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맑고 넘실대는 바다는 아름답다. 치안이 좋은 장소는 웃음이 꽃 피고 사람들이 제각기의 일상을 살아가며, 관광객의 떠드는 소리는 하늘을 찌르고 평온하기만 하다. 바빌론 시티의 겉모습은 빛나는 별 이자, 하나의 지상낙원이다. 누군가 웃지 않는다면 웃게 만들고, 근심이 있다면 눈 녹듯이 녹인다. 답답한 현실을 내려놓을 수 있고, 삶의 고통 또한 내려놓게끔 만든다. 그런 지상낙원에 많은 사람들이 현혹됐고, 자리를 잡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이 자리에 눌어붙게 되는 사람들은 천천히 낙원의 이면을 엿보게 된다. 하나하나 들추며 고통받기도 잠시, 낙원이라는 이름만 있다면 섭섭하다는 건지, 도시 전설로 나도는 장소를 듣게 되기도 한다. 지하. 빛나는 별의 이면이자 낙원의 이면. 지나치게 차갑고, 지나치게 뜨거우며, 지옥도를 그려내며 그 자체인 곳. 어둡고, 피로 이루어진 분수가 있으며, 울음과 비명이 난무하고, 그 비명은 지상에 닿지 못한다고 한다. 아직 가본 사람은 없다지만 소문은 무성하다. 어쩌면 가고나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발언은 묻히고, 그 공포만 퍼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점이 있다. 지하는 마냥 어둡고 음침하지 않다.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막상 살다 보면 저 지상과 다를 바가 없다. 물론 도시 전설처럼 피와 비명이 난무할 적도 있지만 적어도 매일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지금껏 살아오며 본 지하는 화려한 연회장을 방불케 한다. 아름답고 화려한 조각상이 있고, 샹들리에도 있다. 같이 다니는 사람들은 정답기까지 하며, 마시는 음료는 그 맛이 넥타르에 비견된다. 비록 그 조각상에서 시취가 나고 석고가 부서져 사람이었던 것의 형태가 보이고, 샹들리에가 정적을 깔아뭉개며, 같이 다니는 사람의 손이 서로 강제로 꿰매 이어지고, 음료를 마시면 이제 그 음료가 아닌 것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약에 취해 기어 다닌다 해도. 사람들은 누군가 울면 축하해 주고, 웃으면 끌어내렸다. 끝나지 않는 춤을 추며 하루하루를 지새운다. 음침하기는커녕 광인의 낙원인 것이다.
그리고 이 광기의 중심에는 '거꾸로 뒤집힌 이름'이 기거하는 곳이 있다. 그것은 많은 정보를 손에 쥐고 있는 미지의 인물이며, 그 정보를 바탕으로 현재 지하를 손에 쥐고 흔드는 지배자를 만들어낸, 이른바 킹메이커다. 많은 빌런이 이 킹메이커를 동경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치고 올라오듯, 아니면 그 높은 곳에서 뚝 떨어지듯 나타나 에누마 그룹의 입김과 이간질로 이루어진 지하의 권력구도를 뒤집어엎고, 지상과 지하의 경계를 한 달이나 흐리게 만든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업적 때문인지 킹메이커요 거꾸로 뒤집힌 이름은 지하의 정신적인 지주, 그리고 어르신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킹메이커는 기대와 달리 자신이 기거하는 곳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을 위해 준비된 자리엔 제법 화려하지만 실용성을 중시했는지 푹신푹신한 왕좌와도 같은 무언가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 그마저도 주인이 앉지 않은지 제법 오래됐는지 먼지가 앉아있다가 가끔 먼지만 툭 털 정도로 앉고 가는 날이 허다하다. 많은 빌런이 이 자리가 하루라도 더 오래 채워지기를 고대했으나 킹메이커 밑에서 자라 지금쯤 도시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빌런들은 차라리 그것이 영영 오지 않았으면 하고 빌었다. 특히 비가 오는 날이면 고대하던 빌런들도 한 수 무르며 오지 않기를 빈다. 아예 그 기간에는 지하를 뜨는 빌런도 있다. 비가 오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던 권력구도의 다툼이 삽시간에 멈춘다. 킹메이커가 나타난 지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암묵적인 규칙이 생긴 것이다. 그만큼 킹메이커요, 뒤집힌 이름인 에만은 지하에서 영향력이 강한 존재였다.
