 않을 부분에 장치를 슬쩍 단다. 익숙한 모습이고, 어디에 숨겨야 눈썰미 좋을 사람에게도 들키지 않고 자연스럽게 보일지 아는 것 같다. 당신이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릴 적, 그것은 스위치를 눌렀다.
그리고 물끄러미, 당신을 바라본다. 벨트를 풀며 당신이 문을 열고 나가는 걸 본다. 조수석 문을 열고, 손을 내미는 것까지. 분명 몇 분 채 안 되기 전에는 당신의 손 하나마저 끔찍하게 여겼던 것 같은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그것은 잠깐 머뭇대다 손을 쭉 뻗어 당신의 손을 덥석 잡는다. 그리고 폴짝 내렸다.
"…가자."
당신을 흘끔 올려다본다. 그리고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뜬다. "그래도 넌 이상해도 나쁘지는 않은 사람이네. 손바닥에 독이라도 발랐을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없고." 매를 알아서 잘 버는 법이다.
불가사의한 하루다. 당신에게. 아니 요 근래 들어 불가사의한 일이 많다. 자신에게 불가사의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의 영향이 당신의 차갑게 소리없이 쌓여있는 만년설과도 같은 당신의 삶에 불가사의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예기치 못한 발자국이 생겼고, 예기치 못한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예기치 못한 죽음을 예기치 못하게 면했고, 더 이상 외롭다고 느끼지도 못할 공허함에 침잠되었어야 할 어느 날 저녁이 나른한 일상으로 변했다. 칼을 거머쥔 채 빗속에서 유령처럼 떠돌았어야 할 오늘도 예기치 못한 손길이 귀에 드리우더니, 정신을 차려보니 오늘 처음 만나보는-과즉 틀린 말은 아니다-여자의 차에 타고 어딘가로 가고 있다.
─그것은 그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무엇을 바라고 이러는 걸까. 손에 넣을 자격 같은 것은 없음을 알면서. 손에 넣는다손 쳐도 그것을 유지할 방법도 없을 텐데. 하나의 사실만으로 순식간에 깨어져 바스라져버리고, 자신에게는 결국 당신 모양의 흉터자국밖에 남지 않을 텐데. 그때 왜 나는 몸을 던져서 당신에게 날아드는 .308 탄환을 막은 걸까. 한때 등록되지 않은 몸이나마 히어로로서 활동했던 정의감일까? 분명 시작은 그랬던 것 같은데, 나는 어쩌자고 이러고 있는 걸까. 이 세상 모두가 나를 증오하고 있는데. 이젠 없었던 일로 하기엔 늦어버렸어. 슬로프로 천천히 올라가는 그녀의 얼굴에 어린 회색빛은, 그저 모든 빛이 씻겨내려가는 바빌론 시티의 거센 장맛비 때문일까.
그런데도 바보같이, 당신이 말을 건네어올 때면 그녀의 얼굴은 원래의 빛을 되찾곤 하는 것이었다. 붉은 편에 속하는 그녀의 피부, 그 푸른 눈동자, 물기를 머금은 금발까지. "손바닥에 독을 왜 발라." 그녀는 키들거리며 웃었다. "내가 얻을 게 뭐가 있다고." 그리곤 당신의 손을 끌고 프론트로 향하려 했다. 체크인부터 해야지 않겠는가. 혹시 204호에 장기투숙 계약을 맺어놨거나 한 거면 그녀에게 미리 말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