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사항 ※최대 12인이 제가 받을 수 있는 한계입니다. ※총 10개의 대사건이 모두 일어나면 완결됩니다. ※이 스레는 슬로우 스레로서, 매우 천천히 진행됩니다. 진행은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 보통 오후 2시~4시 사이에 진행되며 길면 2시간 짧으면 1시간 반 진행되니 참고 바랍니다. ※진행 때에는 #을 달고 써주시면 됩니다. 진행레스가 좀 더 눈에 잘 띄기 위해서 색깔을 입히거나, 쉐도우를 넣는다거나 하는 행위도 모두 오케이입니다. 스레주가 지나치지 않을 수 있도록 이쁘게 꾸며주세요! ※유혈 묘사 등이 있사오니 주의 바랍니다. ※이 외에 미처 기억하지 못한 주의사항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스레주도 무협 잘 모릅니다...부담가지지 말고 츄라이츄라이~ ※기본적으로 우리는 참치어장 상황극판의 규칙을 적용하며, 이에 기속됩니다.
은혜라. 어찌 보면 당연하고도 어찌 보면 인륜적인 것에 대한 단어이다. 사람이 은을 입으면 그것을 갚는 데에 신경을 쓰고, 사람이 원을 입으면 그것을 수 배로 쳐 되돌려주는 것이 당연한 이 세계에서 그에게 거짓으로라도 내건 은혜는 압박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압박이 될테니. 그리하여 말 대신 술잔을 기울이는 시간을 늘려간다. 술잔은 가득히 차고 비어가고, 가득히 차고 비어가는 것이 반복된다. 중원은 말 없이 상대의 잔에 술을 채우고 자신의 잔에 술을 채우길 반복했다. 백로는 그 모습이 퍽 고고한 새였으나 어찌 보면 참으로 슬픈 새이기도 했다. 떠나고 돌아오길 반복하는 것이 어쩌면 적 둘 곳도 없이 떠나는 것만 같았으니. 그리하여 그만의 자유로움이 있는 새였으니 마음 속으로 오르는 미묘한 감정들을 온술에 데워 맹탕해갔다. 생각을 잊고, 마음에 남은 언어들을 녹여낸다.
"산동에는 용이 내렸으며,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용을 압박해나간다 하오. 저 멀리에는 비룡 절강대협 남궁지원과 중원제일미 허예은의 결혼식이 있다고 하며 얼마 전, 제 아비를 밀어내고 어미는 밀쳤으며 사촌을 죽여 제 자리에 오른 소가주도 있다고 하지. 그리고. 그것 아시오? 저 멀리 파계회는 그 영역에 끼어들려 하는 아홉 마리 늑대를 상대해야 할 것이며 사천당가는 얼마 전 마교와의 대전을 기억하고 있을 터이니. 이 세상은 곧 전란과 위협, 혼란으로 가득할 것이오."
혼잣말을 내뱉듯 덤덤히 말하는 것은 중원 나름의 술값이었다. 절정 무인이 없는 이 객잔에서 그를 죽일 것은 없었으며,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지는 기감은 이화대가 다가오고 있단 것을 알리고 있었으니. 중원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별 것 아닌 이야기들을 찬찬히 녹여내고 있었다. 그가 파계회라면 어떠한가. 애초에 모용세가는 모든 것을 이용하는 곳이거늘 그가 파계회가 아니라 흑천성이라도, 쓸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이용하는 것이 모용세가의 방식이었고 중원이 슬쩍 흘리는 것들 속에는 야견이 알고 있었건, 알지 못했던 것들이건. 그에게 도움이 될 법한 것들을 자잘히 섞어냈다.
"이 시대만치 난세란 언어가 어울리는 법이 없지. 이 세상에 적 둘 곳이 어느 곳에고 없냐만은 단순히 살아가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나도 넓소. 죽음을 각오하더라도 칼을 들이밀 필요도 있게 될 것이오. 그래.."