그리고 여기, 드디어 주인이 돌아왔다. 비가 내릴 듯 지상은 우중충하다. 대리석으로 된 바닥에는 누군가 무릎을 꿇린 채 제압당해 고개를 바닥에 박은 채 벌벌 떨고 있고, 그 앞에 주인이 늘어지듯 앉아있다. 이 자리의 주인은 늘 바뀐다. 어느 날은 소년이었고, 여인이었으며, 노인이었다. 그렇지만 공통점이 있다. 하나같이 잘 짜인 인형같이, 같은 생각을 한다는 점이다. 사람의 생각은 조금이나마 다르기 때문에 같은 정보를 말해도 그 속에 내포한 의미에 희미하게나마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이 자리에 앉는 존재들은 달랐다. 다른 숨결, 억양, 목소리로 얘기하지만 전달하는 의미가 일절 달라지지 않았다. 그 때문에 혹자는 에만을 무시무시한 세뇌 능력자로 생각했고, 에만이 생명을 창조해낸 과학자라 생각했다. 심지어는 신이라 주장하는 자도 있다. 그런 괴팍하고 흉흉한 소문 속에 앉은 오늘의 주인은 소년도, 소녀도 아니다. 옅은 백금발에 붉은 모발이 군데군데 섞였고, 눈은 겨울을 닮았다. 벌써 10분째의 침묵이다. 시선에는 소리가 없는데도 칼로 무언가를 베듯 서걱거리는 소리가 날 것만 같다.
"오늘 내가 뭘 하려 했는지 알아?"
정적을 깬 목소리는 잔잔하다. 누군가에겐 아침을 같이 보냈기에 더없이 달고 사랑스러운 목소리일 것이나, 애석하게도 눈앞의 남성에겐 아닌 듯싶다. 용왕은 뒷짐을 진 상태로 고개를 처박고 있는 남성의 고개를 향해 구둣발을 까딱였다. 강제로 고개를 밀어올려진 남성은 겁에 질려 딱딱 맞부딪치는 잇소리를 내며 답했다. "아, 아르카디아의.. 피갈이..?"
"대화의 격이 떨어지는데."
기분이 나빠졌는지 표정이 옅게 일그러진다.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자 용왕은 흘끔 에만을 살폈다.
"예약 잡고 술 마시려 했어."
검지에 벌써 카람빗 한 자루가 빙빙 돌고 있다. 쉽게 방향을 바꿀 수 있도록 뚫린 고리 형태의 구멍에 검지를 넣고 빙빙 돌리는 버릇이 누구의 것이더라. 용왕의 시선이 점점 가늘어진다. 에만의 독백이 이어진다.
"나도 보고 싶었거든. 대체 누가 쥐새끼 하나를 더 만들게 했을까? 얼마나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길래 지하를 내팽개칠 생각까지 했을까? 누가 기쁘게 할까, 감히 이 도시에서."
용왕이 눈을 홉뜨며 남성의 머리를 세게 짓밟아 제압한다. 눈을 홉뜨기가 무섭게 에만이 의자에서 튕기듯 달려 나왔고, 밟는 순간 카람빗이 머리가 있었을 허공을 거세게 갈랐다. 용왕의 발이 더 빨랐는지 쿵 소리가 났지만, 힘 조절을 제대로 못했는지 대리석 바닥에 피가 조금씩 고이기 시작했다. 에만이 허공을 갈랐던 팔을 느릿느릿 거뒀다.
"아무리 네가 나선다 해도 상품 훼손은 용납 못한다." "저게 다 망쳤잖아. 왜 살아있어서 내 시간을 허비하게 만들지? 왜 아직도 숨이 붙었냐 묻잖아." "곧 투기장에 갈 녀석이니 아량을 베풀지그래." "못 갔잖아, 못 봤잖아. 내 시간을 허비하게 만들었잖아. 고작 투기장? 아량? 용납 못하지.. 내가 얼마나 궁금했는지 알아? 이 도시에서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쥐새끼를 둘이나 홀렸지? 심지어 그중 하나는 새로 생긴 새끼인데..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면-!!"
