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우사카 시니카는 예언자가 아니다. 비어 있다- 그 말 그대로다. 불빛을 잃어버린 연등 껍데기들이 취하는 형태 중 매사 비관적이고 삭막한 말수 적은 불량학생의 형태로 남은 이 갈색 왜성은 상대방의 뒤를 내다보는 시력마저 잃어 눈앞에 둔 것만으로 상대를 판단할 수밖에 없다. 눈을 감은 것은 히키이건만, 오히려 시니카의 시력이 더 나쁠지도 모르겠다. 시니카가 보고 있는 것은 그저 자신처럼 야미나베에 입맛에 심히 맞지 않는 것이 섞여들어가는 바람에 토를 해버린, 자기 또래로 보이는 기모노 차림의 아이의 모습일 뿐이었으니까. 아마 그녀는 히키가 자신의 선배인 줄도 모를 것이다. 내 나이가 많아보이나요? 하는 말에 시니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히려 히키가 자신의 선배라고 하면 놀랍게 여기지 않을까? 그 뒤에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세월을 살아오며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겪어온 신이 있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말이다. 이렇게 짧은 안목으로 그렇게 많은 것을 담고 싶어하니, 이런 모습으로 무너지는 이들이 많은 것도 이상하지 않다.
상술했듯, 불빛을 잃어버린 연등 껍데기들은 저마다의 형태로 무너진다. 원래 취하고 있었던 모양의 탓도 있겠고, 그때르깨 흔들리는 물살이 그 모습에 영향을 끼치는 탓도 있을 것이다. 지금 눈앞에 놓인 이 껍데기는 비관적이고 삭막한 말수 적은 불량학생의 형태로 남았으되... 그러나 히키의 발걸음이 불안정하거나 하지는 않는지 히키의 발치를 흘끗 내려다보는 시선에서, 껍데기가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조금 유추할 수 있겠다.
히키가 자신의 몸을 가누는 데 별 이상이 없어보이자, 시니카는 손을 들어 가볍게 머리를 긁적이고 군말없이 히키의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마니또 선물을 학생회에 맡기고 온 시니카는 가만히 책상 위에 놓인 쪽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상 좀 피고 당당하게 다녀, 하는 구절에 그녀의 눈이 멎어 있었다. 자신의 마니또가 들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시니카는 나직이 차가운 숨을 내쉬었다. 파인애플향의 숨이 책상 위에 하얗게 쏟아지고 나서, 시니카는 차갑게 말했다. 아무도 없는 빈 교실에서, 들을 사람도 없으니까.
"...이게 인상 핀 건데."
또 인상 이야기다. 사실, 슬슬 부아가 치밀려고 했다.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배배 꼬이기 전에도 그녀의 뱀같이 노려보는 날카로운 눈빛을 지적하는 이들이 많았고,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고 나서도 그녀에게 걸려오는 시비거리 레퍼토리 중 가장 흔하게 보이는 것이 그녀의 눈빛이며 인상이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바뀐 것은, 가늘게 째진 입꼬리를 숨기기 위해 예쁘게 웃는 법 따위를 유튜브에서 찾아보며 배워서 가식적으로 꾸미고 다니던 미소가 사라진 것뿐이었다. 사실, 그 미소도 그렇게 효과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해도 엔젤전설의 기타노 세이치로 모양을 벗어나지를 못했으니까. (이제 와선 가장 존경스러운 캐릭터였다. 어떻게 그런 대접을 받고 살면서 한결같이 상냥한 사람일 수 있는지.)
그래서 누가 자신의 인상을 지적하면 꽤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시니카였으나, 지금은 신경질 같은 걸 부릴 사람도 없고, 신경질을 부릴 이유도 없고, 신경질을 부릴 기력도 없고, 무엇보다 어찌됐건 이 퉁명스러운 호의도 호의는 호의니까. 그녀는 쪽지를 집어들어 공책 한 켠에 끼워 보관해놓았다.
시니카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마니또가 놓고 간 초콜릿을 집어먹었다. 초콜릿,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는다.