중원은 옛날 생각에 빠져, 찬 술 한 잔에 정신을 잃어갔다. 비취신공을 운용하는 것조차 잊고 취기를 빌려 어릴 적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은 것처럼. 아마 이 사내는 모를 것이다. 왜 갑자기 북천독수가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이 맛 좋은 술을 앞에 두고 갑작스레 취하기라도 했는지. 아니면 갑자기 웃으며 칼을 휘두르려 들지. 그도 아니라면.. 미쳐버렸는지. 다른 모든 대답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만은 그는 미쳤다는 그 말에 썩 흡족하게 들렸다. 가볍게 뒷목을 주므른 중원은 천천히 야견을 바라봤다. 녹안도, 금안도 떠오르지 않는 평범한 갈빛을 띄는 눈이 야견을 바라봤다.
"세상이 참으로 어지럽소. 나도 참으로 어지럽소. 이 세상이 어디에 무엇이 이리도 많은지. 내가 가진 것은 얼마나 많은지. 내가 놓칠 것은 얼마나도 많은지. 그런데 웃긴 것은 내가 왜 이리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것과, 지금 술이 참으로 달다는 것이라오. 하하하. 아하하하하하"
중원은 미친 것처럼 웃다가 야견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중원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일단 사파이기도 했고, 행동에 걸렁거림이 느껴지는 것 역시.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나선 것이 퍽 맘에 들었다.
"내 이 오른팔을 잃었던 날. 나 역시 무모히 싸워 이기고자 했지. 영물도 아닌 대호를 이제 겨우 삼재의 기본 교리를 따진 후계자가 잡아보겠다 나대었다. 그 결과 이 팔을 잃고 이류의 경지에 설 수 있었다."
중원은 그 눈으로 뚫어보듯 야견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녹안의 눈을 띄워냈다. 단 한순간 들었던 취기를 흐려트리고 그 총기를 찬찬히 띄워냈다. 그리고 부드럽게 웃으며 야견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늘 본 것을 잊으라. 내가 말한 것도, 내가 얘기한 것도 잊으라. 은혜? 은혜에? 하하하하하하!!! 우습다. 정파가 사파에게 은혜를 남겨 무엇하겠더냐. 내가 네 목을 벨 것도 아니면 그 은혜랄 것이 무엇이 필요하다고! 네가 나중에라도 내 목을 베겠다 날뛰면 어찌하라고. 하하하하하하!!!!"
재밌었다. 지금의 이 상황이. 그냥 즐거울 뿐이었다. 마지막 술병이 비어감에 따라 중원은 찬찬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웃었다.
"기억해두거라. 이 세상이 미쳐버린 세상이라는 것임을. 오늘 나와의 만남 정도는 웃으며 얘기할 수 있게 될 것임을. 어디 한 번 발버둥쳐보거라! 어디. 너도!"
미쳐보자꾸나. 하고, 중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소가주 모용중원이다. 오늘의 만남은 모두 잊을 것이니. 어디 네 목표를 들어보자꾸나. 나는 언젠가 모용세가를 넘어. 무림맹. 그를 너머,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목표를 이루고자 한다. 정사대통합! 저 간악한 마교를 상대할 만한, 불온하나 누구보다 든든한 동맹을 세울테니. 만약 오늘의 일을 기억한다면 그 날에 너 역시 날 도와보거라. 파계회의 중심이 되어. 이 세상에서 살아보거라. 하하하하하하!!"
7년의 세월동안 무엇이 그렇게 바뀌었나. 강산 한번도 채 바뀌지 않을 시간이지만, 미약하게나마, 혹은 큰 변화를 겪은 사람들은 많았다. 남궁지원, 그 역시 그런 변화를 겪은 이들 중 하나였다. 7년이라는 세월은 소년에게 있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성격이 변하고, 외모가 변하고, 성향이 변했다. 그런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 역시 남궁지원 본인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따금 혼란스러워 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다름아닌 옛 인연을 만나 회포를 푸는 것.
7년이 지났다. 7년이 지났음에도 바뀌지 않은 것도 있다.