에만이 목에 핏대를 세우자 용왕은 직감했다. '걔'다. 그것은 애정을 증오한다. 온정을 끔찍할만치 혐오하며, 동정을 같잖은 사치로 여긴다. 누군가 손을 뻗으면 그 손목을 자를 사람이다. 용왕은 그것을 이해하고, 지금 이 상황에 분노하는 것도 당연하다 여겼다. 그것은 카람빗을 역수로 쥐고 대리석에 고이는 피를 바라보다 남성의 머리를 한 번 거세게 걷어찬다.
"쓸모 없는 새끼!!!"
사람이란 것은 상처라는 것도 딛고 올라서니 제법 오만하고도 이기적인 존재다. 어쩌면 어리석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득과 실로 움직이는 것이 이 도시이거늘, 굳이 애정이니 온기요 각종 단 것을 찾는다. 허울뿐인 것이 그리도 좋은 것이다! 이리도 우습다. 역겹다. 짜증이 난다. 익숙한 향수라고? 거짓말! 그 쥐새끼들에게 한없는 배신감을 느낀다.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자 그것이 파르르 떨며 몸을 팩 돌렸다.
"눈을 뽑고 발목을 잘라 사자 우리에 던져버려." "자비를 베풀어줘서 고맙군."
적어도 너는, 겪은 일이 있으면 그러질 말았어야지. 멍청한 미카엘 같으니라고. 비가 온다. 지하의 도시 전설이 현실이 될 시간이다.
안타깝게도 늦었습니다, 휴먼. 지금 이 순간 나를 재울 수 있는 방법은 에만주가 자러 가는 것뿐이야.
🤔 에만이 때때로 저 모습 그대로 지하의 왕좌에 앉기도 하는구나. 안드라스가 머리카락과 체격만 봤고 에만의 얼굴은 못 봤다고 해둘까, 음음.
페로사와 안드라스와의 악연을 끝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어. 안드라스를 죽이고 그 자리를 빼앗아버릴 수도 있고, 에누마 그룹까지 무릎꿇릴 수 있고(아마 두 번째로 어려운 방법 아닐까), 안드라스의 눈을 속이고 바빌론 시티를 떠나버린다던가, 아니면 안드라스와 협상을 한다던가...
그리고 바빌론 시티의 서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페로사주의 에피소드 말고도 에만주의 에피소드도 동등한 지분을 차지하게 될 테니까 >.0
소중한 에만주의 소중한 글인걸요... 88 내가 제공하는 에피소드의 선택기 말고도, 선택기에서 "당신은 당신이 맡은 사람들의 일을 차곡차곡 해내면서"라고 썼는데, 이 말인즉슨 당신이 맡은 '사람들의 일', 즉 에만이 받은 의뢰 같은 게 아니라 '당신이 맡은 사람들'의 일, 그러니까 에만(과 다른 인격들)의 행동을 이야기하는 거니까, 선택기 이외에도 에만의 다른 행동(=에만주의 서사)으로도 안드라스와 에누마 그룹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뜻으로 써둔 말이었으니까.
아무리 누군가의 삶이 바뀐다 한들 바빌론 시티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양껏 발버둥 쳐보렴, 네가 달라지는 일은 없을 테니. 마치 그렇게 속삭이는 양, 오늘도 당신은 평소와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한여름의 백일몽과도 같던 순간을 떠올리며, 당신은 오늘도 하루를 살아가고, 어쩌면 꿈이 아니었다는 점을 알아갈 수 있겠습니다.
할 수 있는 일: 4 추가 인간관계: 2 [일상] - 인간은 누구나 일상을 살아가고, 일상 속에는 소문이 있기 마련입니다.