>>923 이쯤에서 밝히는 시니카의 모티브의 일부.. :3 다만 세이치로는 어마어마한 강철멘탈 마이페이스지만 시니카는 그렇지 않다는 게 함정이지. 사실은 세이치로와 비슷한 강철멘탈의 장신 운동부 여캐로 내려고 했지만, 요즘 롤의 벡스에 꽂혀서 음침한 아웃사이더 느낌을 반쯤 섞었더니 캐릭터가 좀 다루기 힘들게 됐어 <:3 앗 하나만 털랬는데 두개 털렸다
한때는 음반을 수집했던 적도 있다. 유튜브에서 들어도 되지만, 왠지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물질적으로 좋아하는 게 이른바 '힙해보여서' 앨범을 직접 구매하는 것을 선호했던 적도 있었다. 이제는 그런 것도 피곤해서 하지 못하겠다. 자연스럽게, CD 플레이어에서 유튜브로 옮겨가게 됐다. 힙스터라곤 하지만 CD의 음질과 유튜브의 음질을 따지기까지 하는 황금귀는 아니었고, 무엇보다 유튜브에선 시니카의 취향에 맞는 이런저런 곡들을 추천받을 수 있었으니까.
그런 시니카에게 있어 이번 선물은 꽤 특이한 것이었다.
우연이겠지만, 그것은 한때 시니카가 가장 좋아했었던 밴드의 음반이었고, 거기다 시니카가 마지막으로 수집했던 그들의 앨범 바로 다음에 발매된 앨범이었다. 물론 그 안에 수록된 곡들은 다 유튜브를 통해서 들어보았고, 유튜브로 듣나 CD로 듣나 거기서 거기일 거라고 시니카는 생각했기에 그 선물 자체로는 그녀에게 별다른 의미 같은 것을 주지 못했다. 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라는 문장도 시니카에게 그렇게 감명깊은 문장은 아니었다. 이미, 자신은 다 때려치운 거나 마찬가지인 삶을 살고 있었기에 더 뭔가 때려치울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때려치울 것도 없는데 때려치우고 싶은 기분이 들면, 유튜브로 음악을 들으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그것을 바라보며, 시니카는 문득 CD 플레이어를 하나 새로 마련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시니카는 지금까지 이어폰을 애용해오고 있었지만, 얼마 전부터는 이따금 헤드셋을 끼는 모습도 보여주게 되었다. 스카잔을 입은 무심한 양키의 목에 걸려있는 헤드폰이라. 제법 그럴싸한 선물이지 않은가.
벚꽃이 지는게 여간 아쉬운게 아닌가보다. 하지만 계절이 가는 것은 순리이니 그것을 거스를 수는 없다. 봄은 적당한 때에 와서 적당한 때에 가는 것이 좋고 여름도 적당한 때에 오는 것이 좋다. 머리에 꽂은 벚꽃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히 걷고 있으니 이번에도 리리가 핸드폰을 가져온다.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려서 내쪽으로 가져오는 것을 보니 아까 내가 한것처럼 찍을 모양인가 싶었다. 나도 같이 브이자를 그리자 찰칵하는 소리가 들렸고 곧 핸드폰에서 라인 수신음이 들려왔다.
" 뭐, 그렇게라도 같이 있고 싶다면 어쩔 수 없나~ "
장난스런 표정과 함께 머리를 톡톡 두드려준 나는 편의점으로 와다닥 달려들어가는 리리를 따라서 천천히 들어간다. 편의점에 들어갔을땐 이미 과자를 한아름 들고있는 리리의 모습이 보였다. 잠에 잘 들게 해주는 물건을 만들어줄테니 과자를 잔뜩 사달라는 말도 덧붙였지만 리리가 들고 있는 과자는 너무 많았다.
" 다음에 또 사면 되니까. "
그래도 내 말은 웬만해선 잘 듣는 동생이라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며 남길 과자와 사갈 과자를 엄선하기 시작했다. 과자 콘테스트라도 진행하는 것인지 눈빛이 예사롭지 않던 고민의 시간은 이내 그 결정을 끝마쳤는지 아까보다 적은 과자를 안고서 내 옆으로 다가왔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나는 리리가 한참 고민하던 과자 두어개를 집어서 가져와 계산을 하면서 말했다.
" 항상 말하는거지만 무리하지 말고. 알겠지? "
내가 부탁했다고 막 너무 심혈을 기울이거나 그러지 말라는 뜻이다. 계산을 끝마친 과자들이 봉투에 담기고, 그것을 받아는 나는 인사와 함께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이미 한밤중이라 밝은 달이 하늘을 비추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보고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 뭐, 별 수 있나.
" 집에 가볼까~. "
그렇게 작은 콧소리를 흥얼거리면서 이것저것 소소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는다.