그 공자께서도 바뀌지 않으셨을까. 그는 옛 인연과의 기억을 떠올리며 잠시 감상에 잠겼다. 이 기루는 바뀌지 않았다. 제가 어릴 적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왔던 기루의 풍경 그대로였으니. 시선을 돌려보면 최상층도 아랫층도 느낀 감상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술을 마시는 사람들과, 그들의 품에 안긴 기녀들과, 귀를 자극하는 웃음소리, 노랫소리, 술잔이 부딪히는 소리까지. 변한 것은 없었다. 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겠지. 익숙한 소리들을 들으며 시종에게 최상층으로 안내해달라고 부탁하려는 찰나였다.
"...석류라."
일순 들려온 목소리에, 그는 천천히 입가에 호선을 그려나갔다. 다행히 그 역시 바뀌지 않은 듯 했다. 석류라, 분명 이 맘 때쯤 제철이었다. 그 역시 입가에 살짝 침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시종에게 이야기를 마저 하고 안내를 받아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이전에는 타인의 호의로 올라갔던 장소를 이젠 그 스스로 안내받았다. 그의 신분은 그것을 쉽게 가능케 했으니, 이 얼마나 편리한가.
"7년만입니다. 공자."
뚜벅. 뚜벅. 그는 거침없이 발을 내딛었다. 기루가, 기녀가 불편하여 최상층에 올 때도 벌벌 떨었던 그 7년 전의 소년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재하의 눈 앞에는 소년 대신 더이상 거침이 없어진, 능글맞은 미소를 짓는 청년이 있었다. 일부러 기감을 숨기지도 않았다. 옛 친구가 자신이 오기 전에 알아차리길 바란 것이 첫번째 이유요, 두번째 이유는, 마두에게 얕잡아보이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허락도 받지 않고 재하의 앞에 앉았다. 굳이 허락을 받을 필요가 있을까. 이미, 자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듯 싶은데. 그리고 자신도 그가 이곳에 있을 거라고 알고 있었고.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조용히 지은 그의 미소가 재하를 향했다. 우습게도 그 미소는 7년 전과 다를바 없는 모습이었다. 과거에는 진심이 담긴 미소였다면, 현재는 그저 가식만이 남아있다는 것을 빼면.
저는 아직도 사랑이라는 언어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합니다. 누군가는 사랑을 끓어오르는 열병이라 묘사했고, 누군가는 사랑을 조용히 다가오는 계절과 같다 하였지요. 부모에게서 내려오는 사랑은 위험 속에서도 누구보다 올곧게 내립니다. 부부간의 사랑은 긴 시간을 기댈 수 있게 하며 친구간의 사랑은 서로를 이해하여 먼 동맹이 된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사랑이라는 언어가 아직도 어색하기만 합니다. 내 부모와의 마지막 추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랜 기간만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가족들이 내 등을 두드리며 했던 원망과 어색함이었고 내 어머니의 난을 닦다 부러트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터트린 웃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순간에 눈을 가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내 원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 능력이 부족하여, 내 힘이 부족하여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 적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 손 안에 있는 것을 지킬 힘이 부족하여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을 것만 같을 때. 그 날에 있던 혈겁은 짙은 안개처럼 내 눈을 가렸고, 나는 내 손으로 사랑을 잃었습니다. 이제 내게는 내 과거를 추억할 자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내 어릴 적에 대해 걱정과 고민을 해주었던 혈육의 우정은 남지 않았습니다. 대신 내게 남은 것은 수많은 기대와 견제, 모의일 뿐이었습니다. 나는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타인을 의심하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소가주."
이제는 얼굴마저 익숙한 하인은 여전히 내 곁을 지키고 있었다. 북적으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인연에서도, 또한 내가 국을 엎고 타인의 어색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제 동생을 구할 방법이 내게 있다 믿은 그의 믿음을 나는 믿었다. 그래서 여전히 내 곁을 지키도록 했다. 하인의 손에는 어울리지 않는 꽃다발이 있었다. 희게 폭신하게 피어난 꽃다발을 들고 오며 녀석이 싱글거리는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퍽 즐거워 보여 나도 웃음을 지었다.