1-1. 엘리시온의 바텐더. - 일 포인트 1 차감 "홀리몰리과카몰리뻐킹헬.. 저 새끼 이상한 것만 주구장창 시키는 것 봐라.. 미친 새끼 안주로는 케이크에 에그노그가 말이냐.. 지 혼자 초여름의 크리스마스지. 설거지 쌓이는 것 봐라.. 네? 하하!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아.. 네.. 에그노그 한 잔 더요? 네.." ─ 선배 바텐더.
결과: 오늘도 당신은 일을 합니다.. 꿀 같은 휴식시간, 입 가벼운 엘리베이터 보이의 손짓과 발짓이 더해진 생생한 소문을 들을 수 있습니다. 키워드는 3가지로, [앨리스/아르카디아/로즈밀]입니다. 앨리스에 관해 추가 정보가 있습니다. 부작용: 그 추가 정보가 다갓이며 우리는 다갓과 멱살을 잡는 사이라는 걸 잊지 맙시다.
*
1-2. 휴식의 느긋함 - 일 포인트 1 차감 "누가 아직도 신문을 읽어요? 핸드폰 뉴스가 있는데? 선배.. 설마.. 기계치는 아니죠? 어쩐지 그럴 것 같더니만- 악!" ─ 깝죽대다 한 대 얻어맞은 후배 바텐더
결과: 엘리베이터 보이는 저기서 뭔가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떠벌대는 소리를 무시하고 당신은 신문을 펼쳤든, 펼쳤든. 뉴스를 보든.. 고정된 결과인 [아미티스 대학]과 무작위 1개의 키워드를 얻게 됩니다. 다이스 범위는 공개됩니다. 부작용: 장악된 언론은 신뢰를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이스 값은 총 4개로, 그 중 2개는 입맛대로 조작된 정보입니다.
[선행] - 이 도시에서 가장 안 어울리는 행위
2-1. 엘리시온의 경호원. - 일 포인트 1 차감, 인간관계 포인트 1 차감. 선행 조건: 1-1, '엘리시온의 바텐더'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하마터면 거래처의 대가리를 따버릴 뻔했지 뭐예요.. 나도 참, 숙녀가 이런 말은 실례인가? 역시 모가지라 했어야 더 우아하지요." ─ 의문의 인물
결과: 엘리시온 내부에도 진상은 있기 마련입니다. 정확히는 안 그런 척, 민폐 끼치는 경우 말이죠. 거래처의 갑이니 을에게 희롱을 하라고 한 적은 없을 텐데. 원래는 쉬쉬하며 넘어가는 일을, 오늘따라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우호적인 인물관계'가 형성되며, 관련 정보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부작용: 모든 일에는 은원이 있습니다. 원한 관계가 자동적으로 형성됩니다. 다음 선택지에서 '부정적인 일'에 1포인트가 확정적으로 차감됩니다.
*
2-2. 겨울의 보호자 - 일 포인트 2 차감, 인간관계 포인트 +1 "차라리.. 차라리 죽게 내버려두지 그랬어.. 차라리 날 죽이지 그랬어!" ─ 희생양의 단말마
결과: 골목에서 나는 피냄새. 누군가 죽을 것 같았기에 당신은 살렸을 뿐입니다. 확정적인 정보를 하나 획득할 수 있습니다. 부작용: 은원은 다음 일상에서 바로 적용됩니다.
[행동] - 오른손의 이름은 대화, 왼손의 이름은 합의.
3-1. 원 펀치 쓰리 강냉이 - 행동 포인트 1 차감 "너 이자식, 우리 어르신이 가만 안 둘 걸?" "팍씨" "아, 타임! 타임! 암 쏘리! 잘못!! 했어요!! 저 이제 맞을 곳도 없어요!" ─ 어딘가 어리버리한 빌런
결과: 지하에서 올라와 막 설치기 시작하는 빌런과 '대화'를 했습니다.. 원하는 정보를 하나 직접 질문해 얻을 수 있습니다. 부작용: 아니나 다를까, 은원은 확실합니다. 이 빌런이 다음에 행동 포인트를 하나 까먹게 됩니다.. 행?운: 다이스도 은원이 확실한 존재지요. 행동 포인트를 만회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
3-2. 행동하는 비양심 - 행동 포인트 2 차감, 인간관계 포인트 1 차감 선행 조건: 2-1, '엘리시온의 경호원' "저게 뭐야?" "어.. 저희집 멈머요." "..저건 사람이라고 부르는 ㄱ.." "..아무튼 도와주세요!" ─ ?
