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겠네. 희고 텁텁한 밀가루를 뒤집어 쓰고 한 첫 번째 생각이다. 두 번째는 이걸 어떻게 치울까였으며 세 번째는 아깝다였다. 큰일을 하려던 건 아니다. 그냥 수제비가 먹고 싶었고, 의념 사용자의 피지컬로 반죽을 하면 매우 쫄깃거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반죽부터 직접 할 생각이 들었고, 마트에서 아무 밀가루나 집어 들고 와서 개봉했다.
근데 터졌다. 대체 왜? 멍하니 밀가루 봉투를 보자 이상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개봉 시 일정 확률로 터집니다’ 참으로 이상한 문구다. 내가 산 게 밀가루가 아니라 폭탄이었구나.
애초에 머리도 하얗고 피부도 하야니까 크게 눈에 띄는 건 역시 옷이다. 편한 옷 아무거나 입고 온 거라 그나마 다행인가. 펄럭이는 소매를 대충 털어내면서, 느릿느릿 다가오는 발소리에 귀를 쫑긋했다. 아, 지한이 누나다.
"아닌데요."
밀가루 미백이요? 재수없는 말을 하자면 나는 굳이 미백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이런 말을 함부로 했다가는 얻어 맞겠지. 나를 빤히 바라보던 누나는 이제 분진폭발을 언급했다. 나는 빈센트 형이 아니라서 그런건 관심 없어요 누나. 머리에 쌓인 밀가루를 탁탁 털어내는데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왠지 눈 앞의 누나가 사앙당히 큰 뭔가를 터트린 적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영향이 나한테 까지 처들어올 것 같은 느낌이 왠-지? 아니, 뭐, 그것보다. 이유가 어떻듯 부엌에 희고 텁고 녹지도 않는 눈이 내린 건 변하지 않는다. 아무튼 난 대략 정신이 멍하다.
"의념 각성자의 스펙으로 반죽한 수제비?"
분명 쫄깃하겠지. 맛있을 거야. 제대로 된 수제비 국물이 아니라 떡볶이 국물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고. 하지만 지금은 치우는 게 먼저지.
"바람이나 청결 같은 의념이 있었으면 편했을 텐데!"
털어낸 다음에 치워야겠다는 누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괜시리 투덜거렸다. 청소기를 끌고 와서 전원을 켰다. 위이이잉 하는 소리가 난다. 머리에 얹어져 있던 밀가루가 몸이 흔들리며 투두둑 떨어지는 게 보였다. 청소기 전원을 끄고.. 먼저 몸에 묻은 것 먼저 털기 시작했다.
토고는 손새라래를 쳤다. 음료를 거의 마시지 않는 토고는 명진이 말한 오렌지 휘발유가 자동차 애니메이션과 콜라보 하여 만들어진 상품이란 것도, 휘발유란 이름이 어떻게 붙었는지도 몰랐다 차라리 샐러드유 라고 했다면 토고는 저탄고지인가 뭔가 하는 고거가? 하는 식으로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아이야."
토고는 대충 대답하며 명진을 따라갔다. 그리고 조금 뒤에 멀쩡해 보이는 자판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점마 요상한 단물 뽑아 묵을지도 모르니 내가 뽑아야것다.'
토고는 명진이 오렌지를 먹고 싶다고 하였으니 오렌지맛 탄산음료 한 캔과 본인이 마시고 싶은 초코우유 한 팩을 선택하고 칩을 이용해 계산했다. 자판기에서 나온 캔과 팩을 집어들고선 캔을 명진에게 건네주었다. 머리에 뒤집어 씌워진 헬멧의 검은 앞유리를 살짝 들어올려 입만 노출하여 토고는 팩에 달린 빨대를 꽂아 초코우유를 마시기 시작했다.
토고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쪼옥 빨아먹고 빨대에서 입을 떼고 말했다. 다시 헬멧의 유리를 내려서 얼굴을 가리고 빈 우유팩은 쓰레기통에 버렸다. 자신의 얼굴이 혐오스럽진 않았지만 타인에게 그리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그렇기에 이런 반응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괜히 손해보라고. 봐서 좋을 건 없다고.
"떡볶이 풍이라.. 맛있겠네요." 갑자가 생각난 건데요. 쌀떡 파인가요. 아니면 밀떡 파인가요? 라고 물어보며 써도 된다고 승낙합니다.
"자유로운가.. 자유로우려고 생각하긴 했지만요.." 그래도 저는 역시 잡아두고 싶다..네요 라고 말한 뒤에 마도에 대해서는.. 사실 지한이를 짤 때 마도를 생각한 적 있었으나. 몇가지 살펴보고는 포기했던 무언가 같다. 표정에 장난기가 없다는 말에 묘하게 사악해보이는 미소를 짓는데요.
"잘 보면 장난스럽답니다?" 부드럽게 미소짓는 지한과.. 밀가루범벅으로 만들어주겠다는 듯 밀가루를 다시 꺼내려는 지한.. 동시에 존재해? 청소기는 아직 작동하며 열심히 빨아들이고 있네요. 적절히 끄고 비운 다음에 다시 작동시켜야지.. 안한다면 청소기가 터지고.. 망해버렷..!
쌀떡 밀떡 둘 다 맛있다. 섞어 쓰는 건 좋지 않지만 따로따로면, 둘 다 좋지? 묻은 것을 다 털어버리고, 청소기가 꽤 빨아들여 적당히 걸레질을 하면 될 것 같이 된 주변을 둘러봤다.
"그것도 좋지?"
소중한 걸 그대로 가지고 있고 싶어하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 아니려나. 나는 내 방 컵에 담긴 나뭇가지를 떠올렸다. 매화 흐드러질 때 가져와 물 담은 컵에 놓아둔 그것에는 이제 꽃이 없다. 가끔 그것에 다시 꽃을 피우며 놀 뿐이다. 영원히 지지 않는 꽃은 없다만, 가끔은 바라게 된다.
"장난으로 나 구멍 뚫리는 건 아니죠."
사악한 미소가 무섭다. 구멍은 안 뚫려도 부엌은 2차 개판인 날 것 같다.
"일단 꽤 청소기로 쓸었으니까 전원 끄고 걸레질이나 합시다-"
그래서 일부러 말을 돌렸다. 현타는 한 번이면 충분해요.. 근데 누나는 왜 여기 와서 나 대신 청소를 해줬는가. 좋은 사람이라니까 진짜.
"그런가요? 전 쌀떡을 조금 더 선호하는 것 같아서요" 그렇지만 밀떡도 싫지는 않고.. 음 그래도 윤의 말처럼 섞는 건 좀 그렇다. 그러면 밀떡의 단점이랑 쌀떡의 단점이 섞이는걸. 물론 좋아하는 이들은 밀떡의 장점과 쌀떡의 장점이라고 하지만.
"단점을 말하자면 나아가지 않으려 하는 것이겠지요?" 나아가려 하는 것도 붙잡아두려 하는 것이고.. 라고 생각합니다.
"의념이라.. 의념에 대해 생각해보거나.. 그런 수련도 해봐야 하는데. 잘 안되네요" 그건 알아서 해야 하는 걸까.
"흠. 구멍은 생각지도 않았는데.. 그것도 나쁘진 않네요." 라고 말하고는 옅게 미소짓습니다. 전원을 끄고 걸레질을 하자는 것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레를 가져오려 합니다. 슥슥 닦아내고 걸레를 빨고 다시 닦는 걸 반복하면... 밀가루가 터지기 전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