"소가주께 꽃을 전해달라 하신 분이 계셨습죠." "목련화라. 그러고 보니 슬슬 목화가 피어오를 때가 되긴 하였구나. 다만 이 계절에 척박한 요녕에 꽃이 필 때가 있었나 모르겠어." "요즘 소가주님 마음이 심란치 않으실 것이라고...소가주님 어머님께서 이것을 전해달라 하셨습니다요."
내가 어머니께 한 짓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지 하인은 내 기분이 좋지 않단 것과 멀리 떨어진 어머니의 꽃을 보여준다면 제 주인의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까 한 모양이었다. 여전히 얼굴을 싱글거리는 녀석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충정에 대고 잘못을 물을 수는 없지 않은가. 조심히 꽃을 안아들고 내 나름의 미소를 지어 그 향을 느껴보는 척 하였다.
"예쁘구나. 어머님께서 꽃을 보내실지는 몰랐는데 말이다." "소가주께서 어리실 적에도 어머님은 꽃과 같은 것들을 좋아하시지 않으셨습니까요. 지금 소가주님의 방에 있는 난만 보더라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래서 난이 부러졌단 것을 어머니께 말씀드렸을 때 나에게 얼마나 혼을 내시는지. 그땐 정말로 지옥이 없더구나." "헤헤. 그랬습니까요?" "그래."
손에 들었던 꽃을 하인에게 다시 건네며 난 웃음을 지었다.
"아내에게 어머니가 보냈다 하고 전해주게나." "소가주께서는?" "하하. 옛날처럼 하기에는 이 위치가 영 바쁘지 않은가. 할 것이 있으니 내 나중에 찾아가도록 하겠네. 그런데 일을 하는 중에는 이 꽃을 볼 수 없으니. 안주인에게 맡기는 것이지."
지혜로운 아내라면 내 의미를 알 것이라. 이 꽃은 아마 집 안에서 곧 조용히 사라질 것이다. 왜 하필 아내에게 부탁하겠는가. 그것이 누구의 것도 아니고 내 어머니의 것이라면 그 꽃에 담긴 의미야 뻔하지 않겠는가. 나는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와 같은 의미를 꽃으로 보내시는 것일지니. 어떻게 내가 그 꽃을 보고 어머니에 대해 무어라 할 수 있겠는가. 그 사랑을 거부한 것은 나인데 말이다. 이 집에서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많아야 셋밖에 되지 않았다. 내 손으로 직접 데려온 자, 사랑과 애착으로 묶인 연, 평생에 없을 은혜를 입혀 마음을 잡은 자. 그 셋이 아니면 나는 이 집에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해야만 했다.
"아."
나는 무언가가 떠오른 듯 하인에게 말했다.
"숙수에게 전해주게. 어제 올린 생선이 너무 써서 못 먹을 것 같았다고 말이네."
그 생선은 너무 쓰고 독하여 먹을 수 없었다. 하물며 음식을 먹은 뒤에는 비취신공을 운용하는 버릇이 없었더라면 눈치채지 못할 만큼 말이다. 아주 심심하고 질긴 생선을 졸여 만든 것에서 의심해야 했던 것을.
'왜 그리 급하게 먹어요?' '하하. 오늘따라 이 생선이 참으로 단 것 같아 그렇다오.' '...그래요?'
두 눈을 지긋이 감고 맛을 음미하는 척 하며 내기를 운용하던 나는 마음 속으로 실소를 올렸다. 우습지도 않았다. 아버지를 내치는 과정에서 사 년, 화산동맹을 채결하기 위해 움직인 삼 년. 그 기간동안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잠드는 것도, 쉬는 것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마치 내게 무언가를 묻기라도 하듯 다가오는 위협과, 내 아내를 노리고 다가오는 미수들마저 모두 의심해야했으니. 마음이 지치고 있던 차에 어머니의 꽃이 찾아왔다. 대체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나를 흔들어 소가주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이미 가주께 인정받은 자리를 쉽게 내칠 수 있단 말이던가? 하인은 내 말에 조금도 의심 없이 고갤 끄덕였다. 그래. 일개 몸종이 알기에는 너무나도 독한 것들이다. 만약 알아버린다면 본보기를 이유로 죽을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죽이자니 오히려 애매한 그런 자라 살아있을 뿐이니.