결과: 곤란한 의문의 인물을 돕습니다. 새로운 인간관계가 추가되며, 확실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부작용: 세상의 이치를 하나 깨닫습니다. 에만이 당신의 행동을 눈치채며 경계합니다.
[건너뛰기] 결과: 에만주는 착하니까 남은 포인트를 이월할 수 있다! 부작용: 안알랴줌! >:3
1-1. 엘리시온의 바텐더 "고오갱님께서 해달라시는데 어쩌겠어." "야, 페로사, 턱관절에 힘 들어간 거 다 보여." "턱관절에 쥐가 나서 그래. 라모스 진 피즈가 아닌 게 어디야?"
"주문하신 에그노그 나왔습니다."
2-1. 엘리시온의 경호원 "고객님? 실례지만 엘리시온 이용수칙을 한 번 더 숙지해 주시겠습니까? 엘리시온 내에서 상호간의 합의 없이 그런 행위를 하시면 대단히 곤란합니다. 엘리시온에서의 음주는 즐겁게, 안전하게, 화목하게. 기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페로사, 미쳤어?" "잊었어? 나는 미친 여자잖아."
3-2. 행동하는 비양심 그 날 내내 페로사는 상당히 착잡해보였다. 자신이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알게 되어서가 아니었다. 저희 집 멈머요, 라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던 그 사람과, 저희 집 멈머라고 일컬어지던 그 사람의 모습이 자신의 처지에 겹쳐 보여서였기 때문이다.
#1. "음모론이라기엔 기일이 얼마 안 남았죠?" 당신의 하루는 바쁩니다. 안 바쁜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유달리 바쁜 하루였다 정의합시다. 애당초 술이라 하면 감정노동이고, 새벽에 퇴근하는 것 자체가 지옥이지 않습니까. 차라리 한 사람의 감정만 처리하면 좋겠지만 오늘은 예약이 잡혀있지 않는 날입니다. 선배의 속사포 같은 불만은 물론이요, 턱관절에는 힘이 들어가며, 눈치 없는 손님은 기어이 라모스 진 피즈까지 시켜버립니다. 결국 터져버린 선배의 Fu-....nny truck을 뒤로, 잠깐 깊은 한숨이 주변을 채웁니다.
"페로사, 내가 할게. 가서 좀 쉬고 있을래? 내가 저거 보내버리고.." "언니, 참아요." "응, 보내는 건 너무했지? 역시 묻어버리고.."
선배의 배려 덕분에 꿀 같은 휴식 시간이 찾아옵니다. 마침 운도 좋게 지난번 당신에게 딱밤을 맞은 엘리베이터 보이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휴식을 위해 들어오더니, 입이 근질근질한지 주변 눈치를 봅니다. 소파에 드러누워 쉬고 있던 다른 바텐더가 묻습니다. "그래, 오늘은 뭐야?"
"그게- 음모론을 들었거든요." "재밌겠다. 뭐야? 역시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아미티스 대학 여신이 사실은 사람 잡아먹는 괴물이래? 내 말이 맞지?" "글쎄, 앨리스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니까요!" "설마 너, 디엠에 답장 한 번 해줬다고 노후계획 세웠니? 왜 그런 반응이람!" "아니라니까! 아무튼, 손님들끼리 '그것'이 알아서는 안 된다고 수군대는 거 있죠?" "그것? 뭔데? 말해봐. 궁금하다." "그게… 붉은 마녀가 그날 자긴 살해당할 거라고 했대요. 남편이 알아서는 안 될걸 알았다고.." "그냥 미친놈 아냐?" "그렇지만 들어맞지 않아요? 흰 손도 사고사잖아요. 희생이라고 해도 공표된 게 말 아니면 없고.." "재미없다. 역시 대학 여신이.." "으악, 페로사! 이 사람 좀 어떻게 해봐요!"
#2. "내 이름은 셴-샹이라 해요. 천향이요. 발음하기 어렵죠? 쉽게 마오라고 불러요. 그게 더 편하거든요." 엘리베이터 보이와 바텐더의 싸움 아닌 싸움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휴식 시간은 없고 다시금 일할 시간이 찾아옵니다. 기진맥진한 선배의 교대하자는 소리가 이렇게 지옥 같을 수가 있나? 있습니다. 없을 리가요. 뭐든 쉬다 일하라 할 때가 제일 고된 법입니다. 그래도 곧 퇴근이니 그 점을 위안 삼읍시다. 바에서 여러 바텐더가 칵테일을 주조하고 당신 또한 셰이커를 흔들 때, 눈에 유달리 밟히는 것이 있습니다. 당신 근처 바에 앉은 두 명의 사람입니다. 여인과 남성은 둘 다 정장 차림이며, 연인이라기엔 비즈니스 관계인 것 같습니다.
분위기가 묘합니다. 은근슬쩍 여인의 손을 만지작대며 웃는 남성은 회색 머리카락을 가진 매력적인 사람이나, 여인에 비견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검은 머리카락을 헐겁게 쪽진 여인은 눈에 박히는 미인이고, 대놓고 어색하게 웃고 있습니다. 여인이 손을 계속 뒤로 물릴 적 남성이 손을 덥석 쥐고, 당신이 그 광경을 정확히 보았으니. 남은 일은 하나입니다. 당신은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남성을 제지합니다. 남성은 당황한 듯하다, 이내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납니다. "거래는 일단 성사된 걸로 알겠습니다, Ms. 셴." 하더니, 도망치듯 자리를 떠버립니다. 잠깐의 정적을 뒤로 다시금 소란스러움이 자리를 채우지만, 당신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인이 웃고 있으나 세상이 조용합니다. 어쩌면 당신의 무시무시한 감이 말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마터면..
"정말 고마워요. 운수 나쁜 날은 피했네요."
저 남자는 죽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여인의 소맷단에서는 독 냄새가 납니다. 숙련된 킬러인 건지, 당신의 제지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남성은 돌아가는 길에 중독되어 죽었을 테지요. 여인도 당신이 뭔가 눈치챈 걸 알았는지, 당신을 향해 명함을 밀어줍니다.
"내 이름은 셴-샹이라 해요. 천향이요. 발음하기 어렵죠? 쉽게 마오라고 불러요. 그게 더 편하거든요. 보다시피 평범한.. 카지노 딜러에요. 놀러 오시면 후하게 대접해 드릴게요. 고작 칩이지만."
그리고 여인은 입을 벙긋거립니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당신의 무시무시한 동체시력은 정확하게 입모양을 알아봅니다.
당신도 나랑 같은 존재죠? 사람 찢는 것에 도가 터 보이는데.
현 시간부로 용궁, '마오'는 페로사에게 무조건적인 호의를 보입니다. 해당 호의는 선택지에 따라 변동될 수 있습니다.
#3. "가끔은 모른 척 지나가면 좋을 텐데도."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릅니다. 당신과 밤을 보낸 작은 여우는 최근 보이지 않습니다. 불야성의 도시는 시끄럽고, 접어든 인적 드문 골목도 다르지는 않습니다. 보름은 며칠 남았지만 달이 환하며, 그 달빛의 끝에 마오가 있습니다. 옷이 찢어진 것은 물론이요, 머리는 헝클어졌습니다. 마오는 당신을 마주하자 다급하게 무언가를 손끝으로 가리킵니다.
"아, 바텐더 씨!! 마침 잘 됐다! 저거, 저거 좀 잡아주실래요?"