'알지나 모르겠구나.'
제 동생을 살려주었다 하여 지금도 웃고 있는 네게 미안했다.
"이만 가보게. 아. 그리고 내일은 나오지 않아도 괜찮네." "예..?" "그 날은 가주님께 배움을 받는 날이니 나오지 말란 얘기일세. 나오더라도 자네가 할 일은 내 시종을 드는 것이지 않은가." "예, 예에. 알겠습죠."
이해했다는 듯 인사를 하곤 떠나는 하인을 보고, 난 괜히 나무 뒤로 뻗은 담장을 바라보았다. 길게, 높게 오른 드높은 역사의 무게가 얼마나 무겁단 말인가. 그것을 수 년 만에 가지고자 하였으니. 깔려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족했다. 이 애매한 천재성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 "생각을 바꾸어라. 왜 의심을 하겠느냐. 당장 저기 있는 자가 왜 웃고 있는지. 웃는다면 무슨 이유에서일지 예상하란 것이 아니다. 그의 웃음을 보고 그 웃음의 형태를 보라는 것이다. 감정이란 그렇다. 무엇으로 좋고 슬픈지 그 내역만은 모두 알아낼 수 없을지언정 그 감정이 즐거워 웃는 것인지 어쩔 수 없이 웃는 것인지 감정의 형태는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표현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정직히 떠올리지 말고 의미를 생각하여 읽어내는 것. 우리는 이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을 관안觀顔이라 한다."
미묘한 표현의 반복 속에서 그것을 하나하나 곱씹는다. 수많은 표정의 형태를 읽고, 그것을 통해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고 상태를 살피게 하고 상대의 행동을 유도하고 표현을 보는지. 그것들을 하나하나 배우는 것들. 즉 미묘한 기류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을 배운다. 그래서 웃음이란 표정이 가장 어려운 것이라는 설명에 중원은 고개를 끄덕인다. 무표정한 얼굴은 단순히 감정을 숨기거나 무덤함을 표현할 뿐이지만 웃음에는 수십가지의 감정이 있기 마련이다. 단순히 기뻐 웃는 것과 슬퍼 웃는 것, 화가 끓으나 그것을 참아내어 억지로 웃는 것, 허망한 순간에 터지는 어쩔 수 없는 웃음 같은 것들. 그래서 웃는 얼굴이 가장 무서운 법이라는 말에 찬찬히 미소를 그려낸다. 웃는 얼굴이 어색하지만은 않다. 자주 웃기도 하였으며 나 역시 항상 싱글거리는 얼굴을 짓곤 하였으니 말이다. 가르침이 끝나고 나면 교육에 대한 인사를 올리고 가주께서 물으시는 질문에 답하고, 내 질문에 답을 듣는다. 그리고 그 방을 나서는 걸음은 유독 무거운 것이다. 무엇이라도 하나 더 얻을 게 없을까. 가주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없을까. 내 마음을 짐승마냥 드러내 이빨에 질겅거리며 조금의 단물이라도 얻어볼랑 하며 행동하지만, 그조차 쉽지 않았다. 방에서 나서는 나에게 단아한 미소를 피워내는 것은 아내인 도연의 표현이다. 그녀는 내게 의심하기보다 나의 곁을 지켜주곤 했다. 내 나름의 고민이 있으면 그 고민을 정리할 수 있게 기다려 주었고, 내가 힘들 것 같으면 조금 떨어져 걸으며 내게 시간을 주었다. 오늘의 그녀는 내 손을 쥐고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많이 혼났나 보네요?"
나는 고갤 가볍게 끄덕였다.
"할아버님께선 가르치는 때에는 엄하시니 말이오."
그 말에 도연은 부드럽게 웃었다.
"맞아요. 가주께선..무서운 분이니까요." "오래 기다리진 않았소?" "별로요. 자수를 하던 차에 당신이 곧 올 때가 되어 나왔을 뿐인걸요."
그 웃음이 좋아서 나는 모르는 척 고갤 돌려 헛기침을 채었다. 걸음을 옮기고, 방으로 돌아가는 이 시간은 유독 간질간질하여 마음을 뜨겁게 한다. 차가운 뱀의 몸에 따뜻한 무언가가 감싸듯 항상 도연의 손을 따뜻했다. 그 손을 마주잡은 동안의 온기가 들자면 무뚝뚝한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아 괜히 허, 허허 하고 웃음을 짓곤 했다.
"허 참. 쉬어도 되는 것인데.." "나오지 말아요?"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그러면요?" "흐음, 흠, 당신 손이 참 따뜻한 것 같단 생각을 했다오."
그 말에 도연은 재미 없다는 듯 웃음을 지우곤 칫 하는 탄사를 뱉었다.
"참 당신은 너무 무뚝뚝할 때가 있다니까요." "하하 그것이..." "그런 것도 좋아요."
도연은 내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무뚝뚝한 당신도, 가끔 능글어지는 당신도 말이에요."
그 말에 참아오던 얼굴이 붉게 올라올 것만 같아 조용히 고갤 돌렸다. 많은 감정에 무던해지고 있었으나 여전히 이 감정은 간질거리기만 하다. 7년의 긴 시간을 교제하며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익숙해진 것은 흐르는 시간 뿐이요. 감정은 여전히 떨리기만 하였다. 그래서 나는 대신 내 왼 손을 맡기었다. 오른손을 잃은 나는 그녀의 손을 잡을 수 있는 손이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왼손을 맡긴다는 것은 많은 의미가 있었다. 이 순간만은 무림인이 아닌 평범한 사내로 그녀를 대한다는 것도 되었고, 그녀가 내게 칼을 내민다 하더라도 대응하지 않겠단 의미도 있었다. 그저 이 온기를 잃기 싫더라고 생각한 시간은 익숙치 않은 재빠름으로 금새 돌아오고 말았다. 맞잡았던 손을 떼며 입에 피어난 미소로 아내를 바라보고 웃었다.
"그럼 내 할 것을 마치고 오리다." "늦지 않게 오세요. 알겠죠?"
은근한 눈빛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갤 끄덕이면서 난 천천히 고갤 돌렸다. 그 곳에는 언제나처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신채훈이 모습을 내밀었다.
"말씀하신 것은 처리했습니다." "그래. 누구의 일이던가?" "말하지 않고 독을 삼켜 자살했습니다." "일처리가 미흡하군."
쓴 눈으로 바라보는 눈길에도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갤 숙였다.
"죄송합니다." "되었네."
걸음을 걸으며 난 생각에 잠겼다. 먹는 것에 장난을 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대상이 나에서 내 아내로 바뀌었음이 문제일 뿐이었지.
"나를 노리던 것들이 이젠 내 아내를 대상으로 바꾼 모양이네. 하긴. 무력으로 이길 수 없다면 찬찬히 독을 삼켜 중독시키는 것도 염두에 둔 모양이다만."
거세게 발걸음을 내딛으며 분노를 표한 내 얼굴에 탁발씨의 분노가 찬찬히 올라왔다.
"건들 것과 건들지 않아야 할 것. 두 가지를 혼동한 모양이니."
웃음을 지으면서. 나는 걸음을 걸었다.
"내가 누구인지 보일 필요도 있겠다."
차라리 나를 건드렸더라면, 조용히 넘어갈 것을 내 아내를 건드린 것에 부아가 차올랐다. 그저 끓기 시작하는 아교마냥 찬찬히 올라오는 분노를 다스리며 걸음을 걷고, 마음을 다잡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