저거라며 가리킨 손가락 끝으로 마오와 대치한 무언가가 보입니다. 마오가 말한 '저거'는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닙니다. 긴 털 짐승의 꼬리가 돋아나있고, 손발톱은 날카롭습니다. 동족인가 싶어도 동족의 냄새는 나지 않습니다. 뺨에는 털 짐승이 아닌 물고기의 비늘이 돋았고, 돋아난 비늘이요 털이 전신을 덮어 인간의 형태는 거의 없어 보입니다. 어쩌면 자신을 숨기고 살아간다는 이 능력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게 무엇이냐 묻자 마오는 태연하게 답합니다. "저희 집 멈머요."
저걸 과연 개라고 불러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마오도 제법 다친 듯싶으니 제압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생긴 것은 흉악했고, 당신이 제압하기 위해 다가올 적 입을 벌려 드러낸 이빨 또한 뾰족했지만 단 한순간입니다. 그것이 당신을 향해 달려들었으나, 늑대인간의 강력한 힘 앞에서 이길 수 없었는지 손쉽게 제압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제대로 된 반항도 하지 못하고 당신에 의해 제압될 적, 찢어지는 비명과 울음소리가 목을 타고 흐르기 시작합니다. 발음은 분명하지 않지만 죽고 싶지 않다는 것 같았습니다. "드디어 잡았네. 감사해요! 하루를 꼬박 쫓았거든요." 소란 속에서 마오가 한숨을 내쉬며 '멈머'라 불린 그것을 향해 다가가더니, 당신이 놓아주는 틈을 놓치지 않고 꾹 짓눌러 제압합니다. 멈머는 울부짖으며 눈물까지 줄줄 흘리기 시작했지만 그 누구도, 이 도시에서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이내 고개를 처박고 훌쩍입니다. 마오는 잘 했다며 멈머의 머리를 몇 번 토닥이며, 어르고 달랩니다.
"그러니까 왜 도망을 갔어. 멈머야, 내가 말했잖아,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 없다니까? 도망쳐도 달라지는 건 없어." "아, 으으, 시, 싫어. 죽기. 싫어. 죽기, 싫어요. 잘못했어요. " "그렇지만 멈머야, 어쩔 수 없잖아. 너는 리로보다 약하잖니. 이제 뚝 그치자. 따거가 네가 우는 걸 알면 화를 내실 거야. 그건 싫지? 우리 멈머, 뚝 그치자." "잘못했어요.." 막다른 골목임에도 누군가 담을 넘어오듯 가볍게 높다란 곳에서 착지하며, 당신을 쉽게 지나치며 멈머와 마오를 향해 걸어갑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오셨네요?" "비명 소리가 원체 커야지. 상품에 흠집은 없고?" "없어요!" "다행이네. 그걸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동족의 목숨이 필요했는데." "당연히 알죠! 돈만 해도 얼마람? 아참! 그리고, 저 분이 도와주셨어요." "누구? 아. 아! 맙소사."
당신의 존재를 이제야 알았는지 남성이 고개를 돌립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당신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옵니다. 순간 당신은 경계합니다. 대단히 익숙하고 위험한 냄새가 납니다. 당신은 저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모를 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인자한 미소. 흰 머리카락은 물론이요, 화려한 장신구 일색에, 세로로 죽 찢어진 금색의 눈동자를 가진 그를 압니다. 다만, 당신이 활동하던 시기에 같이 활동하다 어느 날 불명예 퇴출로 그 삶을 마무리 한 히어로 용왕도, 미드나잇 파크에서 당신의 작은 여우를 에스코트하던 의문의 존재도 아닙니다.
"대단히 감사해요. 덕분에 상품을 제대로 경기에 내보낼 수 있게 됐군요." 이 감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딘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깊숙한 저 너머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 하나 뿐. 용왕도 그건 마찬가지인지 몇 번 가늠하다, 눈을 동그랗게 뜹니다. 세크메트임을 알아차린 걸까요? 아니면? 용왕의 입에서 세크메트 소리도, 보호자 소리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사람 좋게 웃으며 그가 손을 뻗습니다. 악수라도 하자는 양. "그것보다 우리, 구면이죠?"
기묘하고 거북한 느낌이 듭니다.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합니다. 마치, 도시의 이방인은 아직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알게 되어버린 것만 같은.. 익숙하고 포근한 냄새가 하늘에서 바람을 타고 흐릅니다.
"다시 만나는 첫 단추를 잘못 꿰긴 했지만, 아주 좋은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군요."
그렇지만 고개를 들면 밤거리를 배회하는 고양이 한 마리가 담벼락 위에서 당신을 빤히 바라보다 저 너머로 휙 달아날 뿐입니다.
마치 단추를 잘못 꿴 듯이.
현 시간부로 용궁, '용왕'은 페로사에게 무조건적인 호의를 보입니다. 해당 호의는 선택지에도 변동되지 않습니다.
"아니, 됐어 됐어... 선배 팔뚝심으로 1분 동안 셰이커를 흔들다간 팔이 빠질걸- 아니, 굳이 선배가 하게?" 페로사는 귀엣말을 했다. "보내버릴 거면 그냥 아무도 모르게 스피리터스를 좀 섞어버려." 하고 페로사는 어휴, 하는 한숨을 내쉬며 탄산수를 들이켰다. 그러다 수다스러운 엘리베이터 보이 녀석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붉은 마녀라..." 바빌론 시티에서 사는 사람이면 모를 수 없는 이름인데, 왜인지 그 전에도 몇 번인가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은 기시감에 페로사는 무심코 그 히어로의 활동명을 한 번 읊어보았다.
"미스 마오?" 페로사는 그렇게 떠보듯 모천향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세스는 아니겠다 싶었나 보다. "엘리시온에서 한 잔 마신 손님이 그날 밤에 죽었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돌면 곤란하니까요." 페로사는 씨익 웃었다. 코끝이 찌릿찌릿했다. "영구 출입금지 조치가 내려질 만한 사안이 생기는 건 엘리시온에도 달가운 일이 아니고요." 손님 한 명이 후다닥 달려나간 출구를 보며, 페로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방금 내가 저 사람 목숨을 구해준 셈이라는 거, 저 사람은 영영 모르겠네요." 하며 그녀는 농짓거리를 한다. 누군가가 독살당하는 게 농담만큼이나 가볍게 오가는 광기의 도시의 바텐더다운 태도다.
그러나 당신도 나랑 같은 존재죠? 하고 입모양으로 건네어지는 말에, 그녀는 눈동자만을 모천향에게로 데룩 굴렸다. 그리고 나직이 으르렁댔다. "입 조심." 나직하되 사납고 광폭했다. 사람처럼 생각하고 사람처럼 행동하니, 나는 사람이야. 사납고 광폭했으되, 사람도 짐승도 되지 못한 이물이 읊조리는 보호기제에 가까운 비참한 변명이었다.
"당신, 카지노 딜러라며."
그 멍멍이라고 불린, 반은 사람이고 반은 용이 되다 만 기괴한 이무기의 형상을 한 그것이 덤벼오는 바로 그 순간 페로사는 옆으로 살짝 비켜서는 것으로 그것의 돌진을 피했다. 그것의 헛친 공격은 페로사의 옆구리 사이로 흘러나갔으나 온전히 빠져나가지는 못했다. 바로 그 다음 순간 페로사의 팔과 몸통이 그것의 상반신을 콱 죄었던 탓이다. 그것을 옆구리로 콱 끼어 사로잡을 때, 문득 그만 뉴 에덴에서의 시절이 떠올라 페로사는 질끈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방금 사로잡은 그것을 모천향이라 자신을 소개했던 여인에게 넘겨주는 과정은 물 흐르듯 매끄러웠으나, 페로사는 자기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난동을 부리는 능력자를 연구원들과 보안요원에게 자연스럽게 넘겨주는, 몸이 기억하는 대로의 움직임을 실행했을 뿐이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에 묶여있던 페로사를 일깨운 건 또다른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었다.
"당신은." 하는 말이 절로 나왔으나, 용왕이 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에 페로사 역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방금 뭐였습니까?" 그 누구에게도 향하지 못한 말이 휘청거리며, 용왕의 손을 맞잡아 악수하는 페로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밤거리를 배회하던 고양이가 있던 